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2)
몬스터를 처치하면 시체가 분해되듯 푸른빛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고난을 이겨낸 표시라 그런 건지, 몬스터 사망 이펙트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몇 안 되게 마음에 드는 풍경 중 하나이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려보니, 아비규환에 빠져 있던 가의도가 침묵에 물들어 있었다.
더불어 마을 곳곳에서 푸른빛 가루가 눈꽃처럼 흩날리니, 여기가 내가 알고 있던 가의도가 맞나 헷갈릴 만큼 몽환적이었다.
‘아니, 몽환적인 게 아니라 단순히 숨이 차서 시야가 흐린 걸지도.’
죽인 오크가 오십이 넘는다.
그것도 고작 몇 분이 되지 않아서.
‘나중에 가선 오크 녀석들도 협력해서 힘들었지.’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머리 위에 얹혀져 있던 실루엣 고글을 내려 눈 위에 씌웠다.
실루엣 고글은 인간이나 NPC는 흰색으로 표시하지만, 몬스터는 붉은색으로 표시된다.
때문에 숨어 있는 몬스터 찾기에도 최적의 아이템이었다.
“고, 고생 많았네. 이제 좀 쉬는 게 어떻겠나?”
이런 내 모습에 몇몇 마을주민들이 슬금슬금 다가왔지만, 멍멍이가 나타나 스윽 내 앞을 가로막아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주민들은 몬스터가 눈에 띄지 않으니 사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아니다.
‘마을 근처에 오크 구역은 따로 없었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오크의 존재가 계속 걸렸기 때문이다.
‘어?’
그러다가 슬라임 스폰 지역 근처에서 유독 붉은 점 하나가 실루엣 고글에 포착되었다.
“멍멍아!”
나는 바로 멍멍이의 등에 올라탔고, 이런 내 부름에 녀석은 담벼락이건 건물의 지붕이건 모조리 밟고 뛰며 내가 지정한 장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멍멍이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나는 인벤토리에서 하급 회복 물약을 꺼내 마셨다.
딱히 어딘가 다친 곳은 없지만, 지친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하고.
“미안, 밟고 뛸게.”
-컹!
거칠게 달려나가던 멍멍이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 가의도가 발 아래 펼쳐진다.
곧이어 찾고 있던 표적을 발견한 나는 바로 마력탄을 날렸다.
-퉁! 퉁!
[큭!]
급하게 날린 마력탄 두 발 중 한발이 도망치려던 표적의 다리에 명중했다.
나는 그대로 지면에 슈퍼히어로 랜딩을 선보이며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도약 스킬에는 착지 보정이 포함되어 있기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충격이 크지 않았다.
-턱!
그리고 마주한 몬스터는 대략 2미터에 달하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회색 피부의 야성적인 남성이었다.
인간과 흡사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피부색보다 더욱 눈에 띄는 이질적인 특징이 있었으니.
녀석의 머리 위로 길게 뿔이 돋아 있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강해 보이는 외형이지만, 나는 쫄지 않고 검을 앞세우며 성큼성큼 의문의 몬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꾸익!
그때.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오크들이 기습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착지 과정에서 실루엣 고글로 매복을 알아챘기에 동요 없이 녀석들을 해치웠다.
[하프 오우거 제르카 / 레벨: 30]
곧이어 탐색 스킬이 정체불명 몬스터의 정보를 표기해줬다.
[너, 너 대체 뭐지?]
하프 오우거란 처음 보는 명칭도 그렇지만, 녀석이 대뜸 내게 말을 걸어 오는 것을 본 순간 이게 말로만 ‘엘더 몬스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런 섬에 어째서 엘더 몬스터가?’
엘더 몬스터는 사람 또는 몬스터가 많은 지역에서 등장한다고 들었다.
물론, 외딴 섬에 등장할 가능성이 0%가 아님을 윌리아가 밝히긴 했지만, 극히 낮은 확률인데, 그걸 뚫고 등장한 거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 해야 할지.’
만약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가의도 마을은 전멸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예정보다 빠르게 가의도에 도착하는 바람에 재앙이 비껴갔다.
이건 마치 가의도의 악운에 나란 행운이 더해져 상충된 결과를 만들어낸 느낌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선 썩 나쁘지 않은 게···.
‘이렇게 상대하기 좋은 레벨의 엘더 몬스터를 마주하다니.’
녀석의 존재가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뭐긴, 네놈이 공격한 마을 사람들의 일행이지.”
윌리아가 알려준 엘더 몬스터의 초기 레벨은 20~50 사이.
게다가 엘더 몬스터끼린 서로를 흡수하여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흡수할 다른 엘더 몬스터가 없고, 레벨도 어중간한 이 녀석은 그냥 보물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젠장, 왜 너 같은 놈이 이런 오지에 있는 거냐!]
“너희 몬스터들 때문에 갇혔다. 씨발아.”
나는 검을 들며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랬더니 하프 오우거 제르카는 예상치 못한 말을 해왔다.
[잠깐. 일단 대화로 풀어 보자.]
설마 몬스터에게 대화를 요청받다니.
엘더 몬스터의 지능이 높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황당한 전개였다.
그런데 녀석은 왜 싸우기 전부터 이렇게 설설 기는 걸까?
혹시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허, 대화?”
[그, 그래.]
“공격당한 건 이쪽인데, 뭔 대화?”
굳이 몬스터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 따윈 없다.
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삼가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제르카는 설득에 실패하자 악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곧게 뻗은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인벤토리 추가 확정.’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을 죽이면 인벤토리를 얻을 수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덤으로 녀석이 쥐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장검도 토해 주면 좋겠다.
-챙! 채채챙!
나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제르카는 야성적으로 생긴 것과 달리 정석에 가까운 검술을 펼쳤는데, 빠르고 파괴적이지만, 정석적인 공격인 만큼 오히려 상대하기 쉬웠다.
[촐랑대긴!]
같은 레벨의 보스 몬스터 칼리아가 변칙적인 전투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면 제르카는 정직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이었다.
-훙!
그리고 나름 실력도 있어서 중간중간 무시하기 힘든 일격을 날려왔다.
녀석의 공격은 눈앞의 모든 것을 일도양단하겠단 기세를 품고 있다.
빈틈을 파고든 그 일격에 검기까지 깃들자 나 역시 검기를 일으켜 대응했다.
-깡!
물론, 힘 대결을 할 생각은 없다.
검기는 단순히 검을 보호하기 위함이고, 나는 제르카의 공격을 받을 때 손목과 어깨의 힘을 빼서 흘렸다.
덕분에 녀석의 공격은 맥없이 나를 스쳐 땅에 박혔다.
동시에 힘을 빼고 있던 손목과 어깨에 한 번에 힘을 주자, 내 검이 발사되듯 솟구치며 제르카의 목을 노렸다.
-핏!
[큭!]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공격을 피했지만, 녀석의 뺨이 길게 베였다.
또한, 제르카가 뒤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마력탄에 당했던 다리의 상처가 움직임을 방해하니···.
-휙! 휙!
이를 예측해둔 나는 자연스레 연격을 쏟아내며 제르카를 압박했다.
-쾅!
물론, 내가 칼질을 두 번 할 동안 녀석이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비록 연격은 막혔으나, 나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어.”
[뭣!?]
-콰작!
제르카의 온 신경이 내게 집중된 순간, 타이밍에 맞춰 멍멍이가 공격을 가했다.
멍멍이의 단검과도 같은 이빨이 녀석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놔라!]
-컹!
그런데 가죽이 어찌나 단단한지, 생각보다 깊게 박히지 않은 모양이다.
‘이거면 충분해.’
조금 아쉽지만, 1:1 상황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녀석이 추가로 부상을 당했다.
이어질 전투의 향방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다! 지금부터다!]
비록 제르카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마지막 혼을 불태우듯 열을 올렸지만···.
“어쩔.”
나는 녀석의 열의에 어울리지 않고, 거리를 벌리며 약 올리듯 마력탄을 난사했다.
[이익! 비겁한!]
유리하다고 방심하지 않고 더욱 상대를 약하게 만들기.
목숨이 걸린 싸움이니 비겁하건 뭐건 이기면 그만이다.
-챙! 채채채챙!
마력탄으로 무릎과 복부에 추가 부상을 입힌 나는 그제야 녀석이 바라던 대로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이어진 건 난타에 가까운 자잘한 속검으로, 제르카에게 검을 휘두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그만.]
결국, 녀석은 오래 버텨내질 못하고 기브업을 선언했다.
그런데 우린 스포츠를 하는 게 아닌지라, 나는 듣지 않고 더욱 몰아붙여 제르카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갔다.
“흐읍, 후···.”
들고 있던 검조차 놓치고, 농락이란 단어가 순해 보일 만큼 일방적으로 당한 녀석은 내 앞에 바짝 엎드렸다.
[살려다오. 살려만 주면 뭐든 하지.]
이런 거 보면 높은 지능이란 건 성가신 것 같다.
미련 없이 죽어 주면 좋겠는데, 제 목숨 귀한 줄 아니까.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공격한 건 녀석인데, 이래선 마치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다.
당연하지만 살려줄 생각 따윈 없다.
아이템으로 길들어진 멍멍이와 달리, 말만 듣고 녀석을 받아들이기엔 신뢰가 부족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
하지만 죽일 땐 죽이더라도, 두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다.
“뭐 쓸만한 정보를 주면 살려 줄 수도 있고.”
[정보라면?]
“엘더 몬스터의 약점이라든가, 앞으로 활동 계획이라든가.”
[무슨 말인지···.]
첫 번째.
엘더 몬스터에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냐는 것.
그런데 녀석이 아는 거라곤 자신의 능력과 싸우는 방법뿐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검, 좋아 보인다?”
[필요한가?]
확인하고 싶은 것 두 번째.
그건 바로 몬스터에게 장비를 강탈할 수 있는가다.
몬스터가 죽으면 소지한 아이템을 랜덤으로 떨어뜨리지만, 강탈이 가능하다면 원하는 아이템을 100%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몬스터와의 거래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
역시 몬스터는 NPC와 달리 이래저래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
‘쓸모없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핏!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엘더 몬스터 제르카의 목이 툭 하고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엘더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가의도를 지켜낸 것이다.
***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 대대적인 생존 캠프 구성이 시작되자, 계룡대 역시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젠 너의 일, 나의 일 구분 없이 명령이 내려지는지라 얼떨결에 보급임무를 지원하게 된 서인호 대령은 짙어진 다크서클을 비비며 앓는 소리를 냈다.
물론, 밖에서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배부른 입장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힘든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30분만 쉬지.”
“넵!”
결국, 서인호 대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휴식을 택했고, 함께 임무를 보던 부하들이 기쁜 듯 일제히 답했다.
서인호 대령은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부하들이 편히 쉬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딱 30분만 눈을 붙이려 하는데···.
[한국인 서**님 께서 최초로 엘더 몬스터를 토벌했습니다.]
[이 위대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 됩니다.]
[한국인 서**님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눈앞에 어딘가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걸 본 서인호 대령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또?”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해당 인물이 ‘서 씨’란 점을 제외하면 그의 아들이란 단서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
서인호 대령은 메시지 속 인물이 자신의 아들이라 확신했다.
“이 녀석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야?”
다른 사람들은 죽으네 사네, 혼란에 빠져 있는데 그의 아들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
[엘더 몬스터 최초 토벌. 위대한 업적이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엘더 몬스터 토벌,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엘더 몬스터 최초 토벌,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던전을 최초 클리어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
얼떨결에 한국인 서**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말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어진 메시지로 눈을 돌렸고.
[하프 오우거 제르카를 토벌하여 경험치 15,500을 획득했습니다.]
[하프 오우거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10,0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하프 오우거 제르카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4,55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오크 테이밍 목걸이 1개를 획득했습니다.
-인벤토리 3칸을 획득했습니다.
-제르카의 검을 획득했습니다.
[하프 오우거의 최초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1,00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상급 회복 물약 3개를 획득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문구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오, 그 좋아 보이던 검 나왔네?’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검을 집어 들었고, 이내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 설명에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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