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151화 (151/273)

151화 마경의 입구 (2)

똑같은 생김새의 외길.

똑같은 몬스터의 등장.

똑같이 반복되는 전투.

덕분에 길종혁과 최공찬 일행은 점차 시간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감각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시간을 착각하는 일은 없었다.

세상엔 시계라는 훌륭한 물건이 있으며, 심심할 때마다 몬스터에게 점령당한 백화점을 터는 게 사냥꾼인 만큼, 명품 오토매틱 시계가 기본 옵션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시간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환경 속에도 이들은 혼란을 일으키는 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뭔가 점점 더워지는 느낌 아냐?”

“그렇죠? 저만 그런 거 아니죠?”

하지만 혼란이 없단 것뿐이지, 이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마경의 입구’ 필드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상하다, 분명 체온 조절 기능이 있는 망토를 착용하고 있는데…….”

때문에 초반 두둑한 보상에 흥을 보이던 사람들도 점점 사냥을 반복 노가다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돌아가긴 뭐 했다.

사냥의 난도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니고, 보상도 후했으니까.

“뭐, 뭐지? 몸이 무거운 듯한…….”

그들은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지 않아 이상함을 감지했다.

“혹시 어제 내부를 탐색할 때도, 이랬나요?”

“아니, 이런 이상한 현상은 없었어.”

김 군의 물음에 길종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와 다른 이상 상황의 발생.

그제야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고, 결국 길종혁은 이대로 탐색을 진행하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냥, 돌아가자. 분위기가 이상해.”

“네, 그게 낫겠어요.”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전투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혹시라도 돌아가던 중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 귀환 스크롤을 찢을 수 있게 준비했다.

“크윽…….”

하지만 자신들이 표시한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음에도 이상 증상은 멈추지 않았다.

불길을 걷듯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몸이 무겁다 못해, 초인인 그들이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끝내, 길종혁은 귀환 스크롤의 사용을 지시했다.

“스크롤 찢어!”

귀환 스크롤이 귀한 아이템인 만큼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려 했으나, 이 이상은 참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찍!

-뚜둑!

길종혁의 지시에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보관 중이던 스크롤을 찢었다.

그리고 곧 푸른빛이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공간이동 이펙트에 모두 안도감을 표하며, 이어질 풍경의 변화를 기다렸다.

그런데…….

-쿠쿵.

“어?”

“어어어!?”

귀환 스크롤을 사용했으니 눈앞에 웨이포인트의 수정 기둥이 등장해야 정상이지만, 어째서인지 풍경에 변화가 없었다.

당황한 이들은 흠칫 몸을 떨었고.

그 순간, 세상이 빙글 돌며 천장과 바닥이 뒤집혔다.

지긋지긋한 수풀이 우거진 숲과 외길이 머리 위에 자리하고, 자신들의 발아래엔 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길종혁 일행이 바보같이 ‘어어?’ 하고 있을 때, 필드를 밝히던 발광석의 빛이 피처럼 붉게 물들며 이내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귀환 스크롤이?”

“공간이동 불가 지역 같은 거 아니에요?”

“그럼 뭔가 메시지라도 떴겠지!”

당연히 그들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고, 깜빡이던 핏빛의 세상이 점점 늘어지더니…….

-뚝!

이내 완전한 어둠에 물들었다.

“공찬이 형? 종혁 팀장님?”

그리고 어둠 속에 홀로 남게 된, 김 군은 황급히 허리춤을 뒤적이며 손전등을 꺼내 켰다.

“…….”

그러나 방금까지 함께였던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적막만이 감도는 칠흑의 공간이 김 군을 반겨 주었다.

‘이게 무슨?’

사냥꾼들은 가끔 착각을 한다.

변화한 세상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다 보니, 자신들은 이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전체에 비하면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새로운 시스템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 만큼, 어제의 상식이 내일까지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목소리가 안 나와!’

그런 의미에서 이런 곳이 새로 발견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지형이 변하고,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장소가.

‘주, 죽고 싶지 않아! 살려 주세요! 선생님! 선생니임!’

* * *

‘마경의 입구라니. 마경의 입구라니. 마경의 입구라니!’

절묘한 타이밍에 ‘마경’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이 등장했다.

덕분에 나는 한껏 흥분하며 탑승 중인 룡룡이의 비행 속도를 높였다.

[2번 조각 보유자 (강이솔)]

-구조를 위한 병력 지원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흥분은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새로운 사냥터 발굴도 중요하지만, 인명 구조가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강이솔의 메시지에 답을 주었다.

[11번 조각 보유자 (나)]

-네, 괜찮습니다. 일단 제가 먼저 살펴보고 지원 병력이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드릴게요.

[2번 조각 보유자 (강이솔)]

-알겠습니다. 부디 김 군이 무사했으면 좋겠네요.

귀환 스크롤을 가진 사람들이 해당 아이템을 쓰지도 못하고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니 괜히 여러 사람 끌어들이는 것보다 최정예 멤버로 밀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머지않아 우리의 시야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부지가 들어오고.

‘음산한 기운이 넘치는 장소군요.’

국회의사당을 내려 본 윌리아가 내게 텔레파시로 그리 전했다.

프리스트인 그녀의 감상이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장소인 모양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올림픽공원과 함께 사냥꾼 협회의 직할 도시 건설 후보 중 하나였는데, 이곳을 선택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국회랬나? 저 건물 뚜껑 진짜 열려?’

어디서 뭘 본 건지 출생 연도가 80년대 이상인 사람들이나 공감할 법한 대사를 던지는 시에나.

워낙 개드립이 잦은 인물이니, 나는 적당히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국회의사당 본청 앞에 룡룡이를 착지시켰다.

곧이어 룡룡이와 와일번, 와이번이 덩치를 작게 줄이고는, 인형처럼 윌리아의 어깨에 앉아 있던 멍멍이와 함께 정신없이 우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 댔다.

작은 펫들이 노니는 모습은 긴장감을 떨어뜨리지만, 이러다가도 명령하면 바로 브레스를 쏘아 대니,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다켈프.”

“네.”

그리고 윌리아의 명령에 타이트한 검은 복장의 미인이 등장했다.

진화를 하게 되면서 ‘이블 엘프’가 된 다켈프는 창백한 피부색에 흑발 적안의 외형을 갖고 있다.

이블 엘프가 흡혈귀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필드가 있다고 하니까, 찾아봐 줘.”

“알겠습니다.”

다켈프에게 내재된 흡혈귀 특성은 외형이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곧 핏빛의 안개가 되어 흩어졌는데, 이는 흡혈귀의 주요 스킬이었다.

안개 상태인 그녀는 한 번에 넓은 지역을 탐색할 수 있다.

‘마계의 엘프를 부리는 천사라니. 꽤 멋진걸?’

다켈프에게만 일을 맡길 수 없으니, 우리도 직접 탐색에 나섰다.

마경의 입구가 국회의사당 지하에 있다는 것은 길종혁이 남긴 기록으로 인해 알게 되었지만, 정확한 위치까지 표기되어 있진 않았다.

그래서 탐색이 필요했다.

“다켈프가 찾았어요!”

다행히 탐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정된 장소를 조사하는 건 아무런 정보 없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여긴?”

우린 ‘마경의 입구’라는 숨겨진 필드에 들어섰고.

외길이 길게 뻗어 있는 지하 숲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으으, 뭔가 꺼림칙한 장소네.”

시에나의 말대로, 해당 필드에 들어선 순간 예민한 내 감각을 무언가가 방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한 건 김 군네가 활동할 만한 수준의 장소는 아니네.”

등장하는 몬스터는 겨우 듀라한이지만, 이곳은 필드 자체가 특수하단 느낌이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죠.”

“네.”

그리고 우린 이동을 시작했다.

몬스터는 파티원들이 나설 필요 없이 펫들에 의해 알아서 정리가 되었다.

이곳 필드는 충분히 넓었기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펫들의 위용 앞에 듀라한과 올더 듀라한 따윈 한 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정신력 강화(상급)! 불굴의 의지(최상급)!”

윌리아가 정신력을 강화하는 스킬을 연이어 사용했다.

신규 스킬 불굴의 의지는 이무기를 잡고 얻은 최상급 스킬북 30권 중 하나다.

-화아악!

그녀의 스킬로 인해 은근히 거슬리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필드에 정신 이상을 일으키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윌리아의 짐작은 타당해 보였다.

어쩌면 김 군 일행은 이런 거에 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단순 무력 싸움과 달리 정신 공격에 대한 대비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음?”

한참을 걸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외길.

나는 그런 공간을 가만히 서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무언가 감각에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윌리아 님, 생추어리 부탁드립니다.”

“네, 생추어리(최상급)!”

생추어리 스킬 역시 이무기를 잡고 얻은 스킬로, 마력 회복 속도를 높여 주는 10평 남짓한 공간을 만든다.

이어서 해당 스킬의 범위 안에 선 나는 성검 칼립소를 웨폰 체인저로 소환하듯 꺼내 들고는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고고고고!

“에끄스 카리바!”

그리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에너지가 충만한 성검을 지면에 꽂아 넣었다.

-드드드드드드!

-끼아아아아악!

그러자 지면이 울퉁불퉁 부풀어 오르며 균열이 발생하고, 강력한 지진과 함께 정체불명의 비명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재밌네.”

나는 텅텅 빈 마력이 생추어리 스킬에 의해 빠르게 충전되는 것을 느끼며, 성검을 거두었다.

이어서 제3의 손으로부터 투명한 검신에 하얀 손잡이를 가진 검을 건네받았다.

[바리사다 / 한손반 장검 / 등급: 유일]

-손잡이와 코등이는 화이트 드래곤의 뼈와 미스릴로 만들고, 유리와 같은 검날은 순수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었다.

-가볍지만, 매우 뛰어난 강도를 갖고 있으며, 검이 파괴되더라도 오래지 않아 원래의 상태를 복구한다.

-근접 전투 스킬 공격력 100% 증가

-순발력+6, 마력+6

-자체 스킬: 투과

내가 가진 극강의 검 바리사다.

이 검의 무서운 점은 바로 스킬이다.

[투과 / 극상급 스킬 / 액티브]

-3초간 바리사다에 투과 효과가 부여된다.

-투과 효과는 방어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사물과 스킬을 무시하며, ‘본체에만 직접 타격’을 준다.

-해당 스킬의 공격을 극복하는 방법은 직접 몸을 날려 피하는 것뿐이다.

-소모 마력: 10

그리고 곧 마력 10이 채워진 것을 느낀 나는 바리사다의 내장 스킬인 투과를 사용했다.

다른 장비들이 그런 것처럼 바리사다도 3단계까지 강화가 완료된 상태이며, 강화는 내장 스킬의 위력을 높여 준다.

3강이 되면 내장 스킬의 위력이 2배로 상승하는데, 바리사다는 강화된 스킬의 효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 적용될 거라 생각한다.

그 증거로.

-끼아아아아아악!

-쿠쿠쿵!

성검을 꽂았던 지면 옆에 재차 바리사다를 찔러 넣자 소름 끼치게 울려 퍼지던 비명은 마치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듯했다.

투과 효과로 인해 바리사다는 아무것도 걸리는 것 없이 쑤욱, 땅속에 연거푸 파고들었다.

[레벨 130의 네임드 벤시 카밀라를 토벌하여 경험치 25,000,000을 획득했습니다.]

[벤시를 최초로 토벌하여 경험치 5,000,000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실소를 흘려야 했다.

“인제 보니, 듀라한은 눈속임이었군요?”

“그런 것 같아요.”

즉, 진짜는 땅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뜻.

네임드 벤시가 인간을 쫓아다니며 정신 공격을 하고.

이 필드는 그런 벤시를 보조했다.

-그그그극!

그 증거로 벤시가 토벌되자,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며 지형에 변화가 생겼다.

마치 프리즘처럼 반짝이는 허공에 균열이 생기더니, 불길에 휘감긴 거대한 문이 등장한 것이다.

“김 군아!”

더구나 그런 거대한 문 앞에서 좀비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수백 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내가 찾던 김 군 일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윌리아 님!”

내 부름에 윌리아는 급히 완전 회복 스킬과 정신력 강화 스킬을 사용했다.

치유의 헤일로 옵션으로 회복 스킬의 효과가 2배가 된 윌리아.

덕분에 완전 회복만으로도 김 군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서, 선생님?”

그는 어찌 된 상황인지 몰라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윌리아는 김 군에 이어 나머지 사람들을 치료했다.

“처, 천사와 엘프?”

“여긴? 당신들은 누구요?”

그런데 치료된 사람 중엔 길종혁과 최공찬 파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모를 초급 사냥꾼들과 아예 대재앙 직후에 빠졌는지, 정장 차림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재앙이 시작되고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아직 살아 있다고?’

일단 이들은 안전 구역으로 이동시켜야 할 것 같다.

나는 불길에 휩싸인 문을 한 번 더 바라보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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