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무서운 나라 (3)
이전까지 4인 1조로 진행되던 전투가 11라운드인 32강부턴 2인 1조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더불어 경기장도 정육면체의 평이한 공간이 아닌, 다양한 자연환경을 가진 장소에서 대전이 벌어졌다.
내가 32강을 치르는 장소는 너른 들판.
바람이 조금 강하긴 하지만, 환경적으로 변수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나는 의외의 인물을 상대로 만나게 되었는데.
“아, 이런…….”
바로 나와 같은 대한민국 소속이자 정부측 대표 사냥꾼인, 적응군(레벨업 병사)의 ‘주영우 대령’이었다.
현대 무기가 먹통이 되면서 중요성이 더욱 올라간 그는 우리 아버지처럼 초고속으로 승진 중이며, 근시일 내로 준장으로의 진급이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주영우 대령의 레벨은 80대 후반.
그 정도 레벨이면 전역을 하고 일반 사냥꾼으로 사는 편이 더 나을 텐데, 그럼에도 아직 군인 신분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절로 든다.
때문에 주영우 대령은 내가 몇 안 되게 인정하는 정부 측 인물이기도 했다.
“항상 부친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아버지께 주 대령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휴, 아닙니다.”
서인호 소장의 아들이 서백호 협회장이란 사실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전부 아는 정보.
그가 아버지를 거론해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제 운도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하필이면 32강에서 협회장님을 만나다니요.”
“그거야 해 봐야 아는 일이죠.”
“그거, 기만입니다.”
“하하.”
그러면서 주영우 대령은 검을 뽑아 들었다.
나를 이길 수는 없어도 쉽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장 사용 빈도가 높은 주력 무기인 듀랜달이 소환되듯 쥐어졌다.
원래부터 검도를 배운 건지, 제법 익숙해 보이는 상단세를 취한 그는 슬금슬금 나와의 거리를 좁혀 왔다.
머지않아 공격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고, 나는 그에게 선공을 양보했다.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시작 신호처럼 경기장인 들판에 바람이 강하게 붐과 동시에 그는 벼락과도 같은 내려치기를 뻗어 왔다.
마치 팔이 늘어나고, 손에 쥔 검이 흐릿해 보일 만큼 빠른 일격이었다.
-콰아앙!
하지만 나는 너무도 가볍게 그 공격을 막아 냈고, 이내 팔을 비틀며 적당히 힘을 주는 것으로 주영우 대령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헙!”
-비틀.
이런 내 행동은 너무도 여유로워 보이는 데다가 그리 빠르지도 않다.
하지만 당하는 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주영우 대령은 이를 악물며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어느새 내 검이 목에 닿아 있어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방어에서 물 흐르듯 이어진 반격.
높은 신체 능력치와 스킬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듯, 심플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스킬을 사용해서 다시 하시겠습니까?”
그대로 손에 힘을 주면 주영우 대령의 목이 베일 터이다.
하지만 나는 검을 거두며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주영우 대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협회장님이란 존재가 얼마나 큰 벽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내가 스킬을 사용하면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그건 이전 판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
주영우 대령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 쓰게 웃으며 항복할 뿐이었다.
곧 주영우 대령이 경기장에서 사라지고 내 눈앞에 승리자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11라운드(32강) 통과]
[1,000점을 획득했습니다.]
32강쯤 되니 이벤트 점수 획득량이 단번에 1천 점을 넘었다.
이번 라운드로 인해 누적 점수가 딱 3천 점이 되었다.
윌리아와 시에나도 따로 이벤트 대전에 참여 중이니, 두 사람도 이변 없이 이번 라운드를 통과하면 우리 파티는 토탈 9천 점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지난달과 비교하면 많은 액수다.
과연 최종적으로 몇 점이나 획득하게 될지, 나는 적지 않은 기대감을 표했다.
* * *
윌리아는 활을 쓰는 인도인을, 시에나는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인을 32강에서 만났다.
둘의 상대 모두 허투루 32강에 오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매우 분투하며 잘 싸웠다.
하지만…….
[소요 시간 00:35]
[소요 시간 00:41]
융단 폭격이나 다름없는 윌리아와 시에나의 압도적인 스킬 세례에 두 사람의 대전은 이번에도 1분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나 버렸다.
두 사람을 상대한 인도인과 프랑스인은 열심히 도망을 치면서도 나름대로 반격을 도모하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노련한 윌리아와 시에나는 그들이 무슨 수를 쓰든 잠자코 당해 주지 않았다.
상대가 거리를 좁히려 하면 블링크나 비행으로 도망치고, 원거리 스킬을 사용하면 더욱 강한 스킬로 맞받아쳤다.
[아니, 시X! 저걸 어떻게 이겨!]
덕분에 시에나와 맞붙었던 프랑스인이 패배하기 직전 이런 대사를 외치기도 했다.
어쩌겠는가.
대진운이 안 좋았던 것을.
절로 미안함이 들게 하는 절규였지만, 우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파티 다음으로 윤시아가 16강 진출을 확정 짓고, 뒤이어 최도겸과 제주팀의 박상만, 가의도 청년단의 김민희가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이 7명 외엔 모두 32강에서 탈락했다.
13명 중 7명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면서 50%가 넘는 진출률을 기록했으니, 양호한 걸지도 모르겠다.
“끄악! 4천왕 중 나만 떨어졌어!”
그런데 한때 윤시아, 최도겸, 박상만과 함께 사냥꾼 협회 4천왕으로 불리던 검도 국대 출신의 김현수만 16강에 오르지 못하고 32강에서 탈락했다.
최근 치고 올라오는 가의도 청년단의 김민희마저 16강에 올라간 마당에 자신만 탈락하니 김현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좌절했다.
그러나 나는 김현수보다 그를 탈락시킨 인물에게 흥미를 느꼈다.
‘진꾸안이라.’
그는 유일하게 32강에 진출한 중년의 중국인이었는데, 윤시아를 곤경에 빠뜨렸던 여성이나 나와 싸웠던 무협 컨셉남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한 검법을 사용하던 중년 남성은 김현수에게 진중하게 포권을 취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나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컨셉이 아닌가?’
행동 하나하나가 무협 영화 속 무림인을 보는 듯하다.
더구나 그들이 사용하는 무술 역시 급조된 게 아닌, 체계적이며 깊이감이 있어 보였다.
나는 윌리아에게 그녀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그것 좀 주시겠어요.”
“넵, 잠시만요.”
뜬금없는 요청이지만,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검의 문양이 새겨진 메달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뭐야, 웬일이세요? 수련할 때를 제외하곤 여친이나 지키라 명한 분이.]
나는 착용 중이던 목걸이를 풀고 그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정체는 바로 검술 스승 오티스였다.
‘시끄럽고, 방금 봤어?’
[네, 뭐…….]
검술 스승 오티스는 평소 내가 아닌 윌리아가 착용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검술 스승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공격 경로 예측’은 회피 능력이 떨어지는 윌리아가 착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엔 그녀에게 맡기고, 나는 일과가 끝난 뒤 수련을 할 때만 오티스를 착용했다.
[뭐, 나름대로 좋은 검법이네요. 백호 님이 쓰시는 검도의 기본세보다 세분화되어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이전 라운드에서 윤시아를 몰아붙인 연검 쓰던 여자는 어땠는데?’
[기본적인 결은 그 여자와 비슷해 보이네요. 아무래도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검술 같아요.]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너무 기계적인데요? 백호 님은 검도를 기초로 자신에게 맞는 검법을 만들고 계속 발전시켜 가고 있지만, 저들은 윗대가 만든 검법을 진리라 여기며 자신들을 끼워 맞추는 느낌입니다.]
‘그래?’
[그게 오래된 검법을 익히는 자들의 문제점입니다. 정통성을 이유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무술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과거의 것만 답습하죠. 그들의 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를 사도라며 배척했을 게 뻔해요. 그러니 저렇게 꽉 막힌…….]
오티스의 이야기가 길어지려 하자 다시 녀석을 윌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자, 잠깐, 이야기는 그걸로 끝입…….]
내가 오티스를 착용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저거기도 하다.
말이 너무 많다.
나는 그런 오티스가 귀찮지만, 윌리아는 재밌다며 좋아하니, 여러모로 그녀가 상성이 맞는 것 같다.
‘진짜 무림인 같은 건가?’
아무튼 내가 잘못 본 게 아님을 알게 되면서, 김현수를 이긴 중년인과 그 일행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게 보물 지도를 주며 중국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 주었던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무협지 속 무림인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세력이 대재앙 발생과 동시에 호북성에서 모습을 드러냈단 소문이 있습니다.’
그땐 그냥 웃어넘긴 이야기다.
하지만 그 중국인이 했던 이야기 중엔 중국 정부가 몬스터 사체를 활용하여 고기를 얻는 방법을 알아냈단 귀중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연관성을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저들이 진짜 무림인이라 해도 딱히 걱정할 건 없어 보이네.’
그들의 존재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력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단지 흥미 수준의 관심이 가는 것뿐이다.
* * *
12라운드 16강전이 진행되었다.
이 12라운드에서 우리 사냥꾼 협회는 나와 윌리아, 시에나, 윤시아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8강전 자리 중 절반이 우리 사냥꾼 협회 소속 멤버들이 차지했으니 불만은 없지만, 원래는 더 많은 인원이 다음 라운드로 넘어갈 수도 있던 만큼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16강전에서 우리 사냥꾼 협회는 대진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제가 어찌 협회장님께 검을 들겠습니까? 기권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전 세계 사람들이 참여한 대전에서 16강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하필이면 나는 최도겸을, 윌리아는 제주팀의 박성만을, 시에나는 가의도의 김민희를 만났기 때문이다.
비록 그 셋은 감히 우리에게 맞설 생각을 못 하고 알아서 기권하는 바람에 괜히 힘을 빼지 않았지만,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11라운드부턴 승리할 때마다 쌓이는 점수가 상당했으니 말이다.
“이젠 우리끼리 만날 가능성이 높네요.”
“전 딱히 욕심이 없어서 백호 님을 만나면 승리를 양보하겠습니다. 물론, 시에나 님을 만난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위, 윌리아.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13라운드를 치르는 전체 인원은 겨우 8명.
그중 나와 윌리아, 시에나가 3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끼리 만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졌다.
그런데 다행이라 해야 할까?
16강전에서 대진운이 없던 것에 대한 보상인지, 우리 파티뿐만 아니라 윤시아까지 뿔뿔이 흩어져 아주 예쁜 대진표가 만들어졌다.
잘만 하면 4강 전에 사냥꾼 협회 소속 멤버들만 이름을 올릴 수도 있는 상황.
윤시아의 상대는 일전에 마경에서 보았던 미국 LA팀의 리더이자 한인 ‘클로에 주’였고, 윌리아는 곰처럼 생긴 러시아 남성, 시에나는 글래머러스한 브라질 여성이었다.
그리고 내 상대는 바로.
“네 놈이로군. 내 제자를 기습 공격으로 날려 보낸 이가.”
무림인처럼 보이는 중년의 중국인 남성이었다.
그는 한국 국기를 연상시키는 새까만 태극 형태의 음양도가 등판에 수놓아진 백의 도포를 입고 있었다.
무협 영화 같은 데서 자주 본 중국식 양날 검을 뽑아 든 그는 칼끝을 내게 겨누며 이를 갈았다.
“선공을 하라길래 한 건데요?”
나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그를 보며 장단을 맞춰 주었고, 이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중년인은 불꽃이 튀는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죽음의 기운이 넘치는 이 세상에서 근본 없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 기고만장하구나.”
뜬금없는 근본론의 등장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싸우기 전에 자기소개를 덧붙여서 궁금했던 것을 확인하기로 했다.
“저는 대한민국 사냥꾼 협회의 협회장 서백호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권을 취하며 자기소개를 하자, 그는 움찔거렸다.
결국 중년인은 마지못해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나는 대 무당파 130대 장문인 진후에이라 한다.”
그리고 무협 영화를 좀 본 남성이라면 절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자기소개가 돌아왔다.
“영화 속에 나오는 그 무당파 맞습니까?”
“흠흠. 뭐, 다소 와전된 이야기들이 많긴 하지만, 우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게 맞긴 하지.”
내가 눈을 반짝이며 아는 척을 하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중년인은 길게 기른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반응했다.
하지만 대화는 오래 안 가 멈췄다.
문뜩 자신이 내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단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다.
“쓸데없는 대화는 이쯤 하도록 하지.”
산속에서 오랫동안 도를 닦은 건지, 다혈질적으로 등장한 것치곤 의외로 순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듀랜달을 소환해 손에 쥐었다.
[대한민국의 서** 님을 기준으로 능력치가 최종 보정됩니다.]
-중국 진*** 님의 능력치가 210 상승합니다.
능력치 차이를 보아 진후에이의 레벨은 대략 90 전후로 추측된다.
스스로 대 무당파의 장문인이라고 떠드는 그가 어느 정도의 검격을 보여 줄지 궁금했다.
‘과연 이름만 무당인지, 진짜 무협인 다울지.’
김현수와의 싸움을 보면 꽤나 강해 보이긴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 수준으로 끝난다면 실망하고 말 것이다.
[3]
[2]
[1]
머지않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그렇게 자칭 무당파 장문인과의 대결이 다가왔다.
‘우선은 가볍게.’
나는 그의 제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전 시작]
“천벌.”
대전 시작과 동시에 듀랜달의 내장 스킬인 ‘천벌’부터 사용했다.
자칭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면 유일 등급의 내장 스킬 정돈 가볍게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