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예상 밖의 이벤트 (3)
[1라운드 통과]
[30점을 획득했습니다.]
“에게?”
검을 역소환하듯 웨폰 체인저에 수납한 나는 1라운드 통과 점수를 보곤 미간을 좁혔다.
참가 인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지만, 겨우 30점밖에 안 주다니.
게다가 재수 없게 나와 붙는 바람에 1라운드에서 탈락한 프랑스인은 누가 봐도 지난달 웨이브 이벤트에서 크게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대진표가 꼬여 점수 획득에 실패했으니 얼마나 속이 쓰릴까?
하지만 뭐…….
내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어진 메시지를 터치했다.
[1라운드 대전이 조기 종료되었습니다. 대기실로 나가시겠습니까?]
그러자 다시금 순백의 공간으로 옮겨졌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수많은 인파로 붐비던 그 공간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자판기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거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대전 중이라 그런 모양이다.
[대전 전체 종료까지 09:57]
대기실 허공엔 타이머가 떠 있었다.
아마 저 시간이 끝나고 나면 예정대로 20분간의 휴식이 주어질 터.
대전을 순식간에 끝낸 나는 다음 대전까지 거의 30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 다행이다. 대전이 끝나고 대기실에 나왔을 때 뿔뿔이 흩어지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네.”
내가 대기실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서 윌리아와 시에나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의 머리 위엔 1라운드 통과자를 뜻하는 건지, 녹색의 숫자 1이 떠 있었다.
하나둘 나타나는 주변에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붉은색의 숫자 1이 떠 있는 것이 아마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다음 라운드가 시작될 때까지 자유 시간인 거잖아요?”
“그럼 해야 할 일은 하나죠.”
“옳소!”
우린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금 자판기를 털었다.
-덜컥. 쿵. 덜컥. 쿵.
식품은 인벤토리에 보관하면 상하지 않는다.
때문에 언제 또 이 자판기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만큼, 우린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니 말이다.
“저, 저 사람들 대체 뭐지?”
머리에 붉은 숫자를 달고 있는 탈락자들은 녹색 숫자를 단 우리가 아까에 이어 다시금 자판기를 터니 놀랄 뿐이었다.
“어!? 협회장님!”
그러다 자판기 털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드니, 머리 위에 녹색 숫자를 단 윤시아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대전 시작 후 1분이 넘지 않았다.
“하하, 나머지 세 놈이 합공을 해 와서 당황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합공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1분을 넘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윤시아의 등장을 크게 반겼다.
이유는 단 하나.
“뭐 하세요?”
“네?”
“터세요.”
나는 윤시아에게 금빛 코인 하나를 건네며 자판기에 턱짓을 했다.
얼떨결에 코인을 건네받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1,000,000코인]
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코인의 숫자를 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자판기에서 2,000개의 물건을 살 수 있는 금액.
자판기에 코인 넣고 버튼 누르고 물건이 나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어서 마침 손이 더 많으면 좋겠다고 여기던 차에 잘 나타났다.
-덜컥. 쿵. 덜컥. 쿵.
그렇게 자판기 셔틀에 윤시아가 추가되었다.
“악! 하필 그 검을 못 막아서!”
“젠장, 내가 1라운드에 탈락하다니.”
“하하! 이겼다!”
-웅성웅성.
시간이 지날수록 대기실엔 점점 사람들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패배를 분해하고, 누군가는 승리를 기뻐했다.
다들 대전 이벤트에 이런저런 다양한 감정을 쏟아 내는 와중에…….
머리 위로 승리 표식을 달고 있는 우린 자판기만 털고 있으니, 자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밌는 건.
“어!? 협회장님!”
-덜컥. 쿵.
“와! 협회장님이다!”
-덜컥. 쿵.
머리 위에 승리 표식을 단 자판기 셔틀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라운드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 * *
[2라운드 통과]
[50점을 획득했습니다.]
[3라운드 통과]
[50점을 획득했습니다.]
.
.
.
[8라운드 통과]
[300점을 획득했습니다.]
스페인에서 마드리드팀의 라이벌이자, 대재앙이 발생하고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유럽연합 사냥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바르셀로나팀의 리더 ‘알레한드로 가르시아 페레즈’는 레벨 90의 사냥꾼답게 파죽지세로 승리를 쌓아 갔다.
물론,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상대들의 수준이 높아져 쉽지 않았다.
덕분에 8라운드에서 거의 10분을 꽉 채워서야 마지막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어쨌든 승리는 승리.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엔 8라운드 통과자란 표식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전 세계 사냥꾼들이 참여한 대전에서 512강(9라운드)에 진출했단 뜻이다.
“역시 알레한드로라면 잘 싸울 줄 알았어.”
“하하, 그래도 우리 파티 중엔 7라운드 이하에서 떨어진 사람이 없네, 너희도 전부 잘 싸웠어.”
현재 전 세계 생존자들이 20억 정도였으니, 4백만 분의 1의 강자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만큼 알레한드로의 동료들은 그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난 창을 무기로 쓰는 이상한 동양인 여자 만났는데, 진짜 잘 싸우더라. 계속 자판기, 자판기 중얼거리면서 덤비는 게 무섭더라고. 무슨 주문 같은 건가 봐.”
“자판기? 일본인인가? 걔넨 재팬을 자판이라 말하던데.”
“그럴지도.”
알레한드로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첫 번째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냥꾼인데다가 유럽연합팀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으니 말이다.
“어? 피에르?”
“알레한드로?”
그렇게 자신을 칭찬하는 동료들에 둘러싸여 웃고 떠들던 알레한드로는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아는 척을 했다.
그의 이름은 루이 피에르, 프랑스 제일 사냥팀의 부단장이었다.
유럽연합팀으로 몇 차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인물인 만큼, 그의 강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적이 궁금해 고개를 든 알레한드로였지만, 이내 표정이 굳고 말았다.
[1]
“어? 너?”
피에르의 머리 위에는 붉은 숫자 ‘1’이 떠 있었다.
이를 본 순간 알레한드로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그건 1라운드 탈락자를 의미하는 표식이었으니까.
“하하, 웃기지? 나 1라운드도 통과 못 했어.”
“어, 어째서?”
알레한드로는 물론 그의 동료들도 의문을 표해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피에르의 이야기에 알레한드로는 표정을 구겼다.
“괴물을 만났거든.”
“괴물?”
“등에 커다란 깃발과 검 한 자루를 띄워 다니는 동양인이었어. 그가 달려들자 단 일격을 막아 내질 못하고 목이 베이고 말았지.”
“네가 공격 한 방을 버티지 못했다고? 대체 상대가 무슨 공격을 했길래?”
“그냥 칼질.”
“뭐?”
“도약 스킬로 민첩성 더한 거 빼면 공격 스킬은 쓰지도 않더라.”
1라운드부터 강자를 만난 건 안타까운 불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에르가 그토록 허무하게 패배하다니, 알레한드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 참. 경기 시작 전에 그 남자 수준에 맞춰 능력치를 보정 받았거든? 그때 능력치가 얼마나 올랐는지 알아?”
“얼마?”
“220. 대체 그 남자 레벨이 몇인 거지?”
“우, 웃기지 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피에르의 레벨이 그와 비슷함을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알레한드로는 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서 발끈했다.
그러나 해탈한 듯 보이는 피에르는 피식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목이 떨어지는 경험은 진짜 끔찍하더라. 그 남자 만나면 그냥 기권해. 그건 아무도 못 이겨.”
그리고 그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대기실을 목적 없이 걸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레한드로는 황당함을 표했다.
[잠시 후, 9라운드(512강)가 시작됩니다.]
휴식 시간인 20분이 지났는지, 마침 다음 대전이 잡혔다.
“피에르 말은 신경 쓰지 마.”
“맞아. 지금은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할 때야.”
“오케이, 땡큐.”
알레한드로는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경기장으로 이동되었고.
[스킬로 강화된 능력치가 초기화됩니다.]
[유저들의 능력치를 확인.]
[대한민국의 서** 님을 기준으로 능력치가 최종 보정됩니다.]
-미국 *** 제임스 님의 능력치가 168 상승합니다.
-스페인 ***가르시아*** 님의 능력치가 215 상승합니다.
-대한민국 강** 님의 능력치가 232 상승합니다.
[변화된 능력치를 신체가 빠르게 적응합니다.]
“어?”
상대를 마주한 순간 알레한드로는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이유는 바로 피에르가 말한 그 괴물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등 뒤에 깃발과 새하얀 검 한 자루를 장식처럼 띄워 다니는 남성.
‘이런 미친.’
더구나 앞서 피에르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 주듯, 엄청난 양의 능력치가 오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헉!”
“악! 젠장!”
그런데 상대를 보며 당황하는 건 피에르에게 경고를 받은 알레한드로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의 안색 역시 창백해져 있었다.
“어? 제하(제임스 하이란 뜻)!”
그 괴물 남성은 미국인에게 알 수 없는 인사를 건네고.
“하필 강이솔 본부장님도 같은 조네요?”
같은 국가 소속인 강이솔을 향해서도 아는 척을 했다.
‘젠장, 저런 괴물만으로도 벅찬데.’
아무래도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그 괴물의 지인으로 보였다.
괴물(서백호)만으로도 상대하기 힘든데, 자칫 3:1의 상황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 하고 알레한드로는 걱정해야 했다.
“항복!”
“항복이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카운트다운이 끝이 나고 대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제임스와 강이솔이 비명처럼 항복을 외쳤다.
“???”
“아, 이런…….”
당연히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국인 제임스는 굉장히 강해 보였다.
그런데 도망치듯 기권해 버리니, 알레한드로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꾸욱.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지 않았다.
눈앞의 인물은 틀림없이 자신보다 강할 테지만, 전투에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알레한드로는 이미 충분히 상대를 경계하고 있으니, 피에르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은 그는 자신의 애병을 강하게 움켜쥐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반갑습니다.”
그런 알레한드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을까?
상대는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 왔고,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직후.
-팟!
기습을 가하듯 블링크 스킬을 사용해 그의 배후로 돌아갔다.
‘섬광일섬.’
이어서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가진 스킬 중 가장 빠르면서 강력한 대인 공격 스킬을 사용했고, 세이버 형태의 외날도가 푸른 빛을 토하며 상대의 목을 베어 갔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찰나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빛과 같은 속공.
-촤륵!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알레한드로의 검은 베어야 할 목을 베는 게 아니라, 서늘한 마찰음을 만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의 몸은 기우뚱 균형을 잃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분명 보정 효과로 능력치가 비슷할 텐데도 상대의 솜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알레한드로는 한 걸음을 내디뎌 힘겹게 자세를 곧추세우려 했으나.
-훅!
어디서 불어온 건지 모를 서늘한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
머지않아 알레한드로는 자신의 목이 베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9라운드(512강) 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컥! 허억! 허억!”
“어? 알레한드로?”
곧이어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알레한드로는 급히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다행히 목은 잘 붙어 있었다.
“서, 설마 벌써 패한 거야?”
알레한드로는 고개를 들어 대전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고작 5초가 지난 상태였다.
“하하.”
덕분에 알레한드로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자만하고 있었음을.
“엿 같네. 세상은 넓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건가?”
* * *
그야말로 파죽지세.
이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9라운드(512강)가 끝난 상태에서 서백호와 그의 파티인 윌리아, 시에나뿐만 아니라, 무려 25명의 한국인이 10라운드(128강)에 진출했다.
전 세계 사냥꾼이 참여한 대회에서 살아남은 인원 중 2할이 한국인이란 건, 대한민국은 물론, 타국 입장에서도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이라면 모를까, 한국은 인구도 그리 많은 나라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능력치를 보정 받던 거 보면, 그 한국인은 분명 나보다 저렙일 텐데?”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
“내가 마주한 한국인은 나보다 레벨이 높았어.”
능력치 보정 없이 대전이 진행되었다면 일부 한국인들은 레벨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겠지만, 능력치가 보정된 덕에 위로 올라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즉, 레벨을 배제하고도 한국인들의 기본적인 전투 실력 자체가 높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건 일찍이 일본에서 인간 사냥꾼들을 토벌하고, 중국에서 인간끼리의 전쟁을 경험해 본 게 득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와, 우리나라 사냥꾼들 대단하네.”
“10라운드에 진출한 한국인 대부분이 사냥꾼 협회 소속인 거지?”
“그렇대요.”
덕분에 의욕 없이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많은 한국인에게 대전 시청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사냥꾼 협회 협회장과 그 동료인 천사와 요정은 급이 다르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직 우린 시작을 안 한 거뿐이니까.”
뿐만 아니라 서백호를 포함한 사냥꾼들의 화려한 전투는 단단히 사람들을 홀렸다.
시작은 늦었지만, 사냥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시스템이 굳이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전을 시청할 수 있게 만든 이유도 아마도 이 때문이라.
“10라운드 시작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이, 남은 경기에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