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중립 도시 (4)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아, 아직 영토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영토?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이 홀로그램으로 표기된 한반도의 각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는 걸까?
그다음 영토를 가진 사람끼리 싸우게 하고?
그럼 진짜 전쟁이라 표현할 수 있긴 할 것 같다.
이 건물의 이름이 전쟁관인 것처럼.
‘그런데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 중엔 뛰어난 실력자도 있지만, 단순히 운만 좋은 사람도 있을 텐데…….’
시나리오 조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영토의 주인이 되는 건 너무 운빨 시스템 아닐까?
하지만 그때.
‘아! 그러고 보니.’
과거의 어느 메시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내용이다.
[한반도 시나리오 진행률이 30%를 달성했습니다.]
[당신은 3개의 시나리오 조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추후 ‘검증’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건 성장의 탑 10층에서 3번째 시나리오 조각을 얻었을 때 떴던 메시지다.
당시에는 검증이란 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인제 보니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조각을 소유한 것 외에도 검증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토의 주인이 되면 어떤 권한이 생기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자격 검증은 거쳐야겠지.’
물론, 전부 추측일 뿐이다.
그래도 나름 그럴싸해 보이는 추측이 아닌가.
“뭔데? 뭔데 그래?”
“뭔데, 뭔데?”
그런 내 뒤에서 시에나와 내 동창 오기석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기웃거렸다.
심각한 와중에 뒤에서 촐싹대니, 괜히 힘이 빠지는 것 같다.
‘그런데 진짜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에게 영토가 배정되고, 이후 그 영토를 중심으로 전쟁이 진행된다면…….’
솔직히 손해 볼 게 없을 것 같다.
나는 시나리오 조각을 3개나 갖고 있고, 동맹을 맺은 조각 보유자들도 있다.
그뿐인가?
압도적인 전투력과 사냥꾼 협회라는 거대한 세력까지 갖고 있으니, 한반도 내에서는 내 적수가 없는 상황이다.
과연 경쟁이란 단어가 성립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
-휙. 휙. 휙.
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테이블 중앙에 떠 있는 홀로그램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다가 지도 크기를 늘리고 줄이는 것도 가능한가 싶어 별생각 없이 홀로그램을 스마트폰처럼 조작했더니.
“어?”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이 포함된 극동아시아 지도가 떠올랐다.
“이건?”
중국과 일본도 한반도처럼 나라가 20~30개의 구역(시나리오 조각 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반도는 파란색, 일본은 녹색 등, 나라마다 표시 색상이 다른데, 중국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12개의 색으로 나라가 쪼개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12개의 영역이 또 각각 20~30개의 구역으로 나뉜 걸 보면, 아무래도 중국은 인구수도 많고 땅덩어리도 커서 시스템이 나라를 쪼갠 게 아닐까 싶었다.
‘국가 간 밸런스를 맞춘다면 그래야 형평성이 맞겠지.’
그리고 그 순간.
불길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잠깐, 메인 시나리오가 인간끼리의 영토 전쟁이라면, 그 범위는 국가 내 지역 단위를 넘어 세계 단위로 확장될 수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몬스터의 등장은 결국 인간들의 대전쟁을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니까.
‘미쳤군.’
혀를 찬 나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주 불쾌하기 그지없는 비밀을 알게 된 느낌이다.
“응? 두 분은 크게 걱정이 없어 보이시네요?”
그런데 나와 같은 사냥꾼 협회 소속이자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인 강이솔과 인천의 김진욱은 금세 안정을 되찾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흰 무슨 일이 생겨도 협회장님을 따를 뿐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둘은 나와 함께라면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머릿속을 정리한 모양이다.
덕분에 한껏 솟구쳤던 짜증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반면 더없이 심각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김시우였다.
몬스터만 해도 버거운데, 인간끼리의 싸움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니 심각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싸우게 될 상대가 나와 사냥꾼 협회일 수도 있으니.
그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우리의 추측이 100% 맞아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죠. 아직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어요. 그러니 벌써 흔들리지 마세요.”
“그, 그렇죠?”
내 말에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추가로 지도를 확대해 봤지만, 일본과 중국까지만 볼 수 있고, 그 이상 다른 나라의 정보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쓸데없이 생각만 많아지는 전쟁관에 머무를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자 김시우를 제외한 모두가 내 뒤를 따랐다.
재회한 지 1시간도 안 된 오기석 파티까지.
머지않아 김시우도 뒤를 따라왔지만, 그의 발걸음은 굉장히 무거워 보였다.
‘메인 시나리오가 진짜 전쟁 콘텐츠라면,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선 동맹이 최선의 방법이겠지.’
이 기회에 철원 지역 사냥팀의 리더이자, 1번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인 오기석도 사냥꾼 협회로 끌어들여야겠다.
* * *
나는 이후로도 중립 도시의 조사를 이어 갔다.
행정 구역이라 부르게 된 명예의 전당과 전쟁관이 포함된 거리에는 그 외에 무투장과 시청, 치안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 시설 모두 입장 불가 상태여서 내부를 살필 수는 없었고, 그저 용도를 예상할 뿐이었다.
‘무투장의 용도는 뻔하지, 사람끼리 싸우고 그걸 유희화 하기 위한 장소 아니겠어?’
‘그런데 시청과 치안청은 어떻게 운영되는 거지? 나중에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NPC들이 배치되는 걸까?’
그렇게 행정 구역을 모두 둘러본 나는 더 남쪽을 살폈다.
그곳에 5층짜리부터 1층짜리까지 다양한 크기의 주택이 세워져 있었다.
주택들도 상업 구역의 상점들처럼 임대가 가능했고, 가격은 월 5천 코인부터 20만 코인까지 규모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었다.
분명한 건 이 안에도 빈부 격차가 존재하여, 행정 구역과 가까운 곳일수록 주택이 고급스러웠으며, 끝으로 갈수록 집들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모 영화의 일등칸과 꼬리 칸을 보는 것처럼.
‘위치가 좋은 지역의 주택은 미리 임대해 놓을까?’
나중에 이 중립 도시가 활성화된다면, 주택 위치 선점에 경쟁이 꽤나 치열할 것으로 보여 나는 선임대를 고민했다.
‘아니, 됐다. 뭘 벌써 임대해.’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는데, 이 중립 도시가 활성화되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악이 끝난 중립 도시의 각 구역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나누면 이렇게 된다.
[왕성 구역]
[대저택 구역]
[상업 구역 1]
[분수대 광장(웨이포인트)]
[상업 구역 2]
[행정 구역]
[주거 구역]
구석구석 살피니, 처음 대충 둘러봤던 것보다 도시가 더욱 큰 느낌이 들었다.
“뭐, 챙길 만한 건 없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제법 큰 소득이 있었지만, 물질적인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김시우가 내게 물어 왔다.
“이곳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심플하게 답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만약을 위한 감시원을 두긴 하겠지만, 이곳을 점유하거나 통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을까?
김시우는 작게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뵈어 반가웠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라 판단한 걸까?
그는 바로 돌아가려 했다.
굳이 말릴 이유가 없기에 나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고, 김시우는 그대로 중립 도시에서 사라졌다.
“무슨 생각인 걸까요?”
강이솔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뻔하죠. 부하들 대거 풀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나리오 조각을 확보하려 할 겁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움직임을 취할 뿐이다.
나와 전투를 치르거나, 치르지 않거나, 시나리오 조각은 하나라도 많은 편이 유리할 테니 말이다.
막말로 나중에 그가 자진해서 굽히고 들어오더라도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더 큰 영토(시나리오 조각) 또는 세력을 갖고 있는 게 나았다.
“어? 그럼 우리도 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강이솔이 당황하며 말했고, 나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시나리오 조각은 모두 7조각. 그중 6조각이 우리 수중에 있습니다. 남부팸이 보유한 건 고작 1조각이고요. 그러니 조급하게 행동할 필요 없습니다. 조각이 찾아다닌다고 막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철원의 오기석은 자신도 포함된 거냐는 듯 손가락으로 자길 가리켰으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남부팸에서 아무리 열심히 이곳저곳을 뒤진다고 해도 우릴 따라올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잊으신 건 아니죠? 시나리오 조각은 대한민국에 20개가 배치된 게 아닙니다. 한반도에 20개가 배치된 거지.”
“아!”
그제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 강이솔이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발견된 7개의 조각은 모두 대한민국 내에서만 발견됐네요?”
“그렇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조각보다 북한에 남은 조각이 훨씬 많겠죠. 그리고 우리 사냥꾼 협회는 북한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프리패스가 있는 반면…….”
“남부 패밀리는 북한에서 발급한 프리패스가 없군요!?”
강이솔이 이해했다며 격하게 반응했다.
개개인의 무력은 물론, 세력의 규모와 상황까지 남부 패밀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의 상대는 아니다.
“우리도 조사팀을 꾸립시다.”
“네, 알겠습니다.”
“다만 협회원들에게 억지로 조각을 찾게 하는 게 아니라, 새로 시나리오 조각을 구하는 사냥꾼들에겐 높은 대우와 보상을 약속하겠다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드세요. 그리고 조사팀은 반드시 로테이션 방식으로 운영해서 레벨이 뒤처지는 멤버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시원시원한 대답이 듣기 좋다.
그렇게 강이솔과 나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인천팀의 김진욱이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저희가 유리해도 결국 협회 소속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시나리오 조각을 얻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땐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포섭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포섭 방법도 간단하다.
“우리가 이곳에서 알게 된 진실을 알려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어디에 붙어야 안전할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겠죠. 물론, 포섭으로 넘어온 사람도 충분한 대우를 약속해야겠지만요.”
자신감 넘치는 내 발언에 강이솔과 김진욱은 그도 그렇다며 당연하다는 듯 수긍했다.
오직 철원의 오기석만 지금의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오기석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러자 그의 몸이 움찔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과거의 기억은 잊어버리자고 오기석 쪽에서 부탁했으니, 나는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시골 촌놈에게 서울 구경 좀 시켜 주려 하는데 생각 있어?”
“나도 고향이 서울이거든? 근데 대재앙 이후 서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긴 해.”
“그럼 가 보면 되지.”
내게는 웨이포인트 점퍼가 있다.
내가 방문한 지역이라면 어디든 이들을 데려다줄 수 있다.
* * *
“와, 생존자가 생각보다 많네?”
오지에서 생활을 해 와서인지, 100만에 육박하는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서울의 캠프를 본 오기석과 철원팀 멤버들은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올림픽공원에 세워지고 있는 사냥꾼 협회의 도시도 보여 주었다.
수많은 전문가가 붙은 데다가 금액 걱정 없이 건설의 편의성을 더해 주는 여러 아이템을 무한정 쏟아부은 덕분에, 올림픽공원 현장은 벌써부터 웅장한 도시의 자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이미 길이 5.5km에 달하는 외곽 성벽이 완성되었으며, 88호수를 끼고 건축된 사냥꾼 협회 본부도 어제부로 완공되어 멋들어진 위용을 뽐냈다.
미국의 펜타곤과 계룡대 삼군본부를 참고하여 육각형으로 지은 건물은 급조한 것치곤 꽤나 완성도가 높았고, 또 웅장했다.
“네, 네가 이끄는 단체가 이 정도라고?”
“전국 가입 인원이 20만, 그중 레벨 30 이상인 사람이 5만 명이 넘어.”
“헐?”
“그리고 일본에도 빠르게 성장 중인 지부가 있고, 이번에 러시아와 몽골에도 우리 협회의 지부가 생길 예정이야.”
철원에 갇혀 지낸 그들에게는 쉬이 믿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레벨 75를 달성한 윤시아의 팀을 소개해 주고, 협회 본부를 바쁘게 오가는 레벨 60 이상의 간부들만 백 명을 가뿐히 넘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와, 우린 저렙이었네.”
“너희 팀 정도면 훌륭하지, 협회의 케어를 받으면 금방 최상위권이 될 수 있어.”
이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철원이라는 제한된 필드를 누비며 활동한 것치고 그들 정도의 수준이면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진짜?”
“당연하지,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충분히 지원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오! 땡큐!”
그리고 내가 달콤한 꿀을 제시하니, 시나리오 조각 1번 보유자 오기석의 팀은 결국 협회 가입을 결정해 버렸다.
이어서 나는 쐐기를 박듯이.
“우왁! 이거 뭐야?”
그들에게 먹고 마시고 놀라며, 이벤트 상점표 출장 뷔페 호출권을 사용해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진수성찬에 그들의 눈은 완전히 돌아가 버렸다.
“협회 가입을 축하한다. 자유롭게 즐겨.”
“오오오!”
아마 오기석 일행에게 사냥꾼 협회는 별천지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