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탈출 (3)
가의도에 등장한 낯선 인물.
그에 감자를 강탈해가던 사내도, 김용근 부자도 말을 잃었다.
지금 섬이 어떤 상황이던가.
와이번이 등장한 이후 배를 띄우지를 못해 섬에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와이번의 둥지가 산림에 위치해 있고, 마을에선 슬라임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 생활에 큰 문제는 없지만, 고립에 의한 생존자들의 스트레스는 극심했다.
그런데 태연하게 마을을 활보하고 있는 저 청년은 누가 봐도 외부인이다.
당연히 ‘어떻게?’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마을에 저런 사람이 있었어?”
사내의 물음에 방금까지 신경전을 벌이던 김용근도, 그의 아들도 고개를 도리질했다.
결국, 사내는 무심히 걸음 옮기는 청년을 따라가 붙잡았다.
“너 뭐야?”
하지만 사내는 청년의 발길을 붙잡고 나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허리춤에 길다란 검을 차고 있는 인물이다.
더구나 신장도 180이 넘는 데다가 몸도 다부지고.
비록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남이지만, 분위기와 눈빛이 학창 시절 일진도 건드리지 않던 ‘운동하는 애’의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사람인데요?”
“아니,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그럼 질문을 똑바로 하시던가요.”
사내는 장검의 청년이 자신을 놀린다 생각하여 발끈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았다.
“너 외부인이잖아? 이 섬에 어떻게 들어왔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면 이해할 순 있다.
하지만 왜일까?
눈앞의 청년이 정상적인 루트로 섬을 방문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엄쳐서요.”
“뭐?”
그리고 이어진 청년의 대답에 사내는 두 눈을 가만히 깜빡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자꾸 날 놀리네?”
결국, 참다못한 사내의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청년이 자신의 장검에 손을 얹자, 사내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너, 너 거기서 딱 기다려.”
그리고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내뱉으며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부리나케 도망쳤다.
청년은 그런 사내의 볼품없는 모습에 고개를 내저으며 기다리란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봐 학생.”
그러나 청년의 걸음은 다시 멈췄다.
텃밭에서 지금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김용근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네, 말씀하세요?”
“시원한 음료수 한잔하겠나?”
“······.”
뜬금없는 제안.
김용근의 아들은 아버지의 돌발행동에 기겁했지만, 장검의 청년은 그 말에 관심을 보였다.
“콜라 있습니까?”
“콜라는 물론 사이다와 주스도 있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
“크으으으으!”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콜라는 훈련소 종교활동 때 초코바와 함께 받았던 콜라다.
그런데 그때의 맛을 오늘 갱신했다.
몬스터에 쫓기며 바다를 헤엄치고, 약 두 시간 동안 자갈 갯벌을 걸어 온 끝에 다다른 섬 가의도.
이제 안전구역으로 가서 목욕탕물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친절한 주민이 건네준 콜라 뚱캔 하나는 극상의 청량함을 선물해주었다.
“하나 더 하겠나?”
그리고 친절한 주민이 이번엔 사이다를 내밀었고, 나는 또 원샷을 때렸다.
원랜 마을 주민들과 관련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강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음료수 한잔하겠냐’란 제안은 서큐버스의 유혹만큼이나 강력해서 도무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콜라에 이어 사이다까지 한 번에 710ml의 음료를 해치운 덕에 갈증은 싹 가셨다.
덕분에 뒤늦게 가의도 주민과 엮이고 만 것에 대한 리스크를 떠올리게 되었다.
“밥은 먹었고?”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어진 친절을 거절하려 했는데···.
“참치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 김 정도는 바로 내어줄 수 있네만···.”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갈증만큼 허기가 진 상황에서 한국인이라면 거절하기 힘든 메뉴를 읊는 바람에 다시금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음료수를 얻어먹었을 뿐만 아니라 식사에 사과로 디저트까지 대접을 받고 말았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어느새 목욕까지 마치고, 마당에 나와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서운 곳이다.’
뒤늦게 이상을 깨달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도 편안해서 하마터면 자고 갈 뻔했다.
주섬주섬 인벤토리에서 검과 매직로브를 꺼내 착용했다.
덕분에 남들이 보면 만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 내가 보면 중2병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가려고?”
“네, 웨이포인트 찍고 안전구역 가서 상점 좀 둘러보려고요.”
“웨이포인트로 돌아갈 곳은 있나?”
“네.”
자신을 김용근이라 소개한 친절한 주민은 길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그 집을 떠나려는데···.
그냥 이대로 가는 건 왠지 먹튀 같고 찜찜해서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레벨: 25
-칭호: 없음
-능력치
근력: 근력: 13(+1) 순발력: 15 마력: 11(+2)
잔여 능력치 포인트:
-보유 코인: 7,352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유 코인 부분을 터치했다.
[출금하실 금액을 입력하세요.]
그러자 이런 메시지와 함께 숫자 입력 칸이 등장했다.
나는 300을 입력하고 출금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 황금빛이 번쩍이고 그것을 손으로 움켜쥐자 100코인 3개가 현물이 되었다.
“밥값입니다.”
나는 그것을 김용근에게 건넸고.
그 금액을 본 김용근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아니, 300코인이라니···. 너무 많네. 필요 없어.”
역시 안전구역을 낀 마을인 만큼, 코인의 사용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300코인이면 많은 금액이긴 하다.
그랑 다이어 울프 20마리 또는 하급 서큐버스 10마리 값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귀한 식사를 대접받았기에 아깝지 않았다.
필요 없다며 코인을 돌려주려는 김용근을 뒤로하고 나는 그 집을 나섰다.
“여깄었네?”
그런데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 밖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남자 7명에 여자 1명.
연령은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식칼을 붙여 만든 창이나 도끼, 괭이 등을 쥐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전구역 상점에 무기점은 없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뭡니까?”
내 물음에 아까 시비를 걸어왔던 사내와 함께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남성이 다가왔다.
리더는 평범한 30대 회사원처럼 보였다.
“딱히 그쪽하고 드잡이질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기 들고 우르르 몰려와 놓고 할 말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분명히 말했다.
“이 섬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압니다. 이곳 일에 관여할 생각 없으니, 내버려 두시죠.”
그리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자신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가자 오히려 놀란 건 그쪽이었다.
“어딜 가려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란 이야기 들었지? 여기서 법은 바로 우리야.”
그러나 리더는 내 앞에 도끼를 내밀며 길을 막았다.
그냥 뚫어 버릴까 싶었지만, 문뜩 궁금해졌다.
이들이 뭘 바라고 이러는 건지.
“뭘 원하시는데요?”
내 물음에 이제야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을까?
리더가 그럼 그렇지란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너, 헤엄쳐서 왔다며, 사실이야?”
“네.”
“경로는?”
“신진도요.”
“언제 도착했는데?”
“아까요.”
왠지 월광도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육지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쳤다.
‘신진도’는 본래 섬이지만, 태안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육지나 다름이 없고, 가의도와의 거리는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인터넷을 보니까 이제 바닷속에도 괴물이 나온다던데?”
“이 섬에 도착하기 직전에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운이 좋았죠.”
“굳이 힘들게 이곳에 온 이유는?”
“섬에 웨이포인트가 있다고 들어서요. 뭔가 특별할 줄 알았죠.”
이게 뭐하는 건가 싶은데.
적당히 대화만 하고 상황이 해결되면 나쁠 것 없으니,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섞으면서 적당히 답했다.
“레벨은 몇이야?”
“12이요.”
레벨은 절반 정도 낮춰 불렀다.
하지만 실수였다.
내 입장에서 나름 낮춰 부른다고 낮춰 부른 건데, 이들에겐 지나치게 높은 수치였나 보다.
“이게 어디서 구라를!”
“인터넷에서 제일 레벨이 높은 사람도 10도 안 된다던데!”
그렇게 차이가 크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레벨이 10을 넘긴 사람은 충분히 있을 거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레벨 10 정돈 금방 올리죠. 아마 저 말고도 많을 걸요?”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리더의 도끼를 빼앗아 손잡이를 수수깡 꺾듯 똑 부러뜨렸다.
“······.”
그때야 거짓말하지 말라던 사람들의 입이 오므렸다.
자신의 무기를 아무렇지 않게 부러뜨린 내 모습에 리더는 흠칫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럼 자넨 웨이포인트만 찍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군?”
“그렇죠.”
나를 지칭하는 호칭이 너에서 자네가 되었다.
“그럼 자네에게 제안하지.”
이제 슬슬 지루해져서 그냥 무시하고 돌파할까란 생각이 들 때.
리더는 제안이란 흥미로운 단어를 꺼냈다.
“자네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외부를 오갈 수 있는 사람이야.”
“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으면 자네가 바깥에서 구해다 주게. 인벤토리가 있으니 제법 많은 물건을 옮길 수 있지 않나.”
이런···.
거짓말하다가 발목을 붙잡혔다.
나 실은 육지에 못 가는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결제와 보상은 어떻게 하시게요?”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내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네?”
“자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보복을 당할 테니까.”
신박한 계산법이다.
난생처음 보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제안해온다고?
무슨 삼류 악당 같은 짓을···.
‘뭐지? 나만 계산법이 이상한 것 같은가?’
내가 황당해하자, 리더는 나와 시비가 붙었던 사내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등지고 있던 김용근의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무슨 짓이야?”
-빡!
당연히 그런 헛짓을 용납할 리가 없다.
나는 아까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사내의 팔을 꺾은 후, 주먹으로 턱을 올려쳐 기절을 시켜 버렸다.
너무도 간단히 한 사람을 제압해서일까?
그들은 황급히 나와 거리를 벌렸다.
“움직이지 마!”
그리고 그때.
근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30대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소리쳤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사냥총이 들려 있었다.
“당신들이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눈에 선하네.”
총기가 등장한 순간 레벨이고 뭐고 소용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리더의 얼굴에 뻔히 드러났다.
나는 득의양양해 하는 리더를 향해 물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냥 서로 도우며 살면 좋잖아?”
어느새 내 말투는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더는 상대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상이 무너지고. 법과 질서가 파괴되었잖나.”
“그래서 내키는 대로 살겠다고?”
“그래, 이제 억압을 받을 필요가 없단 뜻이지.”
“병이네, 병. 그거도 중증 중2병.”
뭐, 조금은 이해가 되긴 한다.
강한 규율 속에 살아온 사람이라면 해방감을 느낄 법도 하니까.
안 그래도 세상이 파괴되고, 모두가 목숨을 위협받는 이 상황을 평등의 도래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인터넷으로 보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럼 나도 내키는 대로 하면 되겠네?”
내 물음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능력이 있긴 하고?”
비웃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람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내 물음에 김용근과 그의 아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부를 묻는 내 뒤로 관광객 파벌의 9명이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으으으.”
“사, 살려.”
“아파.”
그렇다.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인 양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던 이들에게 강제로 윤리와 도리라는 것을 뼛속에 새겨준 것이다.
원랜 간단하게 웨이포인트만 등록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들 때문에 괜히 피를 보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놈들은 살려둬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해양 몬스터의 밥으로 던져 주는 게 어떨까요?”
“그, 그건 좀.”
무시무시한 내 제안에 김용근 부자는 기겁했고, 쓰러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얌전히 갈 길 가겠다는 사람까지 건드려서 이 꼴을 당한단 말인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럼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좋을 대로 처리하세요. 직접 피해를 본 건 여러분들이니까요.”
“고, 고맙네.”
어느새 마을 밖으로 김용근 부자 외에도 많은 주민이 나와 있었다.
일단 이들의 처우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상황 봐서 주민들이 감당 못 할 것 같으면, 바다에 던저 버리던가 해야지.
[가의도 웨이포인트가 저장되었습니다.]
[이동 가능한 웨이포인트 1개가 검색되었습니다.]
-월광도 (비용: 52코인)
나는 원래 목적지인 가의도의 안전구역에 향했다.
우선 웨이포인트를 저장시키고.
그 다음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안전구역의 상점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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