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9화 (9/273)

없는 게 없는 무인도 (2)

*

“허어.”

안전구역으로 다가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크리스탈, 웨이포인트였다.

유명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속 건축물을 빼닮은 그것은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어서 태양이 크리스탈을 비추면, 주변을 일렁이는 쪽빛의 바다로 만들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자태.

잘 가공된 거대 보석을 마주한 느낌이다.

나는 무심코 웨이포인트에 다가가 손을 얹었고.

[월광도 웨이포인트가 저장되었습니다.]

[월광도 외에 저장된 웨이포인트가 없어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안내 문구와 함께 웨이포인트에서 빛이 솟구쳤다.

레이저처럼 곧게 뻗어 나간 푸른빛은 하늘을 꿰뚫을 듯 강렬하다.

한번 저장된 웨이포인트는 계속 빛을 내뿜는데, 해당 웨이포인트를 저장하지 않은 사람에겐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방금까지 내게 보이지 않던 것처럼.

“이 빛의 기둥을 이정표 삼으면 어딜 가더라도 길을 잃을 일은 없겠네.”

월광도엔 웨이포인트가 이것뿐이다.

아니, 오히려 무인도에 웨이포인트가 있는 게 기적이라 해야 할까?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딸랑 네 군데가 있을 뿐이니 말이다.

‘웨이포인트가 있으면 뭐하나. 써먹질 못하는데.’

웨이포인트는 선택한 장소로 공간이동을 시켜주는 기물이다.

하지만 직접 방문하여 활성화 시킨 웨이포인트로만 공간이동을 할 수 있으니, 지금의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문뜩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월광도를 벗어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 섬은 나만 오갈 수 있는 땅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무인도의 웨이포인트까지 활성화 시키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나만의 비밀 장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탈출에 성공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헛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인 나는 사람을 홀리는 웨이포인트에서 시선을 뗐다.

‘저게 안전구역이란 말이지?’

웨이포인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

중세 유럽 느낌의 건물들이 자리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양식이 중세스럽다는 거지, 낡은 느낌은 없고 건물들이 하나같이 웅장했다.

[안전구역에 입장했습니다. 안전구역은 하루 30분 동안 제한 없이 이용 가능하며, 그 이후 10분당 1코인이 소비됩니다.]

[유료 시설을 이용할 경우 안전구역의 이용비용은 중복으로 청구되지 않습니다.]

[안전구역에선 피로도가 빠르게 해소되며, 부상과 상태이상, 소모된 마력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하루 동안 겨우 30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뒤이은 추가 기능 설명에 그럼 돈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르르르.

나는 손등을 간질이는 느낌에 그곳을 바라보았고, 오크와 싸우면서 생긴 쓸린 상처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수준까지 파악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웬만한 외상은 30분 내로 회복되지 않을까?

앞으로 안전구역이 생존 활동에 필수 요소가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무인도에 맞지 않게 규모가 큰 것 같은데?’

안전구역도 조금씩 규모가 다르다고 들었다.

안에 있는 시설도 조금씩 차이가 있고 상점에서 파는 물건도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꼭 포함되어 있는 시설 3개가 있다.

그건 바로 이것이다.

[화장실]

[목욕탕]

[호텔]

화장실은 말 그대로 화장실이다.

사용비용은 따로 없으며 안전구역을 이용 중인 사람에겐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변기는 전부 건식이며, 휴지는 각자 해결해야 하고, 세면대도 없다.

똥오줌을 쌀 공간만 제공한단 뜻이다.

‘씻고 싶으면 목욕탕을 가라는 거지? 역할 구분 확실하네.’

목욕탕은 유료다.

10분당 5코인 꼴로 이용할 수 있다.

[입장과 동시에 복장이 해제되며, 퇴장 후 깨끗해진 기존 복장으로 자동 착용 됩니다.]

목욕탕=물이다.

목욕탕을 잘만 이용하면 식수가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목욕물은 외부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이 건식일 때부터 알아봤는데, 시스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해진 용도 이상의 혜택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쪼잔하긴.’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목욕물의 외부 반출이 안 될 뿐이지, 내부에서 먹는 건 상관없다는 뜻 아닌가.

만약 상점에서 물을 안 판다면 이런 식으로 목을 축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호텔은···.”

호텔은 욕실과 화장실이 모두 딸린 일반적인 형태의 방을 제공한다고 한다.

다만 호텔은 8시간 동안 머물 수 있는데, 그 비용이 무려 100코인이다.

아무리 봐도 이건 일반인을 위해 만든 시설이 아니다.

코인은 몬스터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고, 100코인이면 오크 열댓 마리를 잡아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니까.

‘VIP 서비스란 건가?’

지금 내가 가진 돈이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불필요한 지출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내겐 안전 텐트가 있지 않은가.

“기본 시설 3개는 살폈고.”

이제 남은 시설 3개가 무엇인지 살필 차례다.

[상점]

[공방]

[신전]

그토록 바라던 상점이 떴다.

내가 안전구역을 방문한 주목적이기도 하며, 판매하는 물품에 따라 생존 난이도가 대폭 낮아질 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기대를 품고 상점 안에 들어갔다.

내부는 마트처럼 여러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열된 상품을 본 나는···.

[건축 자재]

[주방용품]

[악기]

“에라이 시팔.”

욕설을 내질렀다.

식품의 식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물 정도는 어디에 끼어 있을지도.’

그래서 이리저리 상품을 살펴봤으나, 애석하게도 물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 코너에서 물병은 파는데 물이 없네?’

이대로 내 식수는 목욕탕 물이 되는 걸까?

한숨을 내쉰 나는 상품들을 살폈다.

“음···.”

그러다가 바닷물을 담수로 만들어줄 증류장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코너 자재로 아궁이 만들고, 그 위에 주방코너에서 산 냄비를 얹어 바닷물을 끓이면 어찌어찌 식수문제는 해결되겠네.’

조금 쉽게 가나 했는데, 서바이벌의 묘미를 잊지 않는 월광도다.

허무한 표정으로 상점을 벗어난 나는 공방이란 곳에 들렸다.

공방은 사냥과 채집을 통해 얻은 소재를 이용해 장비를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오크가죽 갑옷 상의 제작]

-재료: 오크가죽 5장, 실 5묶음

--오크가죽: 오크 사냥으로 수집

--실: 거미형 몬스터 사냥으로 수집, 모풀 채집

이런 식으로.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채집기능이 있다는 거다.

앞으로 주변을 잘 살펴보고 다녀야할 것 같다.

어디에 채집 아이템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로써 안전구역 내의 시설 6곳 중 5곳을 살폈다.

이제 남은 시설은 신전뿐이다.

“으리으리하구만.”

지금까지의 건물들이 일반적인 중세 유럽의 양식이라면,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양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물이었다.

신전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에게도 들은 적이 없어서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내부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전사님.”

“으악!”

그랬더니, 하얀로브 차림의 여성이 반갑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는 게 아니겠는가.

설마 월광도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기겁했다.

“누, 누구세요?”

곧이어 마음을 추스른 나는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정체를 물었다.

“저는 이 신전의 관리자. 윌리아라고 합니다.”

“······.”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

그녀의 자기소개에도 ‘얜 뭐지?’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데 그때.

이상현상이 발생했을 당시 떠올랐던 메시지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각지에 웨이포인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안전구역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특수 지형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특수 자원이 생성되었습니다.]

[각지에 몬스터와 NPC가 생성되었습니다.]

그중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NPC란 단어가 거론되었던 게 기억났다.

“당신이 NPC군요?”

이게 가상현실 게임이라면 NPC에게 ‘너 NPC지?’고 묻는 건 비매너일지 몰라도 여긴 현실이다.

쓸데없는 배려는 집어치웠다.

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그녀는 그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것이 신에게 사명을 받고 이 땅에 내려온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면. 맞습니다.”

NPC라···.

윌리아는 아무리 봐도 같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게 상식을 벗어난 초월적인 것이었지만, NPC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라서 그런지, 이 상황이 더욱 기이하게 다가왔다.

“이곳에서 뭐 하시는 거죠?”

“저는 전사 여러분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어떤 도움이요?”

“중증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전투에 도움이 될 축복을 걸어드리고 있죠. 그리고 때로는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선량한 미소와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그 모습에서 나는 은은한 분노와 적개심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세상에 닥친 이변에 이들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진정하시지요.”

그런데 내게서 좋지 않은 감정이 읽은 걸까?

윌리아가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고, 곧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며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감정까지 조절한다고?”

내가 경악하자 그녀는 오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저 긴장감을 풀어드린 것뿐입니다.”

윌리아는 연신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고요.”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의 미소에 인중 펀치로 답을 대신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화풀이를 하는 것보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얻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 말입니까?”

“네.”

내 물음에 그녀는 외모에 어울리는 상큼한 말투로 답했다.

“저와의 친밀도가 낮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뭔 쌉소리란 말인가?

친밀도?

설마 게임처럼 친밀도 작업이 필요한 존재라고?

“다만 지금 단계에서 드릴 수 있는 조언은 한 가지 있죠.”

“뭔데요?”

황당해하는 내 표정에 무안해졌는지 그녀는 돌연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강해지세요.”

“네?”

“이대로 강해지다 보면 자연히 원하는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윌리아는 대뜸 내게 팔짱을 껴왔다.

산뜻한 향기와 함께 인간과 다름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뭐지? 나 꼬시나?

외모는 이상형에 가깝긴 한데···.

“현재 서백호님은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순간 NPC도 인간과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란 상상까지 갔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나단 뜻입니까?”

“뜻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윌리아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떠나 사람 다루는 솜씨는 매우 능숙한 것 같다.

적개심이 어느새 무뎌져 있었으니 말이다.

“뭐···. 이 무인도에서 말동무가 생겨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죠.”

톰행크스에게 윌슨이 있었다면 내겐 윌리아가 있는 셈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신전의 기능을 물었다.

그 결과 상급 회복 물약 수준의 ‘힐’ 스킬을 30코인이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받을 수 있고,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하는 ‘블레스’ 스킬을 20코인에 받을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

블레스 스킬은 1시간 동안 유지가 되며 하루 3회까지 받을 수 있다.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그런데 아까 신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셨는데, 그건 퀘스트를 준다는 의미입니까?”

“퀘스트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얼버무리면 그 부분은 친밀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신전의 기능을 알게 된 나는 마지막으로 친밀도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친밀도가 올라가면 뭐가 달라지나요?”

“그럼요. 많은 게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죠.”

“???!!!!”

의문을 표하던 내 머릿속에 번개가 친다.

그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동료로 절 고용할 수 있단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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