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마경 (1)
귀신 같은 서백호의 칼솜씨에 상처 하나 없이 제임스의 앞머리만 잘려 바람에 흩날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깔끔하게 썰려 버린 머리카락이 아니다.
유일 등급의 방패 이지스라는 극강의 방어구와 그 장비의 내장 스킬로 전신을 보호했음에도 어째서인지 앞 머리카락이 썰렸다.
이는 그의 방어 능력이 맥없이 꿰뚫렸음을 의미했다.
제임스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서백호 일행이 떠나 버린 방향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임스…….”
아예 전투가 성립되지 않았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깔끔한 패배.
충격을 받은 제임스의 모습에 동료들은 안타까움과 함께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미국 최강의 사냥꾼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만큼 자존심도 강하고,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그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으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큽!”
“푸흐.”
그런데 불편한 마음과 별개로.
동료들은 바보처럼 실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 제임스지만, 일직선으로 베인 그의 앞머리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존재감을 뽐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만했던 모양이야. 더욱 정진하자.”
그리고 한 국가의 대표 사냥꾼답게 충격적인 완패에도 마음을 추스른 제임스가 몸을 일으켜 동료들에게 그리 말했다.
그런 다짐과도 같은 대사에도 제임스의 앞머리에 시선이 꽂힌 동료들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동료들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고, 제임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나는 제임스다! 미국의 방패, 캡틴 오브 아메리카, 제임스!”
* * *
[그래서 어땠어?]
룡룡이를 타고 원래의 장소로 이동하던 중.
시에나의 짤막한 텔레파시가 전해졌다.
그게 좀 전 미국인과의 대련에 대한 소감을 묻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챈 나는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력은 나쁘지 않은데, 장비와 스킬의 능력에 너무 의존하는 느낌이네요.]
[그런 것치곤 너도 마지막에 바리사다의 투과 스킬을 썼잖아?]
[그건 그냥 빨릴 끝내려고 그런 거고요.]
마지막에 상대가 알 수 없는 방어 스킬을 쓰긴 했지만, 바리사다의 투과가 없더라도 이기는 건 변함이 없었을 거다.
다만 공략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유일 등급으로 보이던 방패의 내장 스킬이었겠지. 형태를 보면 극강의 방어력이나 반발력을 전신에 부여하는 거 아니었을까?’
제임스의 반응 속도는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의외로 인간과의 전투 경험은 적어 보였다.
미국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의외로 평화로운 모양이다.
‘뭐, 미국은 비상 체제의 정부와 군대가 힘을 합쳐 국민들을 잘 보호하고 있다고 했으니…….’
‘진실의 눈’ 스킬에 의하면 앞서 나누었던 대화에서 적어도 제임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나와의 대화에서 거짓말로 일관했다면, 저렇게 사지 멀쩡하게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임스랬나? 윤시아랑 비교하면 어느 수준이야?]
윤시아는 이제 막 레벨 90을 달성했다.
그런데 미국의 뉴욕팀들은 그런 윤시아보다 레벨이 18이나 높았다.
솔직히 마경에 나를 제외하고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이 입장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만큼, 놀라운 상황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윤시아 씨가 레벨과 장비만 받쳐 주면 더 나을 것 같네요.]
윤시아는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인물이다.
더불어 근접 전투 능력도 나를 제외하면 비교 상대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윤시아라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냥꾼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윤시아가 밀리는 것이 있다면, 뉴욕팀처럼 국가 수준의 푸시를 받는 팀을 레벨로 따라잡긴 힘들다는 걸까?
‘아무래도 윤시아 팀을 비롯한 상위 팀을 더욱 밀어줘야겠어. 나도 사용하지 않는 장비는 아끼지 말고 물려주도록 하고.’
뉴욕팀을 만나게 되면서 나를 제외한 사냥꾼 협회 상위 팀의 실력도 더욱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마경의 탐색을 시작하고 약 2시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드디어 웨이포인트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와…….”
일반적인 웨이포인트의 크기를 가볍게 넘어서는 거대한 수정.
그 웨이포인트에 손을 얹자.
[마경 17구역이 웨이포인트에 등록되었습니다.]
특정 지명이 아닌, 마경+숫자가 쓰인 주소가 웨이포인트에 등록되었다.
마경은 전부 이런 식일까?
어딜 봐도 비슷해 보이는 지형부터 시작해 여러모로 착각을 일으키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다.
‘마경을 마계의 길목 정도로 여겼었는데, 그 생각을 지워야겠군.’
마경 자체로도 훌륭한 필드다.
지금까지 이곳에 오면서 상대한 지상, 공중 몬스터들의 레벨은 대부분 100이 넘고, 개중엔 레벨이 150에 육박하는 놈들도 있었다.
굳이 마계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마경에서 사냥을 이어 가도 될 듯했다.
다만 지금까지 지나온 구역엔 한 가지 몬스터가 집중적으로 나오는 사냥터가 없고, 다양한 몬스터가 혼재되어 나오는 구역뿐이라 사냥터 발굴에는 조금 더 조사가 필요했다.
[1층 화장실]
[2층 목욕탕]
[3층 마경 상점]
[4층 호텔]
바깥세상이 그런 것처럼 마경의 웨이포인트도 안전 구역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안전 구역의 면적이 바깥은 기본 1,000평이 넘는 것에 비해 이곳은 반의반도 안 될 만큼 매우 좁았다.
안전 구역 내 건물도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고.
마치 커다란 고속 도로 휴게소만 보다가 국도 휴게소에 온 느낌이다.
‘건물 내부의 통로가 이거 하나야? 나중에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붐비게 되면 싸움 나기 딱 좋아 보이네.’
나는 좁은 계단을 타고 마경 상점에 입장했다.
혹시라도 뭔가 특별한 것을 팔지 않을까 싶어서.
잠시 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깥보다 훨씬 작은 규모를 가진 상점이었다.
‘꽤 알차네? 중요한 건 다 팔아.’
보통 안전 구역 상점은 지정된 3가지 품목의 물건만 판매한다.
예를 들면 생활용품, 주방용품, 건축 자재, 공구, 가구, 식품 이런 식으로 분류된 항목에서 3가지 품목을 랜덤으로 파는 거다.
그래서 원하는 물건이 많을 경우엔 그만큼 여러 안전 구역을 순회해야 한다.
하지만 마경 상점은 품목 구분 없이 알짜배기들을 한데 모아 판매하고 있었다.
물론, 사냥꾼 협회도 모든 상품을 진열해 파는 마트를 운영 중이고, 이 마트에 비할 규모는 아니었지만, 마경의 상점은 동네 할인점 수준의 규모는 되었다.
그렇게 마경 상점의 취급품들을 자세히 살폈는데.
[소금 / 10코인]
[설탕 / 100코인]
[후추 / 100코인]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어?”
그건 바로 조미료였다.
일반 안전 구역 상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귀하디귀한 식료품.
식사에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선 조미료가 필수인데, 이 귀한 조미료가 바닥을 보이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타이밍에 등장해 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것들만 가져다 팔아도 큰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을 터이다.
‘뭐, 나는 장사로 돈 벌 생각이 없으니까.’
대충 운송비만 받고 마트에 도매로 넘겨야겠다.
“백호 님!”
조미료의 발견 이후, 또 다른 무언가가 없을까 싶어 상점을 살피는데, 윌리아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이거 보세요!”
“오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녀에게 향했더니.
[성장 촉진 비료 10kg / 10코인]
-농작물의 성장 속도를 3배 높여 준다.
[성장 촉진 사료 10kg / 10코인]
-가축의 성장 속도를 3배 높여 준다.
이런 걸 파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몬스터의 사체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당장 허기는 채우게 됐지만, 언제까지 몬스터 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촉진제들은 생존 능력은 물론, 삶의 질을 높여 줄 매우 중요한 아이템이다.
마경의 가치는 레벨 높은 몬스터의 존재만이 다가 아니었다.
***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사냥꾼 협회로 인해 남부 패밀리의 활동엔 여러 제약이 생기고 있었다.
그들이 딱히 뭔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협회의 중화 청년단 정리 이후, 남부 패밀리가 알아서 눈치를 보며 운신의 폭을 좁혔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룡대로부터 등을 돌려, 독자 노선을 걷던 2작사 내부에선 친정부 세력이 힘을 키우기 시작해 남부 패밀리의 미래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떠한 변화가 없다면 사냥꾼 협회에 흡수되는 것이 정해진 순리인 상황.
“뭐? 동맹?”
그런데 이런 남부 패밀리에 상황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네, 그렇습니다. 일본 서부 연합 측에서 대만과 저희 남부 패밀리의 힘을 합친 3자 동맹을 결성하자 제안해 왔습니다.”
“흠…….”
바로 일본 서부(오키나와+규슈)연합에서 동맹을 요청해 온 것이다.
만약 3자 동맹이 성사된다면 더 이상 사냥꾼 협회의 눈치를 보며 굽히고 다니지 않아도 될 터.
물론, 감히 협회의 상대는 될 수 없지만, 적어도 활동의 제약은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나쁘진 않은데,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야.”
하지만 남부 패밀리의 리더 김시우는 신중한 인물.
당장 도움이 되겠다고 바로 ‘예스’를 외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런 제안이 들어온 이유가 뭐지?”
“아무래도 사냥꾼 협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냥꾼 협회?”
“네, 사냥꾼 협회의 일본 지부가 급격히 세를 불리면서 서부 연합이 흔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남 일 같지 않은 상황.
남부 패밀리와 입장이 비슷했다.
심지어 서백호가 활동하는 본진이 아닌 지부에 흔들리는 처지라니, 어떻게 보면 남부 패밀리보다 더욱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본의 서부 연합이 많이 뒤떨어지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대만 전체와 비교해도 크게 꿇릴 것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사냥꾼 협회의 일본 지부가 비정상적인 확장세를 보이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하의 물음에 김시우는 고민했다.
하지만 타인을 통해 들은 제안에 답을 하는 건 경솔하다고 판단하며,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각 단체의 대표들을 직접 만나 보고 정하는 게 낫겠지. 오키나와에서 만나자고 해 봐.”
“네, 알겠습니다.”
김시우는 지난달 생존 이벤트로 오키나와와 대만을 방문했던지라, 양국 대표와의 만남을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양국의 대표도 앞선 생존 이벤트로 김시우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지라, 신중한 그의 태도에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바로 만남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남부 패밀리와 일본 서부 연합, 대만팀의 주축 멤버들이 오키나와에 모였다.
“제가 보기엔 지금 극동에서 가장 무서운 세력은 중국 쪽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에 있는 사냥꾼 협회죠. 그들은 한반도를 넘어 일본과 중국, 러시아까지 세력을 뻗고 있습니다.”
“홍콩 라인을 통해 전해 받은 소식에 의하면,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신 상하이방 멤버들도 사냥꾼 협회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동맹을 맺고 같이 싸운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부끄럽게도 일본은 사냥꾼 협회에게 국토의 8할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사냥꾼 협회 일본 지부장 다나카는 쇼군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냥꾼 협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 인지하게 되었다.
더불어 공통된 의견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것.
“그렇다고 사냥꾼 협회를 적대해선 안 됩니다. 그들이 우리를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목이 베이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요.”
“중국에서만 중화 청년단의 주력 사냥꾼 수만 명을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냉정히 말해서 그들과 맞서면 우린 순식간에 붕괴할 수밖에 없어요.”
“당장은 굽히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추후를 도모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
자신들의 결성 목적이 사냥꾼 협회 때문이지만, 그들을 적대하기 위함은 아니란 것이다.
“모두 말이 잘 통하는군요.”
“아무래도 우려하는 부분이 같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세 세력이 힘을 합치고 적극적으로 교류를 이어 가면 더욱 빠른 성장이 가능할 겁니다.”
미래를 대비한 협력.
뜻이 모이니, 남부 패밀리와 일본의 서부 연합, 대만팀의 동맹은 자연스레 체결되었다.
“동맹의 명칭은 사냥꾼 협회를 염두에 두기보다 서로를 돕는단 의미에서 교류회라 칭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3자 교류회’란 단체가 탄생했다.
겉으로는 서로의 성장을 돕기 위한 협력 단체로 보였으나, 사냥꾼 협회의 팽창으로부터 각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동맹 단체였다.
그리고 그 동맹의 리더는 남부 패밀리의 김시우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