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마경과 마계 (3)
눈을 뜨는 게 힘들 만큼 강렬한 마력의 폭풍.
동시에 나인포의 정보에 변화가 생겼다.
[나인포(마족) / 레벨: 200(-80)]
[나인포(마족) / 레벨: 200(-78)]
[나인포(마족) / 레벨: 200(-76)]
떨어진 레벨이 복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인포의 부하들도 다르지 않았다.
녀석들의 레벨이 복구될수록 강력한 압박감이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인포를 비롯한 부하들의 레벨이 모두 원상 복구된다면 가장 약한 놈조차 우리의 레벨을 크게 상회하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시스템을 믿었다.
비록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긴 했어도, 확실한 기준점이 되어 주는 시스템이 사기를 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윌리아의 말에 의하면 강제 복종은 자살조차 지시할 수 있는 강력한 명령권이야. 비록 강제 복종의 기간은 1년으로 길지 않지만, 그 기간이면 충분히 우리가 녀석들의 수준을 넘어서겠지.’
때문에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내려보았고.
“아아, 드디어.”
[나인포(마족) / 레벨: 200]
머지않아 나인포가 온전한 힘을 되찾았다.
“주군…….”
“크흑!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드레 / 레벨: 190]
[타미라 / 레벨: 185]
더불어 본래의 힘을 찾은 부하들도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 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부 무릎 꿇어 봐.”
-쿵! 쿠웅!
“큭.”
“헉!”
내 지시에,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어깨가 짓눌린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확실한 시스템의 강제성.
그에 만족한 나는 비굴함이 사라지고 얼굴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나인포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잊은 거 없어?”
“무슨?”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건 확인했다.
때문에 내 행동은 거리낌이 없었다.
“안드레, 나인포 엉덩이 힘껏 걷어차.”
-빡!
“끄악!”
내가 지시를 내리자 나인포의 수하 중 하나인 안드레가 나인포의 엉덩이에 사커킥을 꽂아 넣었다.
자신의 주군을 힘껏 걷어찬 안드레가 기겁했다.
“주, 주군 죄송합니다. 이건 제 의지가 아닌…….”
하지만 덕분에 나인포가 정신을 차렸다.
원래의 관계를 상기한 것이다.
“아, 아아! 잊지 않았습죠! 추가 보상 말씀이시죠?”
그의 눈가엔 희미하게 눈물이 반짝였다.
나는 그런 나인포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했다.
‘남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놈들이 배신을 공모하다가 내게 걸렸다는 것.
그렇기에 녀석들을 대함에 있어서 자비 따윈 두지 않았다.
“그래, 추가 보상이 하나 더 있었잖아.”
“기억했습니다요. 헤헤.”
지난번 배신을 공모하다가 걸리는 바람에 놈들은 내 손에 박살이 났고, 결과 퀘스트 보상을 두 차례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업그레이드 보상은 놈과 휘하 마족들이 1년간 내게 강제 복종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업그레이드 보상이 바로 소환형 악마의 양도였다.
“지금 바로 양도할까요?”
“내가 가져도 이상은 없는 거지?”
“네, 소환형 악마는 정령 같은 것이라 보면 됩니다. 해당 악마는 본래 저희 가문 가주들에게 대물림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뭐, 가문이 망했으니 상관은 없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환형 악마를 양도받기로 했다.
그러자 나인포가 작게 주문을 외웠고, 이내 그의 오른손 손등에 새겨져 있던 문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붕괴의 악마 기간테스. 소환주여 무엇을 바라는가.]
그리고 동시에 골렘을 연상시키는 둔탁한 외형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당 악마는 거인족인 기간테스.
소환 시 신장이 무려 100미터에 달하는 괴물이라고 한다.
‘괜히 붕괴의 악마가 아니구만.’
악마의 양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인포가 양도의 뜻을 밝히고 내가 받아들임으로써 끝이었으니까.
-화악!
[소환형 악마 기간테스를 획득했습니다.]
나인포의 손등에 있던 문신이 지워지고, 내 손으로 그 문신이 옮겨 왔다.
“기간테스는 하루 한 번 1시간 동안 대가 없이 소환할 수 있습니다.”
“대가 없이? 그 말은 대가를 주면 더 소환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몬스터 1,000마리와 인간 100명을 포획해 산 채로 제물을 바치면 24시간 동안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죠. 당연히 제물을 추가로 바치면 그만큼 소환 유지 시간도 늘어나고요.”
역시라고 해야 할까?
죽은 사체로 소환하는 거면 몰라도 살아 있는 몬스터와 인간을 포박해서 제물로 바치면 된다는 게 참으로 악마다운 옵션이었다.
나는 그냥 하루 1시간 동안 대가 없이 소환하는 기능만 사용하게 될 것 같다.
“기간테스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야?”
“소환형 악마는 소환자의 수준에 비례해서 강해집니다. 소환자와 레벨이 같은 로드급 엘더 몬스터와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냥꾼은 1:1로 싸우면 같은 레벨의 일반 몬스터는 이길 수 있어도, 네임드 몬스터의 사냥은 쉽지 않다.
때문에 네임드부터는 파티 사냥이 필수였고, 보스는 파티가 확실한 공략법을 마련해야 사냥할 수 있었다.
물론, 공략법을 몰라도 우리 파티처럼 피지컬로 찍어누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게 가능한 파티는 전체에 비하면 채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더불어 엘더 몬스터부턴 여러 파티가 힘을 합쳐 레이드팀을 꾸려야 공략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엘더 몬스터 급만 되어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로드 급이 엘더 몬스터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다곤 하지만. 나는 이미 엘더 이터라는 특수종을 제약 없이 끌고 다니고 있잖아?’
헬레나의 존재 때문에 단 1시간밖에 소환할 수 없는 로드급 엘더 몬스터의 존재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낫긴 한가? 내 수준에 맞춰 강해진다는 건, 앞으로도 쭉 쓸 수 있는 소환수란 뜻이니까.’
기간테스는 높이가 무려 100미터에 이르는 거인이니, 전투 외에도 쓸 데는 많을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잊으면 안 된다.
소환형 악마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보상.
메인 보상은 레벨 200의 나인포를 포함한 21명의 마족이었다.
* * *
한국 측에서 전해 준 정보 덕에 마경에서 레벨 올리기 좋은 사냥터를 찾은 제임스는 열심히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들이 사냥 중인 몬스터는 다크 엘프.
윤시아+클로에 파티와 같았다.
다만 다크 엘프가 등장하는 마경의 필드가 꽤나 커서, 제임스는 사냥 중 윤시아+클로에와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 제임스, 근처에서 전투 소리가 들리는데?”
“그래?”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처음으로 윤시아+클로에 팀을 만나려는 모양이다.
그에 제임스는 기대감과 함께 경쟁심이 솟구침을 느꼈다.
그는 지난 이벤트 대전에서 클로에의 활약에 크게 감명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본래 자신이 알던 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던 클로에의 무력에 어찌나 놀랐던지.
그리고 그런 감상을 받은 건 제임스뿐만이 아니어서, 현재 미국의 제일 사냥꾼은 제임스가 아닌 클로에란 말이 심심치 않게 돌았다.
누군가에게 추월을 당하면 질투심이 생길 법도 하지만 적어도 제임스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라이벌을 넘어서고 싶다는 상승심리가 작용했다.
때문에 그는 경쟁심을 느끼면서도 모처럼 재회하게 될 클로에와의 만남에 기대감을 표하는 거였다.
‘예전에는 클로에를 그저 미친X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그는 전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에 다가갔다.
-파앗!
몬스터가 죽으며 흩뿌리는 푸른빛이 퍼지는 것을 보면 타이밍 좋게 그들도 전투가 끝난 모양.
“오! 클로에. 오랜…….”
그래서 마음 놓고 수풀을 해친 후 상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 건네려 했다.
“응?”
[마족 안드레 / 레벨: 190]
[마족 타미라 / 레벨: 185]
[마족 엔시스 / 레벨: 185]
하지만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에 제임스는 하려던 말을 멈췄고.
이내 상대의 정보를 확인한 그는 안색이 창백해지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제임스? 왜 그래?”
“혹시 클로에가 뭐라고 해?”
그리고 그런 제임스의 뒤를 따라 걷던 동료들도 상대의 모습을 보자마자 똑같이 굳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재앙 이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레벨을 가진 마족들을 마주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이는 파티가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귀환 스크롤! 귀환 스크롤!”
제임스가 다급하게 외치자, 일행들은 허겁지겁 귀환 스크롤을 찢으려 했다.
“해치지 않습니다! 겁먹으실 필요 없어요!”
“제임스 님 파티시죠?”
그런데 마족들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다짜고짜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그에 제임스를 비롯한 미국인 파티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며 의문을 표했다.
해치지 않는다는 말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대사일 수도 있지만, 상대들이 자신들보고 ‘제임스 파티’라 불렀기 때문이다.
더불어 움직임이 멈춘 그들을 향해 마족들이 추가 대사를 내뱉자 제임스 파티는 일제히 헛바람을 삼켰다.
“저희는 대한민국 사냥꾼 협회 소속 서백호 님의 부하들입니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서백호 님께서 인간에게 해코지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셨거든요.”
처음엔 그들이 하는 말이 쉽게 납득이 되질 않아 뇌가 이해하길 거부했지만, 천천히 상황 파악이 완료되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그러니까 여러분께선…….”
“네, 사냥꾼협회 소속인 거죠. 정확하겐 서백호 협회장님 직속 마족 사냥팀입니다. 현재 다크엘프들을 사냥하며 아이템을 파밍하고 있습니다.”
“허…….”
서백호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레벨이 180~190에 달하는 이 무지막지한 괴물들까지 부려 먹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대체 어디까지 가실 생각인 건지…….’
이젠 서백호에 대해 공포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인물과 동맹 관계여서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니, 하시던 대로 사냥을 이어 가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불편하실 테니,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의 바른 고레벨 괴물들은 곧바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덕분에 제임스 일행들 사이에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백호 님이 움직이면 나라 하나 전복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는데?”
“한국과 동맹을 맺은 건, 진짜 최고로 잘한 선택인 것 같아.”
“그렇지?”
잠시 오해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던 제임스와 그의 동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사실은 앞선 상황 하나로 끝이 아니었는데.
[마족 제피르 / 레벨: 180]
[마족 카시리아 / 레벨: 175]
조금 전의 마족 파티와 비슷한 이들을 몇 번이고 마주쳤기 때문이다.
확인 결과 그들은 모두 서백호의 부하들이었으며, 하나같이 인간인 자신을 상대하는 걸 어려워했다.
“서백호 님의 정체를 알았어.”
“뭔데?”
“그분은 마왕이 확실해.”
“…….”
그에 얼이 빠진 제임스는 바보 같은 대사를 내뱉었지만, 동료들은 그를 비웃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임스 파티가 겪은 상황은 빠르게 백악관으로 전달되었고, 당연히 백악관은 난리가 났다.
* * *
나는 나인포를 통해 마경의 구조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을 끝낼 수 있었다.
마경은 마계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하지만, 마계와 지구를 분리시키는 경계이기도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마경의 중심부는 마계의 군대조차 쉽게 뚫을 수 없는 위험 구역이 존재한다는 의미였으며, 이 덕분에 지구가 안전하단 뜻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활동 중인 장소는 마경에서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마경 중심엔 강력한 몬스터들이 즐비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심 지역을 조용히 지날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존재하는데, 나인포와 부하들은 운 좋게 그 비밀 통로를 발견하여 무사히 마경에서도 안전한 편에 속하는 이곳에 다다른 것이다.
“그 통로를 이용하면 우린 위험하지 않게 마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그 통로를 이용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경의 중심부만큼이나 위험한 게 마계 그 자체니까.
“그럼 당장은 마계를 가려고 하기보다, 마경에서 싸우면서 레벨을 올리는 게 나은 선택이 되겠군.”
당장 마계에 가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내 목적은 마계 탐색이 아닌 강해지는 거였고, 그건 마경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렇죠.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마경의 정보를 활용하면 빠른 레벨업이 가능하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