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탐색 (1)
가의도 안전구역의 규모는 무인도인 월광도보다 훨씬 작았다.
그리고 그건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월광도의 상점이 마트 느낌이라면 가의도의 상점은 동네 할인점 느낌이다.
다만 두 상점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공구]
[생활용품]
[미술용품]
식품을 안 팔기는 마찬가지란 점이다.
“에라이.”
그리고 두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의 컨셉이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가의도: 공구, 생활용품, 미술용품
-월광도: 건축자재, 주방용품, 악기
두 곳에서 재료를 구매하면 집도 짓고, 내부의 시설도 완벽하게 꾸밀 수 있을 것 같다.
덤으로 취미를 위한 물건까지 구비되어있으니, 먹을 것만 빼고, 나머진 다 구할 수 있는 상태다.
“식량은 절대 쉽게 안 내어주네.”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이곳에서 살만한 상품들을 구매했다.
공구 코너에서 사냥에 필요한 스테인리스 와이어와 못을 구매하고, 생필품 코너에선 휴지와 물티슈, 수건 등을 구매했다.
“그나마 물 걱정은 없어져서 다행이다.”
물은 가의도 주민들에게 요청하면 부족함 없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긴 지하수가 뚫려 있어서 수도꼭지만 돌려도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오니까.
‘앞으로 한 달 정도만 더 지나면 본격으로 추워질 텐데 걱정이야.’
조금씩 겨울을 대비해 둬야 하는데, 그놈의 먹을 게 문제다.
이곳 주민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어찌 겨울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원이 한정되어있는 건 이곳 역시 마찬가지니, 마냥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궁리가 필요해 보인다.
“나도 농사를 지어야 하나?”
월광도와 가의도 상점의 물품을 합치면 얼마든지 비닐하우스 정돈 만들 수 있다.
마침 내게 식사를 대접해준 김용근이 텃밭에서 감자를 기르던 것 같으니, 씨감자 구해 심는 것도 방법이다.
“가만···. 굳이 내가 농사까지 지어야 하나?”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차라리 월광도가 아니라 이곳 가의도에 비닐하우스를 잔뜩 지어서 주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겨우내 식량이 궁하긴 이곳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즉, 힘을 합치자는 거다.
‘내 코인으로 비닐하우스 등, 농사를 위한 자재를 구입하고, 이곳 사람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여 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거야.’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아무래도 월광도에 가기 전에 이곳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겸사겸사 그놈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살펴보고.
나는 상점을 나서며 가의도의 안전구역을 살폈다.
[화장실][목욕탕][호텔][상점]
위 네 가지 시설은 월광도와 같고, 이곳엔 공방과 신전 대신, ‘도박장’이라는 시설이 딸려 있었다.
순간,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머릿속이 번뜩였다.
이유는 내 인벤토리 10칸 중 1칸을 사치스레 차지하고 있는 아이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행운의 탈리스만 / 희귀]
-소유자에게 행운을 더해주는 아이템.
-인벤토리에 보관해 두면 효과가 적용된다.
도박은 운빨 게임.
그런데 이 아이템이 있다면 단순히 운빨이 아니게 되는 거 아닐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도박장에 들어섰다.
도박장엔 슬롯머신과 온갖 게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슬롯머신 앞에 앉았더니.
-띠링.
[공정을 위해 행운 관련 아이템의 효과가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이런 메시지가 뜨며,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역시 이놈의 시스템은 만만치 않다.
“쯧.”
나는 혀를 차며 도박장을 나서기로 했다.
[아이템 뽑기]
하지만 출구 쪽에서 시선을 확 잡아끄는 슬롯머신을 발견했다.
[일반 등급의 재료템부터 희귀등급의 무구까지. 당신의 행운을 시험해보세요.]
“허···.”
역시 세상에 닥친 이변은 K-게임을 기초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누가 봐도 코인을 빨아 먹기 위해 만들어진 슬롯머신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슬롯머신 상단에는 친절하게도 확률표가 공개되어 있었다.
[일반등급 90%, 고급등급 9%, 최고급등급 0.9%, 특수등급 0.09%, 희귀등급: 0.01%]
덕분에 아이템의 등급 체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확률도 참 K-게임스럽네.
“함정이구만. 아이템 등급만 확률로 표기되어 있잖아. 0.01%의 확률을 뚫고 희귀등급 아이템이 나오더라도, 재료템 하나만 덩그러니 나올 수 있는 거 아냐?”
아마 희귀등급의 무구가 나올 확률은 표기된 것보다 훨씬 낮을 거다.
나는 냉정히 이성을 유지하며 해당 슬롯머신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그래도···. 시험 삼아 한두 번 정돈만 돌려볼까?”
그냥 지나치기엔 광고 문구가 너무도 자극적이다.
그리고 최근 행운의 탈리스만을 얻기 전부터 운은 꽤 좋은 편에 속했기에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 번만 당기고 가자.”
슬롯을 한번 당기는데 드는 비용은 10코인.
열 번을 당기더라도 100코인이니, 내게 그리 무리한 금액은 아니었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
.
.
뭔가 벌써 쎄하다.
다섯 번을 당겼는데, 오로지 고블린 가죽만 나왔다.
덕분에 멈출까 싶었지만, 그래도 10번까지만 당겨보기로 했으니, 정한 횟수는 채우기로 했다.
[단검(일반)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물건 다운 물건이 나왔다.
“오오!”
덕분에 기대감에 차오른 나는 감탄하며 계속 슬롯을 당겼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
.
하지만 이번에도 3연속으로 고블린 가죽이 걸렸다.
그럼 그렇지.
“이거 사기네. 오크는커녕 고블린 가죽만 나오잖아.”
이제 남은 마지막 한 번.
별 기대 없이 슬롯을 당기는데.
[개 목걸이(고급)를 획득했습니다.]
뭔가 특이한 게 나왔다.
나는 고급등급 아이템의 등장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개 목걸이 / 고급]
-개 또는 늑대류의 몬스터 한 마리를 길들일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등급의 몬스터를 길들이려 할 경우, 아이템이 파괴될 수 있다.
꽤나 흥미로운 아이템이다.
이것을 얻자마자 가장 먼저 그랑 다이어 울프가 떠올랐다.
“집 지키는 개 얻었네.”
그랑 다이어 울프는 인간 분쇄기란 별명이 있을 만큼,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초반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개목걸이를 챙겼다.
쓸만한 아이템이 나오자 슬롯머신이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정한 10회를 넘겨 20회, 30회 슬롯을 당겼고···.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가죽만 잔뜩 얻었다.
-쾅!
나는 슬롯머신을 발로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률이 생각보다 더 쓰레기인 것 같다.
“다시 오나 봐라!”
나는 그대로 안전구역을 벗어났고, 월광도로 돌아가기 전에 농사 관련 문의를 하고자 마을로 돌아갔다.
“뭐야?”
그런데···.
마을로 돌아갔더니,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
혹시 그 녀석들이 다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녀석들이 주민들에게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박살 냈다.
그래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포션을 갖고 있었나? 아니야. 그건 녀석들의 수준으로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내게 음식을 대접해 주었던 김용근이 아는 체를 해왔다.
“어어? 자, 자네. 간 것 아니었어?”
“제안할 것도 있고, 한 번은 둘러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내 물음에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김용근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녀석들의 처우를 두고 마을 사람들끼리 의견이 갈려서 말이야.”
“그래요?”
다행히 그 녀석들이 다시 설친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슈퍼맨도 아니고, 그 부상에서 부활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김용근과 함께 소란의 중심지로 다가갔다.
그러자 내가 제압한 9명이 뒤로 팔이 묶인 채 무릎이 꿇려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새끼들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 그런데 뭐? 용서해 주자고?”
“아니, 용서를 해주자는 게 아니라, 그래도 살인은 안 된다는 거지.”
“그게 그거지! 이 좁은 섬에서 이놈들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두고두고 얼굴 보고 살라는 뜻이잖아! 내 어미 죽인 놈들이랑!”
“끙···. 김씨 일단 진정하고.”
“진정은 무슨 진정! 박씨랑 다른 사람들도 모두 법이 걱정돼서 이러는 거 아냐? 그럼 날 내버려 둬! 칼춤은 나 혼자 출 테니까!”
김용근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뒤탈 없이 죽여야 한다’는 쪽과 ‘그래도 살인은 안 된다’는 쪽으로.
그런데 누가 봐도 분위기는 죽여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까?”
“김씨 어머니가 천식이 있으셨거든. 그런데 저놈들이 재미로 호흡기를 빼앗아갔어.”
“이런···.”
“그런데 김씨 어머니뿐만 아니야. 저기서 벼르고 있는 조씨의 부인과 최씨의 동생도 녀석들의 괴롭힘에 변을 당했으니까.”
결국, 죽일 놈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저런 쓰레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건 나라의 법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붕괴하고 ‘법치’가 힘을 잃은 지금, 가족을 빼앗긴 사람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엔 ‘비 살인파’의 원론적인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잘들 생각해! 이 자식들 살려 두고, 마음 편히 잘 수나 있을 것 같아?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들하고 같이 살 수 있겠냐고!”
결과는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끝내 대다수 주민들이 심판파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녀석들은 처우가 결정되었다.
복수심에 이를 갈던 김씨와 조씨, 최씨에게 녀석들은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난 살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저들을 비난할 수가 없어. 심정이 이해가 되거든. 아마 나도 아들을 잃었다면 저 틈에 있었겠지.”
김용근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그리 말했다.
나도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기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변했구만.”
“그렇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때로는 타인을 해쳐야 하는 세상이 되었어.”
“맞습니다.”
사고가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이들은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변해버린 세상의 진리를 빨리 깨달았으니까.
“혹시라도 죄책감은 느끼지 말게나. 이건 우리 마을의 뜻이니까.”
김용근은 내 짐을 덜어 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봐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아서···.
오히려 지금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감옥에서 5년만 보내면 멀쩡히 사회에 복귀할 수 있던 기존의 ‘법’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안할 게 있다고 했지?”
김용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안전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지금은 말할 분위기가 아니네요.”
“······. 그래 주겠나? 안 그래도 다들 흥분해서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 뒤에 찾아뵙죠.”
*
몬스터를 너무 많이 잡았을까?
아니면 이것도 시스템의 영향일까?
가의도의 주민들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스스로의 상태가 이상하단 사실을 깨달은 건 월광도 안전구역에 돌아온 직후였다.
“뭐지? 나 사이코패스였나?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왜 동요가 없지?”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윌리아에게 힐을 부탁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내게 힐을 사용했고, 그러자 스트레스와 피곤함까지 모조리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요?”
“성장하신 거죠.”
아무래도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윌리아는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능력치가 향상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력치요?”
“마력이란 능력치는 단순하게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에너지만 늘려 주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의 정신력도 강화시켜 주는 거죠.”
이어진 그녀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덩달아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 마력이 계속 높아지면 인간의 감정도 메말라버리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개성까지 지워버릴 만큼 막돼먹은 시스템이 아니니까요. 정신력이 강화되면 위급 상황에서의 동요가 적어지고, 냉정함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될 뿐입니다. 흔한 말로 ‘강철 멘탈’이라고 하죠.”
“그럼 다행이네요.”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윌리아가 갑자기 뒤로 돌아와 어깨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의외의 서비스에 나는 깜짝 놀랐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엔 충분히 놀라신 상태입니다.”
“그런가요?”
“네, 그러니 잠시 이대로 계세요.”
주물주물.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손길로 어깨를 주무르는데, 꽤나 시원했다.
윌리아는 NPC고 우리 인간과 다를지 모르지만, 보면 볼수록 내 이상형에 가깝다.
‘천사구만···.’
그렇게 약 10분에 걸친 마사지가 끝나고, 내가 교대로 해주냐고 묻자 그녀는 거절했다.
혹시 내 표정이 음흉했을까?
“아, 맞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물건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줬다.
“가의도 기념품입니다.”
“뭔가요?”
그건 바로 무인도에선 절대 구할 수가 없는 물건.
바로 콜라였다.
인벤토리가 온도 유지도 되는지 처음 알았다.
내가 건넨 콜라는 매우 시원했다.
“!!!!!!!”
곧이어 콜라의 맛을 본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였다.
처음 보는 모습에 나는 웃음을 흘렸고, 그녀는 콜라가 입에 맞는지 계속 홀짝였다.
이어서 윌리아와의 호감도가 5%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맛있어요!”
“하하,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볼일은 끝났다.
슬슬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야겠다.
내가 그대로 신전을 나서려 하자, 윌리아가 나를 붙잡았다.
“백호님.”
“네?”
“이제 바쁜 일은 모두 끝나신 거죠?”
“그렇죠.”
“혹시 뭔가 잊으신 거 없으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잊은 거?
그에 윌리아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NPC 윌리아로부터 퀘스트 요청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아!”
잊고 있던 게 뭔지 떠올랐다.
레벨 20이 되면 얻을 수 있다던 그녀의 퀘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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