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일본 여행 (4)
다사다난했던 2023년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전이라면 모두가 들뜰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상황이지만, 대재앙이 발생한 후 크리스마스는 시민들에게 점점 추워지는 겨울을 대표하는 날 중 하나일 뿐이다.
아무래도 대재앙을 겪으면서 모든 일의 포커스가 생존에 맞춰져 있다 보니, 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이야, 오사카 최대 백화점이라 그런가, 꽤 좋네.’
하지만 사냥꾼들은 조금 다르다.
특히 어딜 가든 개죽음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고위 사냥꾼이라면 기념일 등을 챙길 여유가 충분히 되기 때문이다.
나는 강이솔에게 사냥꾼 협회 한국팀에게 복귀 소식을 전달하라 지시하고는 돌아가기 전에 선물로 챙겨 갈 만한 게 없을까 싶어 도톤보리 인근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복귀 예정 시간까지 4시간 정도 남아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충분했다.
항상 함께하던 윌리아와 시에나, 멍멍이는 따로 관광 중인지라 나는 모처럼 적막을 즐기며 백화점 명품관을 살폈다.
해당 백화점은 레벨 25의 검치호 떼와 레벨 35의 푸른 검치호가 자리한 구역이라 인간들이 쉬이 접근하지 못해서인지, 매장들이 생각보다 온전했다.
“이 정도면 건질 게 많겠어.”
고위 사냥꾼들이 명품으로 치장하는 건 흔한 일이다.
틈날 때마다 버려진 매장에서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파밍하러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상에선 명품 브랜드 매장도 버려진 수많은 가게 중 하나일 뿐이니, 줍는 사람이 임자였다.
덕분에 일상적인 자리에서 무장을 푼 고위 사냥꾼들을 본다면 온갖 명품 로고를 구경할 수 있다.
나만 해도 가죽 갑옷 안에 러닝셔츠처럼 아무렇지 않게 받쳐 입는 티셔츠가 수십만 원은 내야 구매할 수 있는 브랜드의 제품이다.
명품 파밍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냥꾼들이 누릴 수 있는 특혜 중 하나였다.
‘오? 파텍 매장이네? 양품이 꽤나 많은 걸?’
나는 산책하듯 기분 좋게 백화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런 내 주위로 춤추는 검이 행성 주변을 공전하는 위성처럼 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접근하는 검치호들을 처치했다.
레벨 30 이하의 사냥꾼들이 고생하며 싸울 몬스터들을 나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처치하며 다녔다.
듣기로는 이 백화점이 모두가 아는 고가의 브랜드뿐만 아니라, 한국에 입점하지 않은 명품도 적지 않다고 하니, 부모님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기 좋아 보였다.
‘판매가 3,500만? 이거 엔화잖아? 이야, 아버지 드리면 좋아하시겠는걸?’
‘어? 이거 버킨아냐? 혹시 전시용인가? 이 보기 힘든 게 용케 남아 있네? 어머니 텃밭 가꾸실 때 농기구 바구니로 쓰면 되겠다. 크, 농기구 담는 바구니가 버킨이라니, 그야말로 종말 속 세상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네.’
애초에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살피던 나였으나, 나중에 가선 나와 내 일행을 위한 물건까지 주워 담았다.
그러다가 최고가를 자랑하는 수입 브랜드의 스피커를 발견하게 되어 기분 좋게 챙겼다.
“음?”
그렇게 얼마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을까?
레벨이 높아지면서 한껏 예민해진 나의 감각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문제는 그 시선이 상당히 이질적이었기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감각의 근원지로 블링크를 사용했다.
-챙!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오! 이런 곳에 방문자라니! 이건 인연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군요.”
일순 공기가 무거워지고.
웬 남자가 내뿜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말투로 내 앞에 등장했다.
[테우스 (떠돌이 상인) / 레벨: ???]
-호감도 작업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가죽 갑옷 차림에 한 손 장검을 허리에 찬 남성.
탐색 스킬로 보아하니 NPC 같았다.
더구나 엘프들처럼 고유의 레벨을 가진 NPC 말이다.
문제는 그 레벨이 얼마나 높은지 물음표로 표시가 된다는 점이며, 꽤나 위협적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어째서 NPC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분위기만큼이나 엉뚱한 장소에서 마주한 NPC는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그런데 이런 내 의문을 알아챈 그가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전 떠돌이 상인 테우스라고 합니다. 머리 위, 이름 옆으로 떠돌이 상인 표시 보이시죠?”
그의 말대로 테우스의 머리 위에는 이름, 레벨과 함께 떠돌이 상인이란 표시가 떠 있었다.
“떠돌이 상인? 그렇다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판다는 뜻입니까?”
“네, 맞습니다. 24시간 한 장소에 머무른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죠. 그리고 떠돌이 상인은 특별한 물건 5개를 판매한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부류의 NPC다.
혹시 이번에 업데이트된 걸까?
아니면 한국에도 있는데 아직 내가 찾질 못한 걸까?
그리고 그는 다른 NPC들과 다른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일본의 NPC인데, 언어가 통하는군요?”
“떠돌이 상인에게 다국어는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죠.”
윌리아도 그렇고, 시에나도 그렇고, 심지어 펫인 멍멍이도 일본인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이는 NPC와 펫도 지역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떠돌이 상인은 언어가 자연스럽게 통했다.
‘여러모로 당혹스럽긴 하지만…….’
그가 아주 특별한 NPC라는 건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판매하는 아이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제가 판매하는 물건의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통역 반지 / 등급: 희귀]
-다른 나라 언어를 듣거나 말할 때 자동으로 통역된다.
-가격: 1,000,000코인
[안전 구역 생성 토템]
-200평 규모의 나만을 위한 안전 구역을 생성한다. 안전 구역의 이용 비용은 따로 없으며, 주인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입장할 수 없었다.
-가격: 5,000,000코인
[빛을 엮어 만든 부츠 / 등급: 희귀]
-보유자의 다리를 보호하는 부츠이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 장비.
-이동 계열 스킬의 효과가 100% 증가한다.
-마력+6
-가격: 5,000,000코인
[유일 등급 아이템 뽑기권]
-장비 뽑기권이 아닌, 아이템 뽑기권이다.
-가격: 10,000,000코인
[화염의 레바테인 / 등급: 유일]
-검기와 검강을 씌울 경우 화검기, 화검강이 형성되며, 화염 공격으로 적에게 추가 대미지를 준다.
-사용자는 화염에 대해 강력한 저항력을 갖게 된다.
-근접 전투 스킬 공격력 100% 증가
-근력+6, 순발력+6
-자체 스킬: 불기둥 (극상급 광역 스킬 / 소모 마력: 20)
-가격: 200,000,000코인
판매 품목을 본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확실히 특별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뭡니까? 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은?”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제일 싼 아이템인 통역 반지가 100만 코인이다.
제일 비싼 아이템인 유일 등급의 검은 무려 2억 코인이고.
상대적으로 100만 코인짜리 아이템이 싸 보일 지경이다.
“참고로 각 아이템은 인당 1개씩만 구입할 수 있는데, 몇몇 아이템은 사전에 매진될 수도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가격에 몇 개씩 산다는 건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는데, 떠돌이 상인은 나한테 귀한 거라 많이 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내저었다.
나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100만 코인 정돈 마음먹으면 금방 번다.
사냥꾼이 아닌 사람들은 10코인에 손을 벌벌 떨기도 하는데, 나는 몬스터 한 마리 잡으면 5천~1만 코인이 기본으로 나온다.
게임이 그런 것처럼 현실도 사냥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보상도 커지기 마련이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역시 2억 코인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지금 내 전 재산이 얼마지?’
[보유 코인: 30,520,138]
지금의 재산이 6~7배로 불어야 구매할 수 있는 비용이다.
때문에 나는 불만을 표했고, 떠돌이 상인 테우스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레바테인 급의 무기는 쉽게 구매할 수가 없죠. 유일이라는 등급은 장식이 아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템이란 소리니까요.”
“으음…….”
“솔직히 지금 단계에서 3천만 코인을 개인이 벌어서 갖고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레바테인을 구매 사정권에 담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다른 아이템들도 시선을 옮겼다.
‘통역 반지, 200평 안전 구역 생성 토템, 빛을 엮어 만든 부츠, 유일 등급 아이템 뽑기권.’
솔직히 다 사고 싶긴 한데…….
가격을 볼 때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번에 대량으로 획득한 아이템 중에 빛을 엮어 만든 시리즈의 장비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빛을 엮어 만든 바지.
동 오사카에 하의를 안 입고 팬티 차림으로 다니는 미친놈 있어서 처치했더니, 그거 떨구더라…….
만약 여기서 빛을 엮어 만든 부츠까지 조합한다면 맨발에 팬티 한 장 차림을 연출할 수도 있다.
물론, 전혀 그럴 생각이 없지만.
“빛을 엮어 만든 부츠와 안전 구역 토템을 구입하죠.”
그래도 빛을 엮어 만든 시리즈의 장비는 투명할 뿐만 아니라, 착용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편하고 또 뛰어난 방어력까지 갖고 있다.
마침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왔는데,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안전 구역 토템 역시 같은 이유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1천만 코인입니다.”
“와, 나…….”
막상 결제하려고 하니, 아까워서 손이 덜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애써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코인을 건넸고, 나는 결제한 아이템을 건네받았다.
빛을 엮어 만든 부츠는 강화하지 않아도 지금 착용 중인 부츠보다 옵션이 좋았기에 바로 발에 가져다 댔다.
[빛을 엮어 만든 부츠를 착용하면, 기존 착용 장비인 바람의 부츠 강화 3단계의 옵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위와 같은 메시지가 떴고, 나는 알겠다며 무시했다.
그리고 함께 구매한 200평짜리 안전 구역 설치 토템은 인벤토리에 고이 모시듯 넣었다.
‘이건 부모님 집에 설치해 드려야지.’
안전 구역과 바로 붙어 있는 월광도 저택과 달리, 가의도에 있는 부모님의 집은 안전 구역과 조금 떨어져 있으니, 만약을 위해 이걸 설치해 드려야겠다.
“통역 반지와 유일 등급 뽑기권은 구매하지 않으시나요?”
그에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100만 코인짜리 통역 반지만 추가로 구매했다.
왠지 앞으로 외국인들을 상대할 경우가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뽑기권은 필요 없습니다.”
“아쉽군요.”
유일 등급 뽑기권은 장비가 아닌 아이템 뽑기권이다.
아이템 뽑기권에서 장비가 나올 확률은 10%도 되지 않기에 쳐다도 안 봤다.
통역 반지를 착용한 나는 볼일을 다 봤다고 생각해 떠돌이 상인에게서 작별 인사를 하려 했다.
“전 이만 다른 데 가봐야겠네요. 마침 24시간 전부 채웠거든요.”
“네?”
그런데 선빵을 치는 떠돌이 상인 때문에 나는 당황해야 했다.
협회 멤버들을 동원하여 안전 구역 토템을 몇 개 더 구매하게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불러올 테니, 더 영업하시면 안 됩니까?”
내 부탁에 떠돌이 상인 테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규칙이라서요. 아쉽지만 다음에 뵙기로 하죠. 물론, 다음이 없을 수도 있지만요. 하하!”
그리고 그는 내게 손을 흔들고는 갑자기 허공에 등장한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참…….”
뜻하지 않은 곳에서 거액을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물건을 보면 엄청 손해라는 느낌도 아니었다.
귀한 만큼, 비싸게 구매했다는 느낌이랄까?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백화점 아래층으로 향했다.
‘떠돌이 상인은 한국에도 있겠지. 특이한 걸 많이 팔 것 같으니. 정보 공유해 놔야겠다.’
그렇게 다시금 명품들을 줍줍하던 나는…….
“협회장님!”
“음?”
특이한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백화점 탐색을 그만둬야 했다.
“레벨 100의 검사형 몬스터란 말이죠?”
“네!”
이 역시 꽤나 흥미를 끄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 * *
일본 효고현의 아와지섬은 서울과 비슷한 면적을 가진 큰 섬이다.
오사카시를 기준으로 직선상 거리는 4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육로로 이동할 경우 고베시를 거쳐 다리를 이용해 들어가야 하기에 이동 거리는 50km가 넘는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웨이포인트를 찍어 놓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이런 곳엔 뭔 일이래?”
“뭐야, 알지도 못하면서 따라온 거야?”
“뭔데?”
단 한 번도 방문해 보지 않은 곳임에도 웨이포인트 점퍼를 쥔 다나카의 도움으로 사냥꾼 협회의 멤버들이 속속 아와지섬으로 이동되었다.
일단 지시에 따라 이동하긴 했지만, 많은 협회 멤버들이 이 상황에 의문을 표했다.
“레벨 100의 엘더 몬스터를 발견했다잖아.”
“아, 그거 토벌하고 가려고?”
그리고 이유를 듣게 되자 다들 몬스터 토벌을 위해 이동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검사형 엘더 몬스터는 협회장님 파티가 단독으로 사냥하신대.”
“응? 그럼 우린 왜 왔는데?”
“각 팀 리더들이 관전 요청을 했다고 하더라. 수준 높은 전투를 보는 것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나?”
“아아, 그렇구나.”
그제야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된 모두가 납득했다.
“특히 이번 전투는 협회장님의 근접 전투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 같아. 엘더 몬스터가 검사형이라.”
“그래?”
지난번 제주도 원정 때는 다들 자기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협회장인 서**부터가 관전자들을 염두에 두고 싸울 예정이기 때문이다.
“협회장님이다!”
“리아 님!”
“요정 같다! 시에나!”
“죽을래? 누가 나한테 반말했어.”
잠시 후, 서** 파티가 등장하자 사냥꾼 협회 멤버들이 환호했다.
그 안에는 다나카를 포함한 일본인 멤버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완전히 축제 같은 분위기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서** 파티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이동했고, 모두가 우르르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깄다!”
어렵지 않게 레벨 100 엘더를 찾을 수 있었다.
[엘더 데몬 다이토 / 레벨: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