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조 (2) >
*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역시 지혜로운 선조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는 것 같다.
“백호님. 이거.”
“······.”
나는 윌리아가 내민 아이템을 경직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가이더의 전투복 / 하의 / 등급: 특수]
-인큐버스 가이더의 전투복으로 아라크네의 실로 만들어져 매우 뛰어난 통기성과 높은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상급 오토 쉴드가 내장되어, 2회 해당 부위를 보호해준다.
-순발력+4
그건 보스룸을 목전에 둔 2층 네임드를 잡고 나온 전투복이다.
“와, 와아···. 특수등급 장비다.”
“역시 검정색보단 빨간색이 예쁘네요.”
심지어 이 보상이 두 번째인데, 중급 인큐버스를 사냥하고 최초 토벌 보상으로 최고급 등급의 전투복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건 옵션이 구려서 필요 없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쓸데없이 옵션도 좋다.
나는 윌리아가 건네준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를 집어 들었다.
네임드 서큐버스의 전투복을 보면 예상할 수 있듯, 가이더의 전투복은 정열적인 붉은색의 삼각팬티였다.
“뭐, 팬티라 생각하고 입으면 되겠죠. 겉에 옵션 없는 일반 바지 입으면 되니까.”
참고로 같은 부위의 장비는 옵션이 중복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옷을 겹쳐서 못 입는 건 아니다.
이 경우 빨간 팬티를 안에 입고 그 위에 다른 옷을 입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다만 다른 사람이 입던 팬티를 입는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뿐이지.
“예? 겉으로 안 입고요?”
“윌리아님도 입으면 입을게요.”
윌리아가 장난스레 아쉬워하자, 나는 딜을 걸었다.
“음, 봐서요?”
나름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건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하의실종의 빨간팬티 입은 남성과 수영복 차림으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을.
광안리도 아니고, 몬스터가 득실대는 재앙 속 세상을 말이다.
게임으로 치면 고인물이라 표현하겠지만 현실에선···.
그냥 변태들 아닐까?
‘뭐, 우리만 즐거우면 그만이지만.’
그나마 윌리아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라도 있지, 아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나는 관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다.
“그럼 보스전 진행할까요?”
“네!”
안전텐트에서 새로 구한 전투복을 속에 입고 나온 나는 보스룸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그때.
[해당 던전의 보스룸은 한번 입장하면 클리어 또는 타임아웃까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보스룸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심상치 않은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사람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
솔직히 몽마의 신전은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던전이다.
굳이 따지면, 히든 보스가 나왔던 지하무덤과 비슷하다.
그런데 우린 그때보다 더욱 강해진 상태였으니, 무리 없이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어떡하죠?”
하지만 나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고, 살짝 삐끗하면 그 대가는 영구적인 죽음이었으니 말이다.
[던전 클리어까지 남은 시간: 3시간 25분]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타임어택의 남은 시간을 보았다.
“어쩔 수 없네요. 시간을 더 소진해서 30분만 남겨 놓고 들어가죠.”
“보스룸의 난도가 높으면 타임아웃 때까지 버티는 작전이군요?”
윌리아는 쉽게 내 말을 이해했다.
멋은 없지만, 실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우린 남은 시간 동안 리젠된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를 계속 사냥했다.
*
시간이 흐르고, 계획했던 시간에 맞춰서 우린 보스룸에 입장했다.
그리고 우릴 반겨준 보스는···.
[보스 인큐버스 나이트 얀 / 레벨: 40]
긴 흑발을 찰랑거리는 너무도 잘생긴 꽃 청년.
인큐버스 단 한 명이었다.
[내 평화를 깨뜨리는 자, 지옥을 맛보리.]
그에 나는 바로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괜히 쫄았네!”
[뭐지, 이 야만적인 인간은?]
-캉!
녀석과 나의 검이 맞부딪히고, 윌리아와 그녀를 보호하는 멍멍이가 측면으로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력탄.”
이틀 전 안성에서 클리어했던 던전, 저주받은 화장터에서 마력탄 스킬을 획득하고, 윌리아가 그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때 던전 보상이 너무 짜서 짜증 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력탄을 하나 더 얻은 것 자체가 우리의 전술을 다양화시켜주는 것이었다.
전혀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단 뜻.
-핏!
[이런!]
마력탄은 빠르다.
지금의 나와 눈앞의 보스 수준이라면 보고 피하는 것이 가능한 속도긴 하지만.
검과 검이 충돌하는 치열한 전투 속에 측면에서 날아든 마력탄을 피하는 건 묘기에 가까운 회피 능력을 필요로 했다.
녀석은 결국 허벅지에 마력탄을 맞고 말았다.
[큭!]
물론, 레벨이 40이나 되는 몬스터인 만큼, 일반 마력탄으로 큰 피해를 주긴 힘들다.
그러나 움직임을 굳게 하긴 충분했고, 찰나의 실수가 승패를 나누는 근접전투에서 그건 치명적인 허점이었다.
“잘 가시게!”
나는 검기에 거력참 스킬을 곁들인 극강의 일격을 넣었다.
-콰아앙!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보스룸 전체가 작게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표정을 굳혀야 했다.
“이게 뭔···.”
검이 적을 가르는 느낌이 없고, 맨땅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인큐버스 나이트 얀의 모습이 180도 달라졌다.
[보스 서큐버스 메이지 메리 / 레벨: 40]
이어서 내가 잘못 본 게 아님을 증명하듯, 방금까지 인큐버스였던 놈이 서큐버스로 변해 있었다.
더구나 녀석은 내게서 15m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공간이동이라니.’
공간이동 스킬은 처음 봤다.
그런데 진짜 귀신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다.
“뭐야, 한 몸에 두 사람?”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이런 보스는 처음이다.
성별과 직업이 체인지되는 몬스터라니.
마법사로 직업이 바뀐 보스는 갑자기 윌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멍멍이가 윌리아의 로브 자락을 물어서 잡아당겼다.
-쿵!
그러자 윌리아가 위치했던 뒤쪽의 벽에 주먹 크기의 구멍이 파였다.
마력탄과 차원이 다른 위력의 원거리 스킬을 보유하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큭, 이놈!]
“어딜 한눈팔아?”
하지만 나를 잊으면 안 된다.
원거리 공격 스킬은 이쪽도 있거든.
마력탄과 윈드 스킬을 섞은 ‘윈드 샷’을 날렸다.
윈드 샷의 특징은 마력탄보다 더 강한데다가 적에게 적중하면 폭발하듯 바람의 칼날이 흩날린다는 거다.
-뚝뚝.
덕분에 서큐버스 메이지 메리는 팔과 뺨, 허벅지에 자상을 입었다.
놀라긴 했지만, 우리도 그동안의 전투 경험이 적지 않았다.
[젠장!]
결국, 녀석은 다시 남성형인 인큐버스 얀으로 돌아왔다.
성별이 바뀌자 앞서 입었던 부상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귀찮은 녀석이네.”
나는 이번에도 검을 앞세워 보스에게 달려들었고, 화가 단단히 난 듯한 윌리아도 집요하게 마력탄을 날렸다.
‘디딤판.’
거기에 내가 내가 디딤판으로 장애물을 만들어 움직임을 방해하니, 보스는 싸우는 게 영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팟!
-팟!
이후부터 녀석의 변신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뒤로 공간이동 한 후, 곧바로 남성형으로 돌아와 내 등을 향해 검을 날려 오기도 하고.
나의 검을 쳐낸 직후, 다시 여성형으로 변해 윌리아의 측면에 나타나 마법을 난사하기도 했다.
“재밌는 놈이네?”
하지만 녀석은 아무리 분투해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어째서냐!]
“열심히 노력하고 있긴 한데, 그냥 마검사라 생각하고 싸우면 그만이잖아? 그것도 마법하고 검 동시에 못 쓰는 이상한 마검사.”
[뭐?]
“너 컨셉 이상하다고.”
어차피 그의 몸은 하나이고, 동시에 검과 마법을 못 쓰는 존재이니,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처음엔 깜짝 놀랐는데, 나중에 보니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랄까?
-팟!
그래도 확실히 공간이동은 위협적이긴 하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보스가 사라질 때면 나와 윌리아 모두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우린 심플하게 대항하기로 했다.
“윌리아 님. 이제부터 녀석이 공간 이동하면 그냥 쉴드치고 계세요.”
“네!”
이보다 효과적인 선택이 있을까?
윌리아의 앞에 나타나 봤자 방어막이 기다리고 있고, 그렇다고 내 뒤에 나타나기엔 뻔하고.
그렇게 녀석과 성과 없는 밀고 당기기가 이어지길 십수 분.
-푹!
[지독한 놈들.]
끝내 몽마의 신전의 보스는 내 검에 심장이 꿰뚫리고 말았다.
[보스 서큐버스 메이지 메리를 토벌하여 경험치 32,000을 획득했습니다.]
[서큐버스 메이지를 최초 토벌하여 경험치 15,000을 획득했습니다.]
“역시 보상은 1인분만 주네.”
왠지 이럴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녀석이 여성형일 때 해치웠다.
혹시라도 서큐버스 메이지 메리가 사용하던 공간이동 스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보스 서큐버스 메이지 메리의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9,552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상급 회복 물약 2개를 획득했습니다.
-인벤토리 2칸을 획득했습니다.
-스킬북 블링크를 획득했습니다.
[서큐버스 메이지의 최초 토벌 보상이 지급됩니다.]
-2,00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스킬북 워터를 획득했습니다.
[블링크 / 최상급 스킬북 / 액티브]
-50미터 이내의 단거리 공간이동을 한다.
-소모 마력: 3
“나왔구나!”
그리고 이런 내 바람은 뜻대로 이뤄졌다.
처음으로 최상급의 스킬북을 획득한 것이다.
나는 어느 방향일지 모를 조상 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
나와 윌리아는 월광도로 돌아왔다.
블링크는 전략상 내 몫이 되었고, 마법형 스킬인 워터는 윌리아의 것이 되었다.
마침 윌리아에게도 더욱 강한 원거리 스킬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기에 꽤나 안성맞춤인 보상이었다.
-쿠웅!
“오오!”
“와, 위력이 전혀 다른데요?”
워터는 마력탄과 섞어 쓰면 높은 관통력을 지닌 스킬로 변모했는데, 그 위력이 내가 가진 윈드나 파이어보다 강력해 보였다.
이 정도면 보스에게도 충분히 유효타가 될 수 있을 터.
우리의 전투력은 다시 한 번 크게 상승했다.
“블링크!”
공간이동 스킬인 블링크.
공간이동 거리가 조금만 더 길거나 마력소모가 적었으면 장거리 이동에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은 도약으로 하늘을 달리는 편이 더 효율이 좋았다.
-팟!
하지만 블링크는 사용 후 경직 같은 것도 없고, 발동도 매우 빨랐다.
변칙 공격과 기습, 도주에 이만한 옵션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공간이동으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당황하겠지. 나도 엄청 놀랐었으니까.’
마법을 대표하는 영역의 스킬인 만큼, 내가 가진 최고의 비장의 수라 할 수 있다.
“최고네!”
“하하!”
늘 그래왔지만, 오늘도 기분이 좋은 나와 윌리아였다.
이럴 때 김씨 아저씨에게 부탁했던 파티풀이 완성됐다면 더욱 좋을 텐데.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었어?”
“아, 김씨 아저씨. 마침 잘 오셨어요. 제가 순발력 옵션 붙은 팬티 한 장 구해왔습니다.”
“응? 팬티?”
나는 그에게 최고급 등급의 인큐버스 전투복을 건넸다.
오늘 구한 두 장의 팬티 중 옵션이 떨어지는 거지만, 섬생활하는 김씨에겐 충분히 좋을 것이다.
그는 별생각 없이 받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윌리아는 상상하기 싫은 장면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경직됐다.
“짠!”
그리고 섬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을 김씨 아저씨를 위한 선물을 꺼냈다.
“이, 이건?”
그건 목을 딴 돼지였다.
그것도 멧돼지가 아닌 일반 돼지.
“오늘 사냥 갔던 곳 근처에 축사가 있었는지, 돌아다니던 거 우연히 발견해서 잡아왔습니다. 오늘은 삼겹살 파티입니다!”
“와!”
그뿐 아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추가로 선물을 또 꺼냈다.
그건 바로.
“소, 소주까지?”
삼겹살과의 소울푸드.
소주가 함께였다.
그에 김씨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오늘은 정말 파티다.
‘아, 가의도에서 분투하고 있을 뚱이도 데려와야지.’
그래서 파티 전에 빠르게 가이도에 다녀오려는데, 대뜸 김씨가 나를 붙잡고 우물쭈물 말을 걸어왔다.
“배, 백호씨에게 보여 줄 게 있는데.”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어서 그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유물 / 등급: 확인 불가]
-알 수 없는 금속으로 이뤄진 막대기.
-감정 스킬 또는 대장장이 NPC를 통해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본 나는 의문을 표하다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한국인 김**님께서 유물 아이템을 발굴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유물 아이템을 발굴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오늘 낮에 던전에서 활동하던 중 떴던 업적보상의 주인이 김씨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유물의 정보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한 부분에서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대장장이 NPC라니? 그런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