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인천 제주 부산 (4)
성장의 탑 10층은 골렘들이 쏟아져 나온다.
공격 패턴은 단순하지만 단단하고 파괴적인 청동골렘.
질척거리는 몸으로 적을 삼켜 질식을 시키거나 움직임을 방해하고 마법공격에 강한 방어력을 보이는 머드골렘.
시야를 가리는 강렬한 모래바람으로 머드골렘의 공격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물리공격에 강한 방어력을 보이는 샌드골렘.
특히 머드골렘과 샌드골렘은 시너지가 좋은 데다가, 여러 마리가 동시에 몰려드니 10층 공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견제한다.]
[방어한다.]
허공을 노니는 푸른 인어와 녹색의 아지랑이를 두른 독수리가 머드골렘과 샌드골렘의 골치 아픈 공격을 막아주고 있어서 전투가 이전보다 편했다.
인어와 독수리는 외형적으로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전신이 반투명하다는 것이었다.
둘의 정체는 바로 윌리아와 시에나의 정령들이다.
이번에 윌리아가 정령소환 스킬북을 익히면서 계약한 물 속성 정령과 시에나의 바람 속성 정령이었다.
마치 결계처럼 두 정령이 펼치는 물과 바람 스킬 덕에 이전처럼 모래와 진흙에 허우적대는 일이 없어졌다.
“시, 시에나님! 너무 앞으로 나왔어요!”
“에이, 괜찮아. 나 회피능력 좋거든. 그냥 나 없다고 생각하고 싸워.”
윌리아와 시에나의 정령 모두 중급 정령이다.
타락한 중급 정령의 레벨이 90~100인 것에 비해 일반 중급 정령의 레벨은 80~90.
덕분에 윌리아는 아슬아슬 턱걸이로 중급 정령과 계약할 수 있었다.
‘미군이 타락한 정령 대신 일반 정령을 잡은 이유기도 했지. 일반 정령이 타락한 정령보다 레벨이 낮으니까. 뭐, 결과적으로 엘프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뼈아프게 치렀지만.’
두 사람의 정령이 지닌 스킬의 위력이 높아서, 골렘들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물론, 골렘들처럼 치고받을 수 있는 막강한 맷집을 가진 건 아니지만, 우리 파티엔 나라는 전위가 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정령계약 스킬은 또 구할 수만 있다면 나도 무조건 배워야겠어.’
참고로, 정령의 계약은 스킬북을 익힌 뒤 엘프마을 주변 필드에서 정령을 직접 찾아 진행한다.
더구나 계약은 해지와 재계약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에, 필요에 따라 속성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정령에게도 호감도와 비슷한 시스템이 있어서, 오랫동안 함께 해온 파트너에겐 정령이 더욱 강한 힘을 내어준다고 하지.’
아무튼 이런 정령들의 활약 덕분에 머드골렘과 샌드골렘의 협공에 스트레스받는 일 없이 적들을 상대했고.
“하하하!”
시에나도 시원하게 날뛸 수 있었다.
궁수가 앞으로 나서는 상황이 당혹스럽긴 하지만, 재밌게도 시에나가 옆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싸우는데 생각보다 내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평소 그녀의 전투 스타일인 걸까?
“어? 저기 문 있다.”
“네? 어디요?”
“저쪽 구석에 경첩 살짝 보이잖아.”
“경첩?”
나는 의문을 표하며 시력강화 스킬을 사용했고.
곧 사각의 구석에서 정말 찔끔 튀어나온 경첩인지 모를 금속 장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리안 스킬을 가진 시에나가 헛소릴 할 리가 없으니, 우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고,
정령들의 활약과 궁수 버전의 버서커 같은 시에나의 존재로 인해 우린 이전과 차원이 다른 속도로 10층을 돌파했다.
“와, 정말 문이 있었네.”
“그치?”
그로 인해 정령소환 스킬의 유지 시간인 30분이 끝나갈 즘 보스룸 앞까지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거의 최단 거리로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으스대는 시에나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고, 윌리아는 멍멍이와 함께 주변을 스윽 살펴보며 다가와 물었다.
“안전텐트 펴실 건가요?”
“그게 낫지 않을까요?”
동시에 나는 안전텐트를 펼쳤다.
보스룸에 들어가기 전에 마력을 채우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쉬게? 정령 재소환이 가능해질 때까지 버틸 거야?”
“음···.”
정령은 소환시간이 끝나면서 방금 막 사라진 상태.
재소환엔 1시간의 쿨타임이 필요하다.
즉, 시에나의 물음은 1시간 동안 기다릴 거냐는 얘기였다.
아무래도 성장의 탑 최후의 보스를 상대하기 직전인 만큼, 나는 만전의 상태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텐트 안에서 1시간이나 죽치고 있는 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의 탑은 다른 던전과 다르게 토벌한 몬스터가 리젠되지 않아.’
정령소환 쿨타임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을 게 아니라 몬스터를 계속 사냥하고 싶으면 다른 구역을 탐색해야 한다.
“뭐가 문제야? 사냥하면 되지. 아직 미탐색 구역 많잖아?”
정령의 도움이 없으면 골렘들이 얼마나 상대하기 귀찮은 존재인지를 모르는 시에나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상황을 설명했고.
시에나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그럼 멀리 있는 몬스터들을 몇 마리씩만 끌어 올까?”
“그게 돼요?”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제안을 되물었고.
그녀는 그게 뭐가 어렵냐는 투로 답했다.
“장거리 저격이 주특기거든. 물론 스킬의 백업이 있어야 하지만, 활로 1km 저격하는 거 보면 까무러칠걸?”
그야 누구나 그녀의 스킬 트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거다.
문제는 시에나가 내 옆에서 난리 치던 모습을 떠올리면 장거리 저격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단 거였다.
게다가 총도 아니고, 활로 1km 저격이라니, 허풍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보여 줄까?”
나와 윌리아의 불신 어린 표정에 시에나가 발끈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성장의 탑은 인스턴트 던전.
밖에서 보는 것과 내부의 공간은 큰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해 굉장히 넓다는 거다.
그런데 꽤나 먼 곳의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구역을 가리키니, 나와 윌리아는 시력강화 스킬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자 적지 않은 골렘들이 땅속에 파묻혀서 머리끝만 살짝 내밀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저러다가 공격을 받거나 사람이 지나가면 벌떡 일어난다.
대충 봐도 300~400미터는 떨어진 거리.
덕분에 표적은 시력강화 스킬을 썼음에도 코딱지만 하게 보였다.
-기기긱!
이내, 시에나는 그곳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줄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더없이 팽팽해졌을 때.
-팡!
-쉐에에엑!
그녀가 시위를 놓았고.
곧 한 줄기의 빛이 된 화살이 직선으로 날아갔다.
-쿵!
-우오오오!
그러자 골렘 한 마리가 벌떡 일어나며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시에나의 공격이 정확하게 골렘의 머리를 맞춰 어그로를 끈 것이다.
“헐?”
이런 식으로 하나씩 유인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지도 못한 작전에 우린 안전텐트를 나서며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시에나가 불러들인 골렘은 샌드골램.
하지만 녀석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동안, 시에나의 화살과 윌리아의 폭발 스킬 세례를 맞고 머지않아 고꾸라졌다.
칼 한 번 휘두를 기회 없이 동료들이 알아서 처치한 것이다.
나는 벙찐 표정을 지었고, 덕분에 시에나는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어때?”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래, 이게 엘프 궁수지.
나는 그녀에게 쌍따봉을 추켜들었다.
그에 시에나는 어깨를 활짝 편 채 기분 좋게 하하 웃으며 물었다.
“몇 마리씩 끌어올까?”
“4마리씩이요. 대신 머드골렘과 샌드골렘은 섞지 말고요.”
“오케이, 문제없어.”
그리고 시에나는 내 요구에 맞춰 청동골렘 2마리, 샌드골렘 2마리를 불러들였다.
끌어와 잡기라는 기존 우리 파티에 없던 새로운 전투 타입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
기존 대한민국은 청와대와 계룡대, 2작사(후방)를 중심으로 권력이 셋으로 분할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청와대를 계룡대가 차지하면서, 계룡대와 2작사로 권력이 양분된 상태가 되었다.
물론, 두 세력은 규모 면에선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남부지방이 2작사를 중심으로 워낙 똘똘 뭉쳐진 탓에 계룡대에서도 2작사를 가볍게 여기지 못했다.
이게 모두 대재앙이 발생하고 정부가 지나치게 수도권 위주로 군을 배치하는 바람에 생긴 상대적 차별이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2작사를 중심으로 뭉친 생존구역은 대구, 부산, 울산, 광주 네 곳.
놀랍게도 앙숙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힘을 합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방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냥꾼 단체는 ‘남부팸’이란 팀이 꽉 잡고 있었다.
“이야, 너는 언제 봐도 주인공 포스가 잘잘 흐르네.”
“주인공 포스라니, 그게 뭐야? 하하.”
“그게 뭐냐고? 네 주변을 봐봐. 하나같이 미남미녀들만 모여 있잖아. 그중에서도 제일 잘 생긴 건 우리 리더님이고. 누가 이런 팀을 최고의 사냥팀이라 생각하겠어? 연예인 집단으로 보지.”
남부팸의 리더 김시우는 시나리오 조각 10번의 보유자로, 서백호가 경상도 킹스맨이라 부르는 인물이었다.
최근 전라도 지역까지 세를 넓히고 있는 남부팸의 리더 김시우는 넉살 좋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는 광주의 유명 사냥팀 리더 최준우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김시우는 스윽 자신들의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다들 인물들이 훤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하얀 신관복 차림의 여인으로 이번에 김시우가 동료로 맞이하게 된 NPC였다.
게다가 남부팸은 멤버가 200명에 달하는 거대 사냥팀이었는데, 평균 레벨이 30이 넘을 만큼 매우 높고, 특히 김시우와 함께 움직이는 파티의 레벨은 평균 40을 넘겼다.
“그나저나 네 파티 멤버들 레벨이 진짜 후덜덜하구만, 솔직히 너희 팀이 대한민국에서 최고 아닐까?”
계속되는 광주팀 최준우의 입에 발린 소리에 김시우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이라면 겉으론 아닌 척해도 속으론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수도권을 장악한 사냥꾼 단체가 있는데, 청와대와 계룡대에서도 쉽게 건들지 못한다나 봐. 레벨 30 이상인 사람이 천명도 넘는다나?”
“뭐? 그게 정말이야?”
남부팸은 2작사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런저런 소문에 밝았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김시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꽤나 신빙성 높은 이야기일 것이다.
덕분에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김시우에게 금칠을 해주던 최준우의 표정도 굳어졌다.
“어, 그 집단의 대장이 서땡땡이래.”
“서땡땡? 음···. 아! 그 사람?”
그러면서 최준우는 어느 메시지를 떠올렸다.
[한국인 서**님께서 세계 최초로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한국인 서**님께서 세계 최초로 엘더몬스터를 토벌하였습니다.]
[한국인 서**님께서 세계 최초로 *** 했습니다.]
[한국인 서**님께서 세계 최초로 극상급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한국인 서**님께서 세계 최초로 3단계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확실히 그라면 대단한 규모의 단체를 이끌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
최준우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가 그들에게 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단지 그 서땡땡이란 사람이 운이 좋은 것뿐이겠지.”
김시우는 딱히 위로를 받으려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었기에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모르지 그건. 근데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거야.”
김시우가 최근 전라도 지역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주요 활동 영역은 경상도 일대였다.
그런데 그가 광주의 생존구역을 방문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최준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실은 한 시간 전쯤에 우리 광주 생존구역으로 예상치 못한 손님이 방문했거든.”
“예상치 못한 손님?”
김시우의 물음에 최준우는 잠시 뜸을 들이곤 이내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주도 사람.”
“응?”
“정확하겐 제주도에서 오늘 육지로 넘어온 사람.”
“뭐?”
최준우의 말대로 정말 예상치 못한 이야기.
갑자기 튀어나온 제주도 사람 이야기에 김시우는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의 제주가 어떤 상태인가?
완전히 고립되어 지원 따윈 바라지 못하고 독자 생존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 어떻게? 비행 몬스터하고 해양 몬스터 때문에 전 세계 어디도 배는 물론, 비행기도 못 띄우고 있잖아?”
“비행 스킬을 가지고 있다더라. 일반 비행기와 달리 몬스터의 방해를 덜 받는다더라고.”
“비행 스킬? 왠지 그런 스킬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있을 줄이야···. 그런데 그건 마력소모가 적은가 보지? 제주도에서 내륙까지의 거리가 꽤 될 텐데?”
“제주도 사람들이 십시일반 코인을 모아 안전구역의 도박장에서 아이템 슬롯머신을 돌려서 마력포션을 긁어모았대. 즉, 그 사람이 제주도 대표인 셈이지.”
“꼭 제주도를 벗어나야만 했던 건가? 위성전화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래?”
최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 신호를 교란하는 몬스터가 있대.”
통신 신호를 교란하는 몬스터라니, 그런 종류의 몬스터가 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었다.
최준우는 본론을 꺼냈다.
“그 몬스터에 의해 제주도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나 봐. 그래서 지원을 요청하러 온 거야.”
***
“어?”
[한반도에 배정된 메인 시나리오 20조각 중 12번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보유한 시나리오 조각은 7번, 11번, 12번까지 세 개가 되었습니다.]
윌리아와 시에나, 멍멍이와 함께 성장의 탑 10층에서 정령소환 스킬의 쿨타임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사냥을 이어가던 중.
나는 성장의 탑 10층 구미진 구역에서 이상한 벽화를 발견했고, 그곳에 손을 대자, 뜻하지 않게 새로운 시나리오 조각을 습득할 수 있었다.
“오, 이게 뭔 일이야?”
시나리오 조각의 사용처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에 등장한 6개의 조각 중 3개를 내가 보유한 상황이다.
뭔진 몰라도 많으면 좋은 것 아니겠냐 생각하며 웃어 넘기려는데.
[한반도 시나리오 진행률이 30%를 달성했습니다.]
[당신은 3개의 시나리오 조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추후 검증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시나리오 진행률 30%를 달성한 기념으로 힌트를 주듯, 꺼림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니, 많이 구하는 편이 이득인 거 아니었어? 갑자기 무슨 난이도가 올라가? 검증이 뭐길래?’
마력을 다 채우고 나서도 내가 연신 황당하단 반응을 보이니,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재촉한다.
“안 들어가? 이제 정령 소환할 수 있는데.”
어느새 우린 10층의 보스룸 앞에 도착했다.
“아, 가요.”
드르륵.
거대한 문에 손을 얹으니 문이 열리고.
“냅다 저격!”
시에나는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스킬을 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