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25)
111. 합숙 (14)
늦은 시각, 레이드가 계속되고 있었다.
파티원의 숙련도는 올라가지만, 집중력과 체력이 점차 떨어진 탓에 레이드가 길어지고 있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넣긴 했으나 했던 걸 계속 반복한 후에 새로운 패턴을 공략해야 하니 피로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 싸대기에 익숙해졌더니 이제 다른 패턴에 죽고 있어. 새 패턴을 연습하고 싶어도 체력을 깎는 과정에서 또 실수가 나오고…….’
레이드는 구구단을 2단부터 9단까지 완벽하게 암송하는 것과 같았다.
적의 체력이 20% 남은 상황에서 전멸하게 되면, 다시 적의 체력이 100%인 상태에서 재도전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7단에서 틀린다 해도 자비 없이 다시 2단부터 암송을 시작해야 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면 실수를 안 하던 3단이나 6단에서도 실수가 나오고, 더 피로해진다.
이럴 때일수록 집중하고, 오더를 내리고 브리핑하는 파티장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파티장이 아무리 잘해도 한계가 있었다.
“물 싸대기 끝나고 화살비 내릴 거야. 5시부터 시계 방향으로 간다. 조심해.”
“다섯 시에서 시계 방향 확인.”
“……어? 어!”
유상훈이 정확한 오더를 내렸지만, 파티원이 따라가지 못했다.
장남욱은 혼자 일곱 시로 가려다 반시계로 돌다가 죽고, 도시후는 장남욱을 놀려 먹다가 다음 패턴에 죽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뉴비 트팟은 이런 맛에 보는 거지 ㅋㅋㅋㅋ]
[레이드 첫 트라이 때는 뇌정지 자주 오긴 해ㅋㅋㅋ 이해한다…….]
[창 또 죽 흑 또 죽]
게임 막론하고 팀전을 뛰는 자, 아날로그 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적응할 수 없다.
보통 방향을 지정할 때는 맵 기준으로 몇 시인지 말하고, 돌아야 할 방향은 시계, 반시계 방향이라고 지정한다.
이는 아날로그 시계를 읽을 줄 모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므로, 디지털 시계에 익숙한 이들은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다.
‘장남욱은 아날로그 시계를 읽을 줄은 알지만, 다급한 상황에서 빠르게 이해하고 움직일 만큼 익숙해지진 않았어. 앞으로도 실수가 나올 거야.’
도시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누워서 홀로그램에 뭔가를 그리다가 장남욱의 앞으로 전송했다.
손으로 그린 아날로그 시계에는 시계, 반시계 방향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시계 그려 줄게! 앞에 놓고 해!”
“……고맙다.”
장남욱은 떨떠름해하지만, 도시후는 나름 현명한 짓을 했다.
레이드 때에는 맵 옆에 저런 쪽지를 붙여 두면 아날로그 시계 이슈로 인한 리트라이가 줄어든다고 하니까.
그래도 실수는 계속 나왔다.
“왼쪽으로 피해!”
“왼쪽? 내 기준으로 왼쪽이야? 아니면 캐릭터 기준으로? 으아아아악!”
“아, 개 웃기네.”
[창술사 또 죽음ㅋㅋ비명 찰지네ㅋㅋㅋㅋㅋㅋ]
[진짜 누가 얻어맞은 거 같은 소리가 나왔는데???]
[방패병 대놓고 웃는다ㅋㅋㅋ]
[실친이 옆에서 저러고 있으면 개 터질 거 같긴 함.]
[방패병 창술사 뒤에서 출발했는데 피지컬로 살아남음. ㄷㄷ]
“디버프 해제 좀!”
“스킬 쿨이야. 아이템 써.”
“아이템 다 썼어!”
계산상 디버프 해제 아이템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모자르다니.
내가 스킬 썼을 때 같이 아이템을 썼나 보다.
서포터의 힐과 디버프 해제와 중복하여 아이템을 쓰는 건 초보들의 흔한 실수였다.
결국 작은 실수가 쌓여 리트라이가 반복되었다.
[공팟이면 지금 서폿이나 탱 탈주했다.]
[나 같아도 막트요^^ 외치고 빠른 탈주.]
[다들 플레이어라 체력이 좋아서 그런가 분위기가 안 떨어지네.]
[억텐 아님?ㅋ]
[넌 나가라.]
몇 시간 동안 비교적 평화로웠던 채팅창은 자정이 넘어가자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잘 사람은 자러 가고, 밤이 깊어서 그런지 화가 많고 과격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늘어났다.
[아 창술사 형 그만 죽어!ㅋㅋㅋ]
[형? 창술사 고2인데 너 몇살이냐? 급식이는 좀 자라.]
[급식 먹는 친구들 자야 되면 방패병도 자야 됨.]
[이 방송에 나오는 애들 다 급식 먹는데요.]
[급식만 먹는 게 아니라 디버프도 가서 다 처먹었네. 맛있냐?]
[그런데 버프는 왜 안 먹음???]
[배 불러서 나중에 아껴서 먹으려고 한 거겠지. 오해 ㄴ]
[그냥 닥치고 좀 봐라. 재밌는데 왜 저럼.]
[(매니저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또다시 칼춤이 시작되었지만, 주요 공격 대상인 장남욱을 포함한 파티원들은 채팅창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아직 파훼하지 못한 패턴이 있어 다들 연구하고 토론하기에 바빴다.
채팅창은 매니저인 내가 체크하고, 유상훈은 쉬는 시간에만 후원 감사 인사와 소통을 위해 확인하기로 한 상태였다.
그만큼 공략 중 소통이 안 되긴 했지만, 오늘 채팅방 상태를 보니 이렇게 하길 잘한 것 같다.
“…….”
조용하다 싶었더니 유상훈이 녹화한 게임 화면을 돌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1인칭 시점으로 녹화된 유상훈의 인게임 영상은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의 시점답게 박진감이 넘쳤다.
그런데 왜 저걸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 째 반복한 상황인데, 뭔가 거슬리는 점이 있었나?’
버그라도 찾은 건가 싶어서 같이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유상훈이 말했다.
“야, 작년 청소년 수련회 기억나?”
[작년 청소년 수련회? 아, 은광고에 뭔 사건 있었잖아.]
[방패병도 거기 있었나 보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바다의 벽 영상 나온 사건 말하는 듯.]
[아 나도 그거 봄.]
[그게 뭔데.]
[같이 보자, 링크 좀.]
[채팅창은 링크 안 걸리니 알아서 검색ㄱ]
청소년 수련회 당시 김유리의 광림이 부른 광기 어린 파도가 섬을 덮쳤었다.
작년엔 권제인의 광림, 수면의 요영(謠詠)과 권레나의 합주가 파도를 진정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플마고에서는 아니었다.
해일은 섬 대부분을 삼켜 버리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내고, 김유리는 자신이 사망하는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때까지 등교하지 않는다.
‘나도 그때를 떠올리긴 했는데.’
유상훈의 말이 계속되었다.
유상훈은 녹화한 영상을 느리게 재생하며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해일을 부르는 타락 정령’ 뒤로 눈에 띄지 않는 광원 효과가 보였고, 효과가 강해질 때마다 비명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웅장한 BGM에 섞여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집중해서 들어 보니 희미하게 들렸다.
“영상에 공략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요소가 보여. 단순 연출일 수도 있는데…… 어쩌면 숨겨진 아이템이나 맵, 공략법이 있을 수도 있어.”
유상훈이 왜 굳이 작년 청소년 수련회를 상기시켰는지 깨달았다.
현재 이 게임에서는 해일을 일으키는 원인을 쓰러뜨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인 청소년 수련회 때에는 다른 방법으로 사건을 수습했다.
“혹시 푸른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것처럼 공략하자는 거야? 음유시인의 광림이나 스킬로?”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하겠다.”
“수면을 다루는 광림이나 스킬은 없어.”
[직접 쓰러뜨리는 거 말고도 공략 방법이 있긴 함.]
[아, 입이 근질근질하네. 힌트 줘도 됨?]
[그런데 그 방법 써도 결과는 똑같잖아.]
[그냥 안 잡고 해탁이가 지쳐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 말하는 거임?]
[훈수는 사형.]
[(매니저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아오, 훈수충이 또!]
[이 게임 오픈한 지 얼마 됐다고 시청자들 다 고였네. 다른 공략법도 안다고?]
[신입 스트리머한테 붙는 건 원래 다 고인물들임ㅋㅋㅋㅋㅋ]
남궁규연이 자세한 훈수가 적힌 채팅을 빠르게 삭제하긴 했지만, 초반의 내용만 봐도 짐작이 갔다.
진도가 빠른 공략 팀에서 이미 쓰러뜨리는 것 말고도 버티는 방법을 택해 클리어에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골라 깨든 결과는 같아 보였다.
‘이 갓겜이 히든 요소를 마련했는데, 결과가 달라지지 않게 해 뒀다고?’
유저가 특별한 업적을 달성해도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는 건 망겜에선 흔히 있는 일이지만, 갓겜에서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유상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회의는 점점 길어졌다.
추리 과정을 즐기는 시청자들도 있었지만, 선발대 기준 단물 다 빠진 콘텐츠를 두고 회의하는 걸 지겨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 회의 언제 끝나.]
[어차피 창술이 또 죽어서 리트겠지. 직업 밸런스 개판인데 하필 최약체인 창술을 초보가 잡냐.]
[창술사 진짜 너무 약해요…… 상향 필요함……]
[창넘약 창상필]
[창술 징징이들 다 몰려왔네. 창술 상향은 둘째치고 활쟁이 너프는 좀 해야 될듯.]
[왜 가만히 있던 궁수가 처맞음? 너 총잡이 키우지?]
[총잡이 다음 패치에 무조건 너프 간다. 딱 대.]
[응, 난 총잡이 안 키워ㅎ 너프 먹든 안 먹든 알 바임?]
[직업 밸런스 토론할 거면 나가서 해;;;]
[님들 이 방송 몇시부터 한 거임? 몇 줄까지 봄?]
[아, 이제 저 질문 보면 개역겹네. 직밸 언급보다 더 빡침.]
[방송 시간 빌런 제발 차단 좀.]
[낮부터 시작했어요. 거의 다 깨고 지금은 쓸데없는 걸로 토론 중.]
게임 접은 사람도 관짝을 부수고 나올 정도로 흥분하게 만든다는 직업 밸런스 토론이 나온 걸 보니 더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
남궁규연이 직업 밸런스 언급 시 차단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저 주제는 나오지 않겠지만, 서둘러야겠다.
‘여태까지 보인 패턴, 채팅창으로 본 훈수 비슷한 말들, 유상훈이 발견한 위화감…….’
단서들을 머리에 정리하고 있을 때, 토론 중이던 셋이 조용해졌다.
“오…….”
“방금 좀 수상했지?”
“응, 많이.”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채팅창에선 수상한 얼굴 같이 보자는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일단 주변 반응을 무시하고 유상훈에게 제안했다.
“다음 패턴 넘어가면 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알았다.”
“아직 뭐 할지 말 안 했는데.”
“알았으니까 한다고.”
“우리도 할 거야!”
“응, 그럴게.”
뭘 할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유상훈이 알겠다고 하고 다른 두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유상훈은 듣지도 않고 레이드에 진입해 버렸다.
그냥 안 듣고 저지르는 쪽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긴 초보인 우리와 어울려 게임하는 즐겜러가 이성적으로 공략을 할 리가 없었다.
긴 토론을 한 덕일까, 우리 파티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해탁이의 체력을 줄여 갔다.
마침내 남은 체력은 5% 미만.
거의 상대를 쓰러뜨리기 직전에 이르렀다.
―아아아아아……!
정령의 비명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물방울이 탄환처럼 무겁게 변해 힘을 머금고 이리저리 튀었고, 물보라가 바깥으로 퍼지더니 바다가 벽처럼 솟아올라 맵 주변과 정령을 감쌌다.
그리고 1페이즈에서 보았던 ‘물 제물의 침식’이라 불리던 물기둥이 네 개 소환되었다.
바다의 벽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정령, 정령에게 힘을 보내는 네 개의 물기둥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거의 다 잡았는데, 체력이 차고 있어! 빨리 잡아야 할 것 같아!”
“이게 마지막 패턴인가 봐.”
[ㄱㄱㄱㄱ]
[킹기 왔다.]
[제발 죽여어어어!]
[빨리! 해탁이 피 찬다!]
[물기둥부터 없애도 됨. 정령 때릴 거면 거리 두고 ㄱ.]
[아무도 안 물어봤음.]
[훈수충이 또;]
[차단을 해도 벌레처럼 훈수충이 계속 나오네.]
물기둥으로부터 힘을 받아 조금씩 타락 정령의 피가 차오르고 있었다.
이게 해탁이의 마지막 패턴인 듯했다.
시간 내로 쓰러뜨리지 못하면 우리는 이능파와 아이템을 크게 소모한 채로 만전의 상태인 해탁이를 다시 상대해야 할 거다.
장남욱과 도시후는 큰 스킬을 쓰기 위해 준비했지만, 내 공격 버프가 들어오지 않자 스킬을 쓰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상훈은 대놓고 내가 뭘 지시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광림을 써서 길 열어 줘. 벽 너머 정령 앞으로 갈 거야.”
[???]
[지금 정령 앞으로 간다고?]
[뭐 하자는 거임?]
[같이 죽자는 건가.]
[음유시인 잘하다 왜 저럼;]
[레이드하다 한 번 이상 트롤 짓 하는 건 뉴비 특인 듯?]
[죽으려면 혼자 죽지; 방패병 광림 날리지 말고.]
[아, 그냥 혼자 죽으라 해요. 5%만 남으면 서폿 없어도 그냥 딜찍 가능.]
[지금 무명의 초신성에게 죽으라고 한 건가?]
[대담한 분이 계시네요.]
[(매니저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매니저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매니저에 의해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여론이 어떻든, 유상훈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알았다.”
게임 시간으로 하루에 단 한 번 사용 가능한 광림인 만큼, 화려한 이펙트가 작렬했다.
유상훈이 이능파를 휘감은 방패를 높게 들어 올리자 방패병의 광림 사용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바다의 벽이 갈라졌다.
이어서 나도 광림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