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마경과 마계 (1)
무당파의 130대 장문인 진후에이는 이벤트 대전 이후,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이유는 그조차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느끼게 만든 한국인 청년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때, 이렇게 공격을 했으면 어떠했을까?’
‘그때, 이렇게 방어를 했으면 어떠했을까?’
진후에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 가상의 한국인 청년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그놈의 반사 신경이면 어떻게든 방어를 해냈겠지. 아니, 오히려 내 공격을 튕겨 낸 후 반격을 해 올 수도 있을 거야.’
‘겨우 이 정도 대응으로는 녀석의 공격을 막을 수 없어. 운 좋게 한 번을 막는다 해도 다음 공격이 있을 테고.’
진후에이는 상상 속에서조차 한국의 그 괴물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심상 세계에선 오히려 자신에게 후해질 수밖에 없음에도 그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건 그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벤트 대전이 끝나고 5일이 지났음에도 진후에이 여전히 그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못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랜 역사를 지켜 온 본문의 검이 시대에 뒤처진 걸까?’
그렇게 진후에이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 갔다.
“스, 스승님!”
그런데 그때.
진후에이의 제자이자, 이벤트 대전 10라운드에서 윤시아를 몰아세웠던 장밍메이가 다급한 모습으로 그를 찾아왔다.
당연히 수련을 방해받은 진후에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 그자가 찾아왔습니다! 스승님과 맞붙었던 한국인이요!”
“뭐?”
하지만 이어진 장밍메이의 보고에 진후에이의 두 눈이 더없이 크게 떠졌다.
순간 그는 자신이 잘못들은 건가 싶어서 제자에게 재확인을 하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오! 잘 계셨습니까?”
마음속으로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검을 맞대 온 상대가 너무도 태평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 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소 입구를 딱 지키고 서 있는 한국인 사내 서백호를 마주하자 진후에이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진후에이가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긴 어떻게?”
“마음먹고 탐색을 진행하니,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들을 찾은 용건이 뭔지 알 수 없지만, 이 상황에서 진후에이는 큰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능력치 보정이 들어간 이벤트 대전에서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본래의 능력만으로 싸우게 되면, 전투 자체가 아예 성립하지 않을 터이다.
실제로 기감이 예민한 진후에이가 느끼기로 지금 검을 뽑으면 단 1초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심지어 위험한 건 저자만이 아니다.’
미인이라도 수집하는 건지 서백호의 곁엔 3명의 미인이 함께였다.
2명은 대회에서 보았던 천사(윌리아)와 엘프(시에나)였고, 1명은 처음 보는 붉은 머리 여인이 한 발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을 본 순간, 진후에이는 소름이 돋았다.
머리카락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누가 봐도 인간 혹은 NPC와 다른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엘더 이터 헬레나 / 레벨: 130]
정보가 감춰져 있는 세 사람과 달리, 정보를 감출 수가 없는 건지 드러나 있는 그녀의 정보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얘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 잘 듣거든요.”
“헤, 헤헤.”
엘더 몬스터는 일반적인 규격을 넘어선 특수종으로 실제 전투력은 본래의 레벨 이상이다.
그런데 서백호는 그런 몬스터의 머리를 동물 쓰다듬듯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에 레벨 130의 엘더는 움찔거리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잔뜩 주눅 든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보고 있는 쪽이 식은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무슨 용무 때문에 이곳을 찾았는가.”
진후에이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상대가 무당파를 멸문시키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영입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영입?”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진후에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네, 무당파 여러분께서 우리 사냥꾼 협회에 가입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그에 진후에이는 당황해야 했다.
일단 상대가 자신들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인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인물이라면 홀로 무당파를 없앨 수도 있을 만큼 막강한데, 굳이 귀찮게 직접 나서서 영입을 제안하는 이유를.
“지금까진 어떤 위기가 닥쳐도 저의 힘으로 해결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제가 속한 단체의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죠.”
“우리 무당파를 끌어들이는 게 그 계획을 위한 거다?”
“네.”
의외였다.
솔직히 그 정도의 강자라면 더욱 오만할 거라 생각했는데.
진후에이는 긴장으로 한껏 경직되었던 몸에서 조금은 힘을 뺄 수 있었다.
“전투에서 레벨과 아이템도 중요한 요소지만, 그 이상으로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우리 무당파의 무술이란 거군?”
“그렇습니다.”
충분히 납득이 되는 설명.
그런데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차라리 자네의 전투 기술을 가르치면 되지 않나? 당시엔 근본이 없다고 폄하하긴 했지만, 자네의 검술 실력은 매우 뛰어나네.”
“안타깝게도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재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전투는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이 상황에 맞춘 임기응변이거든요.”
진후에이는 임기응변이란 단어에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무당의 검이 임기응변에 패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반면 여러분의 무술은 다르죠. 훈련을 통해 습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입을 제안한 겁니다. 여러분의 무술을 우리 협회에 풀어 주셨으면 해서요.”
뜻은 이해했다.
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무당에겐 오랜 세월 쌓아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고수해 온 방식을 이제 와서 바꾼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만약 거절하면 어찌할 생각이지?”
그래서 진후에이는 신중하게 물었다.
그에 서백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답했다.
“거절하시고 싶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의외로 가벼운 반응.
덕분에 진후에이는 크게 안심했다.
하지만.
“정 거절하고 싶으시다면요.”
서백호가 한 문장의 말을 더 붙이자 대답의 느낌이 전혀 달라졌다.
거절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거절하시겠습니까?”
이어서 서백호 얼굴에 걸려 있던 친절한 미소가 지워지자, 진후에이는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리가! 앞으로 잘 부탁하네!”
문파의 유구한 역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생존 본능이 큰 진후에이였다.
“오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께 최고의 대우를 약속합니다!”
그날 장밍메이는 보았다.
서백호와 악수를 나누는 스승의 눈가에 촉촉하게 깃든 이슬을.
모두에게 존경받던 무당파의 장문인도 막강한 힘 앞에 목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오오, 오우거와 오크 떼가 움직이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건물들이 순식간에 정리되네?”
“수중 몬스터를 활용해서 끊어진 원효대교 잇는 거 봤어? 그것도 장관이던데.”
“역시 협회장님은 대단하시다니까? 이젠 엘더 몬스터까지 부리시다니.”
나는 엘더 이터 헬레나를 활용해 가장 먼저 생존자들이 힘겹게 겨울을 나고 있는 생존 구역의 정비를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난잡하게 형성된 생존 구역은 언제고 정비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동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힘센 몬스터를 이용하니, 매우 빠르게 주변을 정비할 수 있었다.
불필요한 건물을 무너뜨려 생존 구역 내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파괴된 건물의 잔해는 외곽에 차곡차곡 성벽처럼 쌓았다.
전국의 생존 구역을 모두 정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건 엘더 몬스터를 지휘할 수 있는 내가 적임이기에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협회장님! 안녕하세요!”
“이쪽 좀 봐 주세요!”
“꺄아아!”
이런 내 행보 덕분인지 생존 구역을 방문할 때면 나를 칭찬하는 대화와 열렬히 반겨 주는 사람들의 환호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주민들이 나를 새로운 권력자로 여기며 어려워했다면, 이벤트 대전 우승 건과 생존 구역 정비 건으로 인해 팬덤화가 된 느낌이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나는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용산 생존 구역 안에 자리한 웨이포인트로 향했다.
헬레나가 길들인 몬스터들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하러 왔다가 인기 연예인의 기분을 제대로 만끽하고 말았다.
“요정님 귀여워!”
“천사님! 천사님!”
참고로 윌리아와 시에나도 인기가 상당하다.
두 사람은 NPC지만 내 동료이고, 이번 이벤트 대전에서 대한민국 소속으로 크게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오! 안녕!”
“응? 거기 여성분 다치셨군요?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더구나 윌리아와 시에나는 외모도 연예인 이상이고, 팬서비스도 좋은 편이어서 인기는 쉬이 식지 않았다.
-팟!
그렇게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 속에 웨이포인트에 도착한 나는 바로 마경으로 향했고, 비로소 고막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협회장님.”
“오셨습니까?”
참고로 마경에서 발견한 첫 번째 웨이포인트엔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윤시아와 클로에 주의 파티가 팀을 이룬 한미 공동사냥팀이다.
윤시아, 클로에 팀은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섬 세일론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마경 내에서 대규모 다크엘프 스폰 지역을 발견하게 되어 두 사람 역시 활동 구역을 마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윤시아 / 레벨: 105]
[클로에 주 / 레벨: 111]
내 예상대로 두 팀의 리더의 성향이 비슷해서인지, 두 팀의 리더 모두 유일 등급의 장비를 갖고 있어서인지, 시너지가 매우 좋았다.
그 증거로 이벤트 대전 이후 두 사람의 성장 속도는 미국의 제일 사냥꾼이라 불리는 제임스를 상회하고 있었다.
이제 클로에와 제임스의 레벨 차이는 단 3밖에 나지 않으며, 윤시아와의 레벨 차이도 한 자릿수로 좁혀진 상황이다.
‘아마 이들이라면 머지않아 제임스를 따라잡겠지.’
나는 높은 가능성을 가진 그들을 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계시는군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내 칭찬에 두 여인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우렁차게 답했다.
‘어째 주변에 여자가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네.’
조금은 조심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윌리아는 특별히 별말 안 하지만, 요즘 묘하게 그녀의 눈치를 보게 되니까.
“그럼 우린 이만 갑니다.”
“네, 고생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마경 내 안전 구역을 벗어났다.
우리가 향한 곳은 히드라가 스폰되는 산맥의 분지.
“오늘 퀘스트를 마무리 짓도록 하죠.”
바로 마계에서 추방당한 마족 NPC 나인포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장소였다.
[나인포의 부탁 / 퀘스트 등급: 최상]
-내용: 나인포가 원하는 소재 아이템 3종을 구해다 주자.
1. 아르고스의 수정체 50개 –완료
2. 그리폰의 부리 50개 –완료
3. 히드라의 송곳니 50개 –미완료
-보상: 나인포를 부하로 영입
히드라의 송곳니 10개만 추가로 구하면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게 된다.
즉, 고레벨의 마족들을 부하로 부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놈들을 무장시키면 고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하게 만들 수 있으니, 자동 파밍이 가능해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인포 일행은 마경의 지리를 꿰고 있을 뿐만 마계로 향하는 길도 알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