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행 단서 (2)
현재 내 능력치는 이렇다.
-레벨: 33
-능력치
근력: 근력: 17(+2) 순발력: 18(+2) 마력: 12(+8)
잔여 능력치 포인트: 0
아이템의 옵션을 더해 근력이 19, 순발력과 마력이 20이다.
레벨업을 통해 벌리는 능력치 대부분은 근력과 순발력에 투자하고, 마력은 아이템의 보조를 받는 식인데.
기본적으로 마력보다 근력과 순발력을 우선으로 여기다 보니 이렇게 됐다.
‘물론, 마력이 높으면 좋다.’
한방 공격, 뛰어난 이동기 등 더 많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레벨업을 통해 마력 수치를 하나 높인다고 해봐야 전투력에 큰 변화는 없고.
나는 전투 지속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게 낫다고 판단했다.
결과, 높은 신체 능력을 이용해 기본 검술로 적과 싸우다가, 중요한 순간에 큰 한 방을 넣는 방식이 주요 전투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차선을 택한 결과야. 레벨업을 해봤자 주는 포인트가 겨우 1이어서 모든 능력치를 고루 올릴 수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마력 수치를 단번에 급등시킬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이 말은 즉, 어쩔 수 없이 택한 차선책이 최선책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맙소사.”
나는 정글 사원 한복판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천년삼을 바라보며 건들면 시들라, 불면 꺾일라, 조심조심 아기 다루듯 어루만졌다.
‘천년삼이라니,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영약이잖아!’
혹시 윌리아가 내게 북부행을 추천한 게 이것 때문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윌리아의 존재가 등에 날개를 달고 머리 위에 링을 얻은 천사의 모습이 되었다.
‘마력이 얼마나 오를까?’
보통 무협에서 영약이라 하면 내력이 급증진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때문에 기대가 될 수밖에.
물론 마력이 한 번에 100씩 오르는 건 말도 안 되지만, 30 정도, 아니 적어도 10만 올라도 나는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건 거저 오르는 능력치 아닌가.
그래서 나는 조심조심 땅을 파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잔뿌리가 상해서 천년삼의 약효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꾸익?
그런데, 이런 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미친 돼지, 아니 뚱이가 내 옆에 쪼그려 앉더니, 아까 실풀과 회복초를 뜯을 때처럼 천년삼을 확 잡아 뜯어 버렸다.
“야, 야이 미친놈아!”
순간 이 녀석이 뭐하나 지켜보던 나는 상상치도 못한 전개에 기겁했다.
덕분에 쪼그려 앉아 있던 상태에서 뚱이에게 개구리 펀치를 날렸고, 그로 인해 맥아리 없이 뽑힌 천년삼이 허공을 풀풀 날다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꾸익!
“내 영약!”
나는 붕 떠올랐다가 털썩 쓰러진 뚱이를 뒤로 하고, 급히 천년삼에게 달려가 상태를 봤다.
[천년삼 / 영약 / 희귀]
-섭취 시 일정량의 마력이 영구적으로 향상된다.
하늘이 도왔을까?
아니면 뚱이의 풀 뜯는 스킬이 극에 달했을까?
다행히 천년삼은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뒤늦게 뚱이에게 미안해졌다.
녀석이 미친 짓을 한 거긴 하지만, 한 줌 되지 않는 뇌로 나름 날 도우려 한 행동이었을 텐데.
나는 코피를 쏟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사과의 의미로 하급 포션을 발라주었다.
‘이걸 어쩐다? 지금 여기서 먹긴 조금 그렇지?’
보통 무협지 보면 영약 먹을 때 엄청 고생하던데, 이것도 그럴까?
천년삼과 눈싸움을 벌이던 나는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안전구역에 가서 섭취하기로 했다.
윌리아라면 영약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섭취 중 이상이 생기면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마침 예상했던 것보다 월광도 북부에 깊게 들어오기도 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다.’
월광도 북부 탐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했다.
어쩌면 나를 육지에 다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보물이.
*
어제 디딤판 스킬을 얻었을 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도약 스킬에 디딤판 스킬을 더하면, 가의도에서 육지까지 허공을 달려 건널 수 있지 않을까라고···.
그래서 나는 시험해 보았다.
공중에 디딤판을 만들어 도약 스킬로 껑충껑충 뛰어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력 20으로 약 450m를 이동할 수 있었다.
대충 도약 스킬 한 번에 45미터를 건넌 셈인데, 이것만 해도 높은 신체 능력과 도약 스킬 효과, 뛰어난 스킬 숙련도가 더해져 만들어낸 최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450m 이동으로 육지행은 턱도 없지.’
가의도에서 육지까지의 거리는 3km.
그런데 중간에 휴식 거점으로 쓸 암초섬이 있어서, 1.5km만 한 번에 건널 수만 있으면, 그 뒤로 암초섬이 수백 미터 간격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육지에 다다를 수 있다.
‘1.5km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이야.’
바다엔 높은 레벨을 가진 거대 해양 몬스터가 득실댄다.
수영으로 건널 수 없으니, 결국 도약과 디딤판 조합을 떠올렸던 건데.
때마침 스킬의 사용횟수를 늘려줄 천년삼을 얻은 거다.
덕분에 어쩌면 육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적어도 윌리아에게 천년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나는 미간을 좁히며 윌리아에게 재차 물었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죠?”
“천년삼이면 섭취 시 마력이 10 정도는 상승할 겁니다.”
마력 10.
지금의 마력이 도합 20이니, 섭취할 경우 30이 된다.
거기에 윌리아의 블레스(능력치 20% 상승)가 더해지면 36이 되고.
아쉽게도 이건 육지를 건너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분명 마력이 10이라도 거저 오르면 만세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정말 10일 줄은 몰랐다.
내가 생각하던 것 중 최소치였는데···.
“와, 와아···. 그렇군요.”
“억지로 좋아하실 필요 없으세요. 티 나니까요.”
윌리아의 대답에 나는 쓰게 웃어야 했다.
“그렇게 육지에 가고 싶으세요?”
“그야 그렇죠. 부모님이 모두 육지에 계시니까요.”
육지에 가더라도 내 주요 거점은 월광도가 될 것이다.
월광도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나만의 땅이니까.
하지만 육지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냐, 아니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심리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그리고 왜일까?’
초반에 육지의 웨이포인트를 찍어 놓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겨우 보인 육지행의 가능성이 사그라드니 실망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모습에 윌리아는 자신의 일처럼 함께 고민해주었다.
“그럼 일단 천년삼을 섭취하고 최대한 마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템을 수집해놔야겠네요.”
아마도 그게 최선일 거다.
‘꾸준히 레벨을 올리고, 필요 아이템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긴 하겠지. 단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시간의 흐름에 맡겨야 하는 걸까?
“마력 회복 물약이라도 있으면 좀 수월할 텐데, 아쉽네요.”
그런데 그때였다.
윌리아가 생각지 못한 아이템의 이름을 읊은 것이.
“마력 회복 물약이요?”
“네, 마력을 회복시켜 주는 소모템입니다.”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러고 보니, 왜 그게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지?
이 게임 같은 설정을 가진 세상에서.
만약 마력을 회복시킬 수단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하늘을 달려서 육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칠게 윌리아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획득방법은요?”
“마법이나 주술형 몬스터를 처치하면 되는데, 아쉽게도 월광도엔 해당 몬스터들이 없어서 습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서 마주한 몬스터는 모조리 물리 전투형뿐이다.
심지어 서큐버스도 무기를 휘둘러 오는 곳이니···.
“어쨌든 그런 아이템이 존재하긴 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아이템 등급은요?”
“소비 아이템 등급으론 상급, 일반 아이템 등급으론 ‘특수’급입니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가의도에 자리한 도박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의도의 도박장 이야기를 윌리아에게 했다.
“도박장의 아이템 뽑기 슬롯이요?”
“네, 거기서 마력 회복 물약을 뽑을 수 있을까요?”
현재 윌리아와 나와의 친밀도는 73%.
내가 시도하려는 일이 가능하다 아니다 정돈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뽑을 수야 있죠. 그런데 돈이 많이 들 텐데···.”
그거면 됐다.
지금 중요한 건 ‘가능하다’는 대답이었으니.
나는 씩 웃으며 천년삼을 입에 쑤셔 넣었다.
“제가 남는 게 코인뿐이거든요.”
그리고 도박장에서 예상치 못한 득템을 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닐까?
[천년삼의 많은 기운이 흡수됩니다.]
[안전한 장소에 누워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
가의도의 몇 안 되는 젊은 청년 ‘김한성’은 서백호에게 식사를 대접하여 친해진 김용근의 아들이다.
그는 가의도 청년단 소속으로 서백호에게 싸우는 법을 배우며 레벨을 올리는 중이었는데, 최근 두 가지 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니, 이걸 왜 못하시지?”
“죄, 죄송합니다.”
“몬스터가 공격을 해오면 끝까지 보세요. 그리고 녀석의 공격에 맞춰 피하거나 베고. 아니면 막은 후에 베면 되는데. 왜 계속 피하고, 막기만 하다가 밀리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첫 번째 원인은 쉽게 따라가기 힘든 서백호의 교육 시간이었다.
서백호는 오랫동안 검을 익힌 게 아닌 이상, 단기간에 실력을 쌓기 위해선 실전밖에 없다며 가의도 청년단을 고블린 스폰 지역에 끌고 가서 몬스터와 싸우게 했다.
물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도와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쏟아지는 훈계는 꽤나 부담스러웠다.
“고블린은 한성 씨보다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하고, 스피드도 느려요. 그런데 돌칼 하나 들었다고 쫄기엔 한성 씨의 무장이 아깝지 않나요?”
고블린은 체격과 힘이 떨어질지언정 재빠르다.
하지만 그 재빠름마저 인간의 기본 능력치에 비하면 느린 게 맞다.
또한 고블린은 헐벗은 몸에 30센치 크기의 돌칼 하나를 쥔 게 전부지만, 김한성은 상점에서 구매한 철판으로 만든 그럴싸한 장검에 방패까지 쥐고 있었다.
결코, 고블린 따위에게 밀려선 안 되는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어디 실전이 이론만으로 되겠는가.
악에 찬 포효와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고블린을 마주할 때면 절로 몸이 굳었다.
“또 굳으시네! 허리도 펴시고! 똑바로 적을 보세요!”
그리고 더욱 씁쓸한 사실은, 서백호에게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는 가의도 청년단 중에서도 그의 성장 속도가 가장 더디다는 것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서백호에게 종종 칭찬도 들으면서 제법 안정적으로 고블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때문에 서백호의 교육 시간이 김한성에겐 큰 압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휴우···. 수고하셨습니다!”
서백호의 교육 시간에 이은 두 번째 스트레스.
그건 바로 교육이 끝나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장의 딸 김민희의 존재였다.
“야야, 한성아.”
“왜?”
그녀는 가의도에서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였다.
부모님끼리도 친해서 어릴 때부터 봐온 소꿉친구라 할 수 있다.
비록 학창시절을 각자 다른 지역에서 보내긴 했지만, 오랜만에 봐도 데면데면 한 것 없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구나 김민희는 외모도 귀여워서 김한성이 남몰래 마음속에 품은 여성이기도 했다.
“선생님 언제봐도 멋지지 않냐? 햐···. 육지에 애인 있으실까?”
그런데 그런 김민희가, 서백호에게 빠졌다.
계기는 그거다.
가의도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을 때, 서백호가 단독으로 모든 몬스터를 쓸어 버리며 마을을 구해줬던 사건.
당시 김민희는 트롤에게 붙잡혀 잡아먹힐 상황이었고, 그때 서백호가 나타나 트롤을 일격에 처치하며 구해주었다.
누가 봐도 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김민희가 제대로 꽂히고 만 것이다.
“있지 않을까? 저렇게 뛰어나신 분인데.”
“그러려나?”
“이 미친 시대에선 강한 게 스펙이잖아. 모르긴 몰라도 따르는 사람이 꽤 될걸?”
“하긴, 그럴 것 같긴 해.”
두 사람을 비롯해 가의도 사람들은 서백호가 월광도에 살고 있단 사실을 모른다.
그저 육지 외곽지역에서 웨이포인트를 타고 가의도를 오간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백호가 육지에 제법 작지 않은 세력을 갖고 있을 거라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오늘도 거기에 가셨을까?”
“그렇지 않을까? 왜, 또 구경 가게?”
“쳐다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너 때문에 선생님이 부담스러워서 가의도에 안 오실까 봐 그러지.”
“지랄.”
두 사람은 언덕길을 따라 안전구역으로 향했다.
최근 서백호가 안전구역 내의 도박장에서 계속 슬롯을 돌리고 있단 걸 모르는 주민이 없다.
심지어 한번 돌리는데 10코인이나 하는 슬롯을 수백 번, 혹은 천 번을 넘겼을지 모를 만큼 돌려대서 그 재력에 모두가 기겁한 상태다.
처음엔 서백호가 한 방을 노리고 단순히 도박을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엔 계속 ‘마력 회복 물약’이란 말을 외치며 슬롯을 돌렸기에 그가 해당 아이템을 얻기 위해 돈을 투자하고 있단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저기 계신다. 오늘도 슬롯 돌리고 계시네.”
“대체 마력 회복 물약이 뭐길래 저 많은 코인을 쏟아붓는 걸까?”
그렇게 두 사람은 도박장 안에 들어가 은근슬쩍 서백호의 모습을 구경했다.
“오늘도 허탕이실까?”
“글쎄.”
도박하는 모습이 뭐가 좋다고 김민희는 사랑에 빠진 여성의 모습으로 서백호를 바라보며 연신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던 그때.
“떴다아아아아!!!”
돌연 서백호가 도박장이 떠나가라 ‘떴다’를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에 김민희는 슬그머니 다가가 원하던 걸 얻었냐며 아는 척을 했고.
서백호는 그런 김민희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김민희, 저거 입 벌어진 거 보소?”
김한성은 한껏 행복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나마 신기한 건 서백호에게 질투의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남자가 봐도 멋지고, 워낙 잘난 사람이라서 그런지, 질투보단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김민희가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김한성 씨.”
“네! 선생님!”
한창 흥분에 빠져 있던 서백호가 헛기침을 하며 김한성에게 다가왔다.
“내일 하고 모레, 이틀 정도 훈련을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뜸 휴강을 선언해 버리는 그의 모습에 김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가야 할 곳이 생겨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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