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무서운 나라 (1)
대한민국 사냥꾼 중 일인자는 경쟁의식조차 우습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서백호다.
그런 서백호 다음으로 강한 인물을 꼽으라면 당연히 그의 파티원들을 나열할 수 있겠지만, 시에나는 물론 윌리아까지 NPC였단 사실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연히 협회 내 2위 파티의 리더인 윤시아를 2인자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윤시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NPC란 이유로 서백호의 파티원인 윌리아, 시에나를 순위에서 배제할 이유가 없고, 더욱이 그들이 부리는 펫보다 자신이 강하다고 볼 수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사냥꾼 협회에서 협회장님의 파티가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어. 그에 비하면 나와 내 파티는 유의미한 수준의 존재감을 갖고 있을 뿐이야.’
보통은 너무 높은 산이 앞에 버티고 있으면 좌절한 채 오르는 걸 망설이기도 하지만, 다행히 윤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서백호를 따르며 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바로 뒤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고, 그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최근 윤시아의 성장 폭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최도겸, 김현수 파티 등을 크게 앞지르고 있는 상황이다.
“윤시아 씨?”
덕분에 그녀는 이번 생존 이벤트인 토너먼트 방식의 대전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각국의 강자들을 만나더라도 흔들림 없이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했고, 3:1의 상황이 벌어져도 3분을 넘기지 않고 적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그런 그녀가 10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영국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
그리고 남부 패밀리의 리더이자 최근 서일본, 대만과 함께 결성한 ‘3자 교류회’의 회장이 된 김시우였다.
[유저들의 능력치를 확인.]
[대한민국의 윤** 님을 기준으로 능력치가 최종 보정됩니다.]
-영국 *** 스튜어드 님의 능력치가 15 상승합니다.
-대한민국 김** 님의 능력치가 28 상승합니다.
-중국 장** 님의 능력치가 37 상승합니다.
[변화된 능력치를 신체가 빠르게 적응합니다.]
윤시아는 자신을 보며 당황하는 김시우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넸다.
최근 사냥꾼 협회 내에서 김시우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녀는 김시우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압도적 강자인 서백호를 상대로도 쉬이 굽히지 않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최근 그의 방식을 사냥꾼 협회 측 사람들이 거슬려 한다더라도, 그 나름대로 자신의 세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방법을 강구한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서백호의 지시가 떨어지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를 베겠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갖고 있지 않았다.
“새, 생각보다 레벨 차이가 나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김시우는 생각이 달라 보였다.
그는 윤시아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협회장님에겐 패배하더라도 그 휘하의 사람들에게까지 패하고 싶진 않겠지.’
윤시아가 김시우의 입장을 봐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망신을 주는 일은 없게끔 신경 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백호가 남부 패밀리의 성장을 기꺼워하는 것처럼 그녀도 대국적으로 생각하면 남부 패밀리의 성장이 대한민국을 위한 거라 여겼다.
‘어차피 그들이 성장한다고 해도 협회장님이 계시는 한 우리의 상대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윤시아와 당황한 김시우 사이에 영국인 남성이 끼어들었다.
“라운드가 올라가니, 같은 나라 사람끼리 만나기도 하는군요.”
그는 아깝게 되었다며 쓰게 웃어 보였다.
라운드가 진행되는 경기장 내에선 언어가 자동으로 통역되는 만큼, 의사소통이 원활했다.
윤시아는 대전 시작 전, 보정된 능력치에 적응하는 5분의 대기 시간 동안 대화를 시도해 오는 사람들을 지금까지 몇 번인가 봐 왔기에 잠자코 영국인 남성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어찌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혹시 두 분이 연합을 맺으실 생각이라면 부득이하게 우리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전투 방식을 정하자는 의도가 깃든 이야기.
그에 윤시아는 심플하게 말했다.
“누군가와 편을 짤 생각 없습니다. 그와는 같은 세력 소속도 아니고요.”
영국인 남성은 김시우를 바라보았고, 그도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영국인 남성도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그럼 자체적으로 조를 짜서 1:1로 싸우고 승리한 사람끼리 또 1:1로 싸우기로 하죠. 어떻습니까?”
그의 제안에 윤시아와 김시우, 중국인 여성도 동의했다.
영국인 남성은 준비성 좋게, 품에서 준비해 온 트럼프 카드 4장을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킹과 에이스가 두 장씩 있습니다. 같은 패를 뽑는 사람끼리 싸우기로 하죠. 저는 남는 카드를 가져갈 테니, 각자 한 장씩 뽑으십시오.”
사람을 이끄는 게 익숙해 보이는 영국인 남성의 깔끔한 진행에 모두가 불만 없이 카드를 한 장씩 뽑아 들었다.
결과는 윤시아와 김시우가 에이스를 뽑고, 영국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이 킹을 뽑았다.
“이런, 아쉽게 되었군요.”
한국인끼리 먼저 붙게 된 걸 영국인 남성은 안타깝다고 생각했지만, 윤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라운드를 통과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누굴 상대하든 이겨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사람은 경기장을 임의로 반으로 나눠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3]
[2]
[1]
그리고 머지않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대전 시작]
윤시아를 포함한 네 사람은 대전 신호에 맞춰 각자의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콰아앙!
“큭!”
첫 공격은 스킬 없는 노멀 공격.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윤시아는 가벼운 찌르기로 김시우의 기량을 살폈다.
정직하게 날아드는 창.
하지만 김시우는 갑자기 창의 길이가 여의봉처럼 길어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물론, 그는 남부 패밀리 제일의 기재인 만큼 윤시아의 공격을 깔끔하게 방패로 막아 냈지만, 창에 실린 힘을 이겨 내지 못한 채 뒤로 두 걸음을 밀려나고 말았다.
윤시아는 그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고쳐 쥐었다.
그런데 김시우는 그런 윤시아를 보며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단 일합이지만, 느낀 것이다.
윤시아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단 것을.
“갑니다.”
“네…….”
더는 탐색전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스킬을 머금은 공격이 연거푸 날아들었다.
김시우는 검과 방패를 함께 쓰는 기본적인 전투 스타일을 갖고 있었지만, 윤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은 변화무쌍했으며, 한 방 한 방의 파괴력이 상식을 넘어섰다.
‘젠장! 접근할 수가 없어!’
덕분에 김시우는 윤시아에게 한 걸음도 접근하지 못하고 방어 위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합은 늘어 가지만, 그 사이엔 엄청난 기량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창에 대한 대부분의 사냥꾼이 가진 인식은 이렇다.
‘긴 리치를 활용해 안전하게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한 초보용 무기.’
때문에 전투에 익숙해지면 대부분 공방 밸런스가 좋은 한손검+방패로 바꾸는 게 일반적.
그래서 고레벨의 사냥꾼 중엔 창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콰아앙!
하지만 김시우는 창에 대한 인식이 강제로 바뀌는 중이었다.
제대로 창을 쓸 줄 아는 고레벨의 사냥꾼이 이렇게 무서울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쿨럭!”
뱀처럼 출렁이면서 방패의 틈을 뚫고 들어온 창에 가슴 한복판을 적중당한 김시우는 뒤로 떠밀리며 피를 토했다.
강화된 희귀 등급의 갑옷이 아니었으면 즉사 판정이 났을 것이다.
덕분에 김시우는 이를 악물며 전투 방식을 바꿔야 했다.
무작정 무기술로 싸우려 말고, 원거리 스킬을 더해 공격 패턴을 다양화하기로 한 것이다.
자존심을 굽히고 타협을 본 것이다.
-쿠쿠쿵!
-콰쾅!
그런데.
그가 무슨 수를 써도 윤시아는 굳건한 성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합을 더해 갈수록 김시우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무기를 맞대고 2분여가 지났을 무렵.
김시우는 비로소 자신이 느낀 게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젠장!’
상대가 자신을 봐주고 있었다.
아니, 끝낼 수 있는 타이밍에 끝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한 단체의 장이니, 입장을 배려해 준 것이다.
덕분에 김시우는 패배감을 넘어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젠장! 젠장!’
그런데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상대가 봐주고 있음에도 전혀 유리함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실력 차이였다.
서백호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그렇지, 윤시아가 뛰어나다는 건 김시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쉽게 밀리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이렇게 직접 싸우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대련 시작 3분이 지난 시점에서 김시우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큭…….”
마치 이쯤 어울려 줬으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 윤시아가 폭풍처럼 공격을 쏟아 냈고 김시우는 버텨 내질 못한 것이다.
“졌습니다. 항복.”
결국, 김시우는 이를 악물며 패배를 인정했다.
* * *
“응?”
김시우는 패배 인정과 함께 경기장에서 사라졌다.
윤시아는 다음 상대를 찾아 고개를 돌렸고, 곧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상당한 실력자로 보이던 영국인은 어디로 간 건지, 구석에 앉아 있던 중국인 여성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것이다.
“언제 끝났습니까?”
“2분 전쯤이요.”
거물인 척 무게를 잡아 놓고, 영국인 남성은 1분밖에 버티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 남자의 실력이 보기보다 형편없던 건지. 아니면 이 여자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건지 쉬이 감이 오질 않네.’
그도 그럴 게 순박해 보이는 중국인 여자는 하나도 강해 보이지 않았고, 능력치 보정이 들어갔던 수치를 떠올려 보면 둘의 레벨 차이는 10 이상 날 것 같았다.
“그럼 계속 이어 가죠.”
“안 쉬어도 되겠습니까? 상대를 봐주면서 싸우느라 합이 길어져 괜히 힘을 뺐잖아요.”
윤시아는 중국인 여성의 물음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중국인 여성은 알겠다며 웃어 보이곤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장밍메이라 합니다.”
“윤시아입니다.”
마치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인사.
덕분에 윤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했고, 곧이어 장밍메이라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검을 뽑아 들었다.
-촤륵.
그런데 그녀의 검은 어딘가 이상했다.
힘아리 없이 뽑힌 칼날이 출렁이며 축 처지는 게 아니겠는가.
그건 연검이라 불리는 보기 드문 형태의 검이었다.
* * *
“제법이더군.”
“어? 그래.”
나는 10라운드 대전 상대로 터키인 남성과 캐나다인 남성, 중국인 남성를 마주했다.
그러나 경기 시작과 동시에 나는 터키인 남성의 목을 날렸고, 중국인 남성은 캐나다인의 목을 날리면서 1:1의 상황이 되었다.
중국인이 단번에 목을 날린 캐나다인은 대진운이 좋았는지, 레벨이 60~70대 정도로 되어 보였지만, 그래도 나름 높은 라운드까지 올라온 인물.
그런 그를 일격에 제압했다는 점에서 중국인의 기량이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성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마치 나를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장쥔. 난잡하게 확산하는 무력에 정도가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 왔다.”
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검은 옷에 쌍검을 고수하는 일본 지부의 다나카처럼 ‘컨셉 장인’인 모양이다.
요란하게 검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설정은 무협 계통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컨셉 장인의 행동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다나카도 그렇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꽤나 재밌으니까.
“내 오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 주도록 하겠다. 와라, 내 검법의 정수를 보여 줄 터이니.”
어깨를 으쓱인 나는 듀랜달로 그를 겨누었다.
“그럼 거절하지 않고. 천벌.”
그리고 듀랜달의 내장 스킬인 천벌을 사용했다.
-고고고고고!
경기장의 천장을 뚫고 나타난 거대한 검이 지면을 향해 떨어지고.
“어?”
-콰아아아앙!
곧이어 당황한 남성의 음성과 함께 거대한 압력이 주변 일대를 짓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