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엘프 (1)
시나리오 관련 내용이 단체 메시지로 떠오른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시나리오 조각에 대해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이게 뭐냐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없었고.
전체 메시지로 공개된 내용은 그것이 끝이었다.
다만 전체 메시지와 별개로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에게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으니···.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끼리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관계는 동맹, 우호, 중립, 적대 4단계가 있으니, 신중하게 설정하실 것을 추천 드립니다.]
바로 ‘관계 설정’이란 기능이었다.
‘무슨 국가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왜 필요해?’
뭔가 힌트 같긴 한데, 이 기능이 굳이 필요한가 싶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능에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는데···.
[2번 조각 보유자가 동맹을 제안했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때마침 강이솔이 동맹을 신청해와 큰 고민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동맹을 배신하여 상대에게 손실을 입힐 경우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그런데 동맹을 맺음에 따라 이런 메시지가 뜨니 썩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페널티가 부여되는지 알려지지 않은 만큼 쉬이 상대를 배신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10번 조각의 소유자가 단체 메시지방에 11번 조각 소유자님을 초대했습니다. 참여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곧이어 새로운 조각의 소유자가 등장해 자신을 소개했다.
[10번 보유자]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과 울산,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도 생존구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냥꾼 10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이름을 뺀 소개.
아무래도 메시지 기능이 익명을 보장한다고 설명하는 만큼 초면에 대뜸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나는 지난 주한미군 때처럼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고 강이솔에게 대응을 맡겼다.
[2번 보유자]
-경상도에 계시는군요? 전 서울에 있습니다. 안 그래도 남부의 상황이 궁금했는데, 잘됐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맨 처음 내겐 직책을 들먹이며 고자세를 보이던 강이솔이지만, 나와 알게 되고 사냥꾼협회까지 만들어지고 나선 상당히 겸손해졌다.
아마 실력 좋은 사냥꾼이라면 언제든 영입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10번 보유자]
-네, 반갑습니다. 경상도 지역은 제법 평온합니다. 처음엔 난리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합심하여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죠.
경상도 쪽에선 수도권 쪽의 상황을, 수도권 쪽에선 경상도 쪽의 상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느낀 게 있으니, 10번 보유자는 꽤나 인성이 좋은 것 같다는 것이다.
세상이 미쳐가고, 그런 미친 세상에 적응한 사람은 자연히 개성이 강한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10번 보유자는 무난무난하면서 예의 바른 사람이란 느낌이 메시지부터 풍겨 왔다.
어쩌면 그 모습이 꾸며진 연기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10번 보유자]
-오늘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서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공유하며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를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10번 보유자는 예의 바른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대화방을 나갔다.
끝까지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속으로 10번의 별명을 지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킹스맨이라고.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냥꾼이라?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을 하며 활동한다는 건 상당히 수준 높은 사냥꾼이란 뜻이겠지?’
경상도도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이 경상도(부산, 울산, 대구 포함)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 뛰어난 사냥꾼도 분명 많을 것이다.
‘사냥꾼협회 보고 조금 더 빨리 남부에 진출해보라 해야겠네. 경쟁 단체가 생기기 전에.’
현재 남부는 수도권과 완전히 별개의 나라와도 같은 상황.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는 없으니, 사냥꾼협회가 두 지역의 가교 역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새로운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의 첫 등장 이벤트가 마무리되었다.
사냥꾼협회의 확장, 육군참모총장의 대통령 취임, 4명째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 등장까지.
다사다난했던 지난 5일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 3가지였다.
*
“윌리아 님!”
“네!”
이런저런 사건이 발생했던 5일.
이사이 나는 무려 레벨을 16이나 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성장의 탑을 클리어하진 못한 상태다.
계속 6~9층을 클리어하며 교환권을 구하고 있지만, 10층은 보스의 면상을 구경한 적조차 없었다.
당연하다.
원래대로 치면 10층은 레벨 100 정도 되는 사냥꾼들이 팀을 이뤄 들어와야 클리어가 가능한 곳이니까.
오히려 이전의 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몬스터들이 백호님과 상성이 좋지 않네요. 백호님은 정교한 전투기술이 강점인 분인데, 상대는 피지컬도 피지컬이지만 생물조차 아니니까요.]
검술 스승 오티스의 말대로다.
10층은 몬스터들이 너무 강한 데다가 상성도 좋지 않고, 쪽수까지 많았다.
[샌드 골렘 / 레벨: 90]
[머드 골렘 / 레벨: 90]
[청동 골렘 / 레벨: 95]
-쿵!
-콰아앙! 콰아앙!
10층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는 위의 골렘 3총사였다.
“윌리아님 샌드 골렘 하나 빠져나갔습니다!”
“네!”
“멍멍아, 윌리아님 잘 지켜!”
-멍!
손에 닿는 모든 걸 파괴하고 뛰어난 방어력을 지닌 청동 골렘.
사람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머드 골렘.
흩어졌다 뭉쳐졌다를 반복하며, 모래를 뭉쳐서 촉수처럼 쏘아대는 원거리 공격 능력을 보유한 샌드 골렘까지.
여러모로 최악의 조합이었다.
-까아아앙!
더구나 녀석들은 툭하면 상대하던 나를 피해 후방의 윌리아를 노렸다.
전투의 승리를 위해선 윌리아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뇌도 없는 마법몬스터 주제에 쓸데없이 똑똑하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윌리아를 태운 멍멍이가 아주 듬직해졌다는 거다.
섀도우 울프로 진화한 멍멍이는 윌리아를 태운 채 하늘을 날았고, 윌리아는 현자의 지팡이를 꺼내 샌드 골렘을 겨눴다.
-콰아아앙!
윌리아의 폭발 스킬이 작렬했다.
하지만 한 발로는 죽지 않는 녀석들인지라, 윌리아는 연거푸 폭발 스킬을 사용했고.
-팟!
어느 순간 윌리아의 폭발에 날아간 모래 속에서 골램의 핵이 드러나자, 멍멍이가 즉시 그림자 가시를 날려 꿰뚫었다.
그러자 샌드 골렘은 한 줌의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나는 그사이 질척질척 발을 붙잡고 늘어지는 머드 골렘에게 연거푸 칼을 꽂아 넣다가 무언가 칼날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퍼서서석.
그로 인해 머드 골렘의 몸이 갑자기 마르더니, 이내 굳어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와 윌리아, 멍멍이는 남은 청동골렘을 다구리 쳐서 마무리를 지었다.
“후우···. 10층은 도저히 깰 수가 없겠어.”
레벨 51부턴 레벨업 능력치 포인트를 2개씩 준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
덕분에 지금의 내 종합 능력치는 이렇다.
[근력: 50(+17) 순발력: 46(+21) 마력: 40(+25)]
세 가지 능력치의 평균은 66.
일반인의 13배에 달하는, 그야말로 괴물과도 같은 수치다.
이젠 도약 없이도 제자리에서 6~7미터의 높이는 가볍게 뛰어오르고.
100미터도 3초 정도면 돌파한다.
당연히 윌리아의 버프에 도약 같은 스킬까지 섞어 쓰면 눈으로 좆기 힘든 스피드와 그에 버금가는 파괴력이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이곳에선 부족하다 느껴지니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적어도 레벨 90은 넘어야 깰 것 같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요.]
-멍멍!
내 판단에 윌리아와 오티스, 멍멍이가 동감한다며 차례로 반응했다.
결국, 우린 10층을 공략하다 말고 오늘도 중간에서 포기해야 했다.
세 마리에게도 이렇게 고전을 하는데, 조금만 더 들어가면 열 마리까지도 뭉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성장의 탑을 나왔습니다.]
[앞으로 3시간 동안 성장의 탑에 재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난 성장의 탑을 나서며 고민했다.
더는 9단계 교환권으로 경험치를 바꿔먹어도 레벨이 잘 오르지 않는다.
지난 5일간 폭풍 레벨업을 경험한 나로선 불만족스러운 상황.
이젠 10층을 클리어하지 않는 이상 이전과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10층을 클리어하게 될 경우, 이전의 페이스를 이어갈 수 있단 뜻이기도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템의 질을 올리는 거긴 한데···. 한동안은 다시 던전을 돌아야 할까요?”
“지하 미궁 3단계를 가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윌리아는 미궁 던전을 꽤 좋아했다.
내부가 미로 같아서 재밌다는 이유로.
물론 나도 언제고 3단계로 진화한 지하 미궁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아이템의 수준은 이미 충분히 뛰어나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레벨에 도달해도 이 정도 수준의 장비를 마련하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템을 거론하는 이유는 지난 5일간 성장의 탑에서 아이템 한번 먹지 못하고 보상을 전부 경험치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레벨만 올렸으니, 이번엔 장비의 질을 올려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역시 한동안은 미궁을 공략해야 하는 건가.”
미궁 3단계의 일반 몬스터 레벨은 70부터 시작한다.
아마도 네임드와 보스는 레벨 80~85 정도가 아니까 싶다.
그곳을 클리어하면 분명 좋은 장비나 스킬이 나오겠지.
[그런데 장비는 여기서도 구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오티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장비를 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의 탑은 레벨업에 한해서만큼은, 기존 우리의 사냥법보다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장비의 업그레이드 측면에서는 효율이 그다지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교환권 자판기에서 파는 장비 자체가 던전제보다 품질이 좋지 않다.
게다가 장비를 얻으려면 또 경험치를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이런 생각이 자연히 들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말지.’
경험치는 이곳만 못하겠지만, 아이템에 한해선 무조건 던전에서 네임드와 보스몹들을 잡는 게 좋다.
[그런데 아이템 한두 개 달라진다고 10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요? 미궁을 클리어해도 당장 전투에 도움되는 보상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음···.”
정곡을 찔러오는 오티스의 물음.
녀석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에 입을 닫고 있던 윌리아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차라리 강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는 거 어때요?”
“강화라···.”
지금 내 장비들은 모조리 +2강이다.
그런데 장비들을 +4강, 아니 +3강 정도로만 수준을 높여도 전투에 상당한 여유가 생길 터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니.
“그럼 정령석을 구해야 하는데, 이게 어디서 나오죠?”
3강, 4강은 강화에 정령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정령석을 얻을 방법이 현재로썬 없었다.
내 물음에 윌리아도 머리를 긁적이고 오티스도 답이 없다.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거였으면 이렇게 고생도 안 했겠지.
호감도가 50%를 넘은 대장장이NPC 토레프 또한 어디서 습득할 수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일단 좀 쉬죠.”
우린 생각을 정리할 겸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군것질로 배를 채우면서 결국 지하미궁을 공략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세요? 다들 심각한 얼굴로.”
[공나무 / 레벨: 37]
그때, 보령팀의 팀장이자 성장의 탑 관리자인 콩나물님이 다가와 물어왔다.
이제 콩나물님을 비롯한 보령팀의 1군도 레벨 30후반에 들어섰고, 나머지 멤버들도 레벨 30을 넘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레벨업만 한 지 일주일이 넘으면서 어디에 내놔도 꿇리지 않게 되었다.
보령팀도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슬슬 사냥꾼협회의 주요 멤버들에게 이곳을 소개해도 될 것 같다.
“아, 10층 공략에 애를 먹고 있어서요.”
내 말에 콩나물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언제 들어도 내가 10층을 공략한다는 게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공략을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알아보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고민이 될만하네요.”
“혹시 정령형 몬스터에 대해 아는 거 있으세요?”
별 생각 없이 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 대해 돌아오는 답도 예상대로였고.
“아뇨. 아시다시피 저는 홍성에만 있었는데, 거긴 언데드 도시 아닙니까?”
“정령형 몬스터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게 문제네요.”
“이상지형 같은데 숨어 있는 걸까요?”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네요. 아니면 던전이거나.”
그런데···.
“그것도 아니면 엘프가 등장하는 곳에 있을지도 모르고요.”
“엘프요?”
“판타지 만화나 소설 보면 항상 등장하잖아요. 정령을 부리는 엘프들이요.”
“······.”
신박한 접근법을 내놓는 콩나물님이었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물었더니.
“성남에 장비 강화를 해주는 드워프 NPC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럼 드워프가 있으니 엘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개인적으로 고양이귀를 한 수인도 존재했으면 좋겠어요.”
“아···.”
성남의 최도겸이 얼마 전 사냥꾼협회에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장소를 공개해 화제가 되었다.
나와 윌리아가 이용하는 홍성의 드워프 토레프의 작업장 위치가 아닌, 성남에 자리한 드워프 막심의 작업장 위치를 공개한 것이다.
덕분에 협회에 가입된 사냥꾼 사이에서 강화방법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고, 나는 이 소식을 콩나물님에게도 전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콩나물님은 자연히 엘프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엘프의 위치를 모르니, 확인할 방법이 없는 추론일 뿐이지만요.”
콩나물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나와 윌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쪽 뒷산으로 가지 마세요.’
‘저 뒷산 근처에서 누가 엘프를 봤대요. 엘프 찾아 그 산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마 이상지형일듯?’
이벤트 몬스터 사냥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어눌한 한국말로 이런 말을 해주었던 평택의 주한미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확인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확인해 볼까요?”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제안에 윌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아도 생각이 같다면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 뜻이었다.
그렇게 우린 바로 주한미군기지가 위치한 평택으로 향하려 했는데.
[7번 조각의 소유자가 단체 메시지방에 11번 조각 소유자님을 초대했습니다. 참여하시겠습니까?]
마침 시나리오 조각을 보유한 주한미군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7번 보유자]
-SOMEBODY HELP!!!
이런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