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중립 도시 (1)
나는 다크엘프 족장 아르무스와 싸우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귀환 스크롤을 이용해 도망치려 했다.
아무리 녀석이 보스급 이상의 몬스터가 아닌,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레벨 150은 장식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투 초반 천벌 스킬이 적에게 적중하며, 흔한 말로 ‘뽀록’이라 할 수 있는 운빨샷이 터졌고, 다크엘프 족장의 공략 가능성이 생겨났다.
덕분에 긴 시간, 족장과 대등한 전투를 펼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끝내 레벨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전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분은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회피에만 집중하세요.]
[네!]
[오케이!]
나는 텔레파시로 윌리아와 시에나에게 그렇게 말을 전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주 스킬로 인한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분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그런 내 발밑으로 어느새 두 쪽으로 찢긴 스크롤이 떨어졌다.
그 스크롤은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 초기화권’이라는 이름도 긴 아이템으로, 이번에 발생한 생존 이벤트를 클리어하고 점수 상점에서 무려 50점을 주고 구매한 물건이다.
내 비장의 무기가 되어 줄 아이템이기에 10개나 구입해 뒀다.
이 아이템의 효과는 이름 그대로 스킬 쿨타임을 초기화하거나, 쿨타임 역할을 하는 디버프를 해제하는 거다.
즉, 이 아이템으로 인해 나는 다시금 폭주와 분신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마력 포션]
예전엔 구하기가 힘들어 전략 물자 취급하며 아껴 썼던 마력 포션.
하지만 이제는 이벤트 상점과 레벨 100 이상의 특수 몬스터 사냥으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녀석과의 전투 중에 마력 포션을 2개나 사용했었으니, 이번이 3개째다.
덕분에 다시 전투를 이어 갈 수 있는 상태가 된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물론,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전투로 인해 소모된 심력은 회복이 되지 않지만…….
지금은 이거면 충분했다.
[이, 이런…….]
내가 마력 포션을 섭취하려는 행동을 막으려 했던 다크엘프 족장.
하지만 윌리아와 시에나, 멍멍이의 적절한 방해에 막지 못했다.
셋 모두 한계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를 도왔다.
족장은 그런 셋에게 분풀이를 하듯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그들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시전했다.
“자, 이제 그만 끝을 보자.”
그리고 나는 폭주와 분신 스킬을 사용했다.
-파앗!
나를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파장처럼 퍼져 나가고, 이내 내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색이 바랜 듯한 느낌을 주는 분신체는 전체가 새까만 눈으로 족장을 응시했다.
그러자 녀석은 이를 악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때려눕히면 그만이지. 네 녀석도 언제까지 상태 회복을 할 순 없을 테니 말이야.]
정답이다.
하지만 힘들 거다.
당장 이번 전투를 버텨 낼 가능성이 낮았으니까.
나는 폭주 스킬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뻥튀기되었다.
덕분에 세상이 갑자기 느려진 듯한 느낌이 들고.
나와 분신이 동시에 튀어 나갔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지금은 눈에 익었다!]
폭주를 사용하면 갑자기 빨라지는 스피드에 적들은 당황하기 마련.
하지만 이번에는 폭주에 폭주를 연속으로 사용해서인지 상대의 대응이 신속했다.
-콰아아앙!
녀석이 발을 구르자, 지면이 물결치듯 흔들린다.
그러나 나 역시 녀석의 패턴을 모두 파악한 상태.
바로 디딤판 스킬을 이용해 몸을 날리고, 분신도 그런 나를 똑같이 따라 했다.
-파파팟!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반월참! 난무!’
그리고 두 자루의 검과 하나의 주먹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1초에도 수차례 주고받는 공방.
한 번 삐끗하면 바로 목이 날아가거나, 머리가 터질 수도 있는 전투가 치열하게 이어졌다.
스킬의 빛이 연거푸 터지면서.
때로는 뇌전이 폭발하듯 비산하기도 하고.
허공에서 거대한 검이 생성되며 지면을 내려찍기도 하고.
푸른빛의 광선이 지하 공동에 커다란 숨구멍을 뚫어 주기도 했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전투가 이어졌다.
[아직이다! 이 몸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주먹으로 하늘을 꿰뚫을지니!]
녀석의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정신력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콰콰콰쾅!
다크엘프 족장은 진작에 끝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잘 버텼고.
-푹!
[아쉽군. 팔 한쪽이 무사했다면…….]
“그래, 그러면 네가 이겼겠지.”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 갑옷을 관통하여 내부에 충격을 주는 스킬을 내 머리를 향해 사용하려 했지만, 분신에 의해 가로막혔고 곧이어 내 듀랜달에 심장을 꿰뚫렸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는 녀석의 모습을 냉정히 바라보며, 이내 목을 쳤다.
-촤아아악!
심장이 꿰뚫려도 부활하거나 회복하는 몬스터를 많이 봤던 내 입장에서는 머리를 날리는 게 가장 확실한 처리법이었다.
[네임드 다크엘프 족장 아르무스를 토벌하여 경험치 50,000,000을 획득했습니다.]
[다크엘프 족장을 최초로 토벌하여 경험치 5,000,000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 ‘부상’과 ‘상태 이상’이 모두 회복됩니다.]
경험치를 무려 5,500만이나 먹었다.
덕분에 레벨은 단번에 3개나 올랐다.
이 정도면, 내가 북한에서 레벨 125의 로드급 엘더를 잡고 먹은 경험치의 3배다.
‘하지만 당시 레이드에서 내 기여도가 10%에 조금 못 미쳤으니, 경험치 총량은 레벨 125의 로드급 엘더가 레벨 150의 네임드보다 훨씬 많네.’
역시 레벨보다 중요한 건 몬스터의 급인 것 같다.
레벨 150의 네임드 몬스터를 잡았다고 해도 자신 있게 이무기에게 달려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이무기는 레벨 130의 네임드 가디언까지 함께 있으니…….
“나이스! 잘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이어서 시에나와 윌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폭주 스킬의 후유증으로 다시 축 처진 나는 안전 텐트를 꺼내 펼치며 휴식을 취해야 했다.
“아이템 뭐 나왔어?”
그리고 재촉하듯 이어지는 시에나의 물음에 나는 다크엘프 족장을 처치하고 뜬 보상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내 나와 내 일행들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희귀 등급의 장비 2개와 극상급 스킬 2개가 나왔는데…….
“완전 격투가 세트네.”
“주변에 몬스터를 상대로 주먹 휘두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걸 어쩌죠?”
무기를 쥘 수 없는 전투 글로브에 발차기를 이용한 공격 적중 시 추가 데미지를 주는 신발.
전투 글로브처럼 무기를 쥐지 않은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격투 스킬 2종까지.
고생을 했음에도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보상이 나와 미간이 좁혀졌지만…….
특이한 두 개의 보상 덕분에 그나마 기분을 풀 수 있었다.
[떠돌이 상인 소환권]
-떠돌이 상인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거다.
코인만 충분하다면 유일 등급의 장비조차 구매할 수 있는 떠돌이 상인을 불러낼 수 있는 소환권 1장.
떠돌이 상인은 일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이후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음에도 떠돌이 상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장은 부족해도 자금은 언젠가 모이게 되어 있어. 높은 레벨의 몬스터일수록 많은 코인을 떨구니까. 그럼 그때 떠돌이 상인을 부르면 되는 거야.’
자금만 충분하다면 이 소환권은 유일 등급 장비 교환권이나 다름이 없다.
그 가치를 알기에 솟구친 짜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승리의 깃발 / 등급: 희귀]
-깃발을 흔들면 3시간 동안 반경 1km 이내 아군 전체의 능력치가 10% 상승한다.
-범위 내에선 효과가 적용되는 인원수의 제한이 없다.
-재사용 대기 시간 3시간.
그리고 내 기분을 풀어준 두 번째 보상은 이거다.
무려 아군 전체에게 버프를 걸어 주는 아이템.
거대 단체를 이끄는 내게 매우 잘 어울리는 보상이 아닌가.
능력치 10% 상승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상승 폭이 상당히 크다.
내 전체 능력치가 300이 넘는데, 그중 10%면 30나 오르는 것이니 말이다.
이는 레이드에서 사냥꾼 협회의 전투력 상승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파티만 있을 때도 사용할 수 있기에 꽤나 효율적인 아이템이었다.
-둥실.
무엇보다 깃발의 형태가 마음에 든다.
“아, 허공에 떠서 주인을 쫓아다니는구나.”
화려함도 화려함이지만, 마치 장군기처럼 깃발은 허공에 떠서 계속 나를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깃발에 손을 뻗어 흔들면…….
[승리의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깃발을 기준으로 반경 1km 이내에 있는 아군 전체의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이렇게 버프가 적용된다.
“멋지네.”
처치 곤란한 격투가 아이템과 스킬을 빼고도 이 2개의 보상이면 마력 포션 3개와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 초기화권을 소모한 값은 충분히 되는 거 같다.
“퀘스트는 어떻게 됐어?”
“아…….”
그리고 아직 보상 타임은 끝나지 않았다.
[엘프는 하나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 * *
대한민국 국정원과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합동 조사부는 중국으로부터 몬스터 가공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선택을 했다.
다만 대놓고 러시아에 협력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정보를 누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명 어부지리 작전.
빠꾸 없는 직진 타입의 러시아가 중국의 어그로를 끌면 은근슬쩍 기술을 빼돌리는 거다.
“러시아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러시아는 너무도 성실하게 합동 조사부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고, 이 사실은 감시형 오토마타에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와, 중국 정부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대단하네요.”
한때 미국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쳤던 두 나라지만, 몬스터의 위협과 배고픔 앞에 더 이상 동맹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이, 이화원에서 러시아 측과 중국 측의 무력 충돌이 포착되었습니다.”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이화원에서 러시아 측과 중국 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서 여기저기 보안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감시형 오토마타 내부 침입 성공했습니다.”
“오오!”
본래는 먼 거리에서 위성처럼 탐색과 감시를 하는 게 감시형 오토마타지만, 본체가 크지 않고 투명화 옵션이 있는 만큼, 때에 따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적진에 침투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은.
“자료 확보 완료!”
원하던 정보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 * *
“하하, 잘했어!”
퀘스트 성공 보고에 천진난만하게 생긴 에밀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만족했다.
[퀘스트 보상을 획득합니다.]
-에밀의 호감도가 10% 올라 65%가 되었습니다.
-다크엘프 테이밍 목걸이를 획득했습니다.
에밀을 동료로 맞이할 수 있는 호감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동료로 맞이할 생각은 없다.
사이코 같으니까.
볼일 다 봤으니, 예전처럼 다크엘프 반복 퀘스트를 받고 우리는 엘프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린 다크엘프 테이밍 목걸이를 보며 고민해야 했다.
“어떤 다크 엘프를 동료로 삼아야 할까요?”
내 물음에 윌리아와 시에나가 생각에 잠겼다.
일단 우리가 확인한 다크엘프는 5종류가 있다.
일반 다크엘프, 다크엘프 궁수, 다크엘프 전사, 다크엘프 마법사, 다크엘프 족장이 있다.
하지만 다크엘프 족장은 네임드여서 길들일 수 없으니, 앞선 네 종류의 다크엘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직업이 중복되니, 애매하네.”
시에나의 말에 나와 윌리아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고민했을까?
윌리아가 뜻밖의 말을 했다.
“굳이 지금 쓰지 않아도 되죠.”
“네?”
“한동안은 이 하늘섬 세일론에서 계속 레벨업을 할 텐데, 당장 전투력이 부족하진 않잖아요. 계속 싸우다 보면 새로운 다크엘프를 발견할 수도 있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손에 넣은 아이템을 꼭 당장 쓰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시에나는 윌리아와 생각이 달랐다.
“차라리 아무 다크엘프나 길들여서 진화시키면 되잖아. 그동안 시간이 되지 않아 미뤄 놨던 룡룡이, 와일번, 와이번도 이 기회에 진화시키면 될 듯. 비행 펫들도 이무기랑 싸울 때 써먹을 수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내에서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 시에나였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시에나 님 의견대로 가죠. 다크엘프 전사를 길들여서 진화시키는 걸로 해요.”
“좋았어!”
시에나는 봤냐며 윌리아를 바라보았지만, 윌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제안은 제안이지 강요는 아니니까.
그리하여 우린 새로운 펫을 길들이기 위해 이동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반도에 중립 도시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의 웨이포인트에 중립 도시가 자동 등록됩니다.]
영문 모를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