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피버 타임 (2)
우린 마경의 뒤틀림에서 계속 사냥을 이어 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이후로 순혈귀(레벨 250)를 다시 맞닥뜨리는 일은 없었고, 우리가 상대한 네임드와 보스 몬스터 대부분이 레벨 190 이하였다.
놈들 덕분에 준유일 등급으로 분류해도 좋을 액세서리와 다양한 극상급 스킬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근데 여긴 조금 익숙해진다 싶으면 항상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더라.”
그렇게 마경의 뒤틀림에서 경험치를 포함해 많은 보상을 얻었지만.
마치 방심해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사냥에 익숙해질 때마다 순혈귀 수준은 아니어도 레벨 200이 넘는 고등 몬스터가 등장해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지금처럼.
[보스 올더 데스나이트 케일 / 레벨: 210]
레벨 210의 보스 등급의 데스나이트.
현재 우리 레벨이 179였으니, 레벨 차이는 무려 31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나인포의 물음에 윌리아와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내 판단에 맡기겠단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공격하자. 저걸 잡는 데 성공하면 분명 레벨업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려운 상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녀석이 언데드라서 속성상 이쪽에 우위가 있다는 점과 대인 공격이 주류인 비교적 얌전한(?) 몬스터란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스나이트는 검의 달인이란 컨셉을 가진 귀중한 상대 아닌가.
녀석과의 전투 경험은 내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되어 줄 테니, 이대로 뿌리치긴 아까웠다.
“알겠습니다.”
“장비도 좋아 보이는데, 혹시 알아? 유일 등급이 나올지?”
누구도 내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상대해 온 몬스터 중 가장 레벨이 높은 보스급 몬스터 올더 데스나이트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어리석은 놈들. 감히 짐에게 맞서려는 것인가…….]
마치 왕이라도 되는 양, 올더 데스나이트가 고풍스러운 대사를 내뱉고.
우린 이 이상 길게 떠들어 뭐하냐는 듯 선공을 가하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골든 프리즌!’
‘천벌!’
‘거신의 심판!’
텔레파시 반지를 통해 우린 사용 스킬의 정보를 공유했다.
먼저 윌리아가 빛 속성의 구속 마법을 사용하고, 올더 데스나이트의 머리 위로 나와 시에나의 스킬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거대 검과 거대 화살.
듀랜달의 내장 스킬인 ‘천벌’과 신궁 비자야의 내장 스킬인 ‘거신의 심판’은 공격 방식부터 위력, 이펙트까지 매우 흡사했다.
다만 떨어져 내리는 공격이 검이냐 빛의 화살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무례한 놈들 같으니!]
무기의 3강 옵션인 스킬 위력 2배 향상이 더해져, 두 스킬은 강력하기 그지없었으나.
역시 레벨은 장식이 아닌 모양이다.
올더 데스나이트는 천벌과 거신의 심판이 윌리아의 구속 스킬을 깨뜨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져나와 벼락처럼 우리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녀석의 상태는 온전치 못했다.
아무 피해 없이 벗어나긴 힘들었는지, 갑옷 여기저기가 떨어지고 깨져 있었다.
-채애앵!
[뭐, 뭐라?]
그리고 올더 데스나이트는 한 줄기 빛처럼 붉은 강기를 머금은 검을 날려 왔다.
섬전이라 표해도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일격.
하지만 내가 올곧게 뻗어 오는 놈의 공격을 듀랜달로 가볍게 받아 내며, 제3의 손을 조종해 투과 스킬이 걸린 바리사다를 휘둘렀다.
-슥!
모든 방어를 무시하며 파고든 바리사다가 얕지만 올더 데스나이트의 어깨를 베었다.
마치 묘기 부리듯 몸을 비튼 바람에 이 정도로 끝난 거지, 놈이 조금만 늦게 반응했다면 팔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내 공격을 피해냈다고 전투가 끝나는 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콰아앙!
-빠각!
그림자 이동 스킬을 사용해 어느새 등 뒤로 돌아간 헬레나가 사신의 낫 크리샤오르(유일)를 휘둘렀고, 그의 머리 위에선 시에나가 조종하는 유도 화살 브라흐마스트라(유일)가 거의 동시에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키아아아악!]
데스나이트 입장에선 절체절명처럼 보이던 상황.
하지만 놈이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자 검붉은 기운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헬레나와 유도 화살 브라흐마스트라를 튕겨 냈다.
-쿠웅!
[큭!]
짜증 섞인 신음 소리를 토한 헬레나는 날개 신발을 이용해 바로 허공에서 몸을 곧추세웠지만, 그녀를 보지 않고도 검을 휘두른 데스나이트의 공격에 의해 목이 베일 위기에 놓였다.
“절대 회복.”
[아악!]
그런데 그 순간.
윌리아의 극상급 회복 스킬인 ‘절대 회복’의 빛이 데스나이트를 감쌌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회복 스킬은 언데드 몬스터에겐 완전한 상극.
훌륭한 공격 스킬이 된다.
더구나 그녀에겐 치유의 헤일로라는 유일 등급의 장비가 있다.
장비의 옵션으로 치유 스킬의 효과가 2배 상승하며, 마력 소모도 없으니, 난사 또한 가능했다.
-파파파파팍!
그러나 난사까진 필요하지 않았다.
윌리아가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한 절대 회복은 헬레나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찰나의 빈틈을 노리며 파고든 내 후속 공격을 데스나이트가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끄윽.]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짓이기며 틀어박힌 대검을 보면서 새까만 피를 토했다.
그건 내 염력 스킬이 깃든 10자루의 대검이었다.
[놀랍도다. 내 사과하도록 하지. 너희를 경시하고 말았다.]
이 일련의 공방은 단 1초 사이에 벌어진 짧은 전투.
때문에 나는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에도 방심하지 않고, 듀랜달과 바리사다를 휘둘렀다.
윌리아와 시에나, 헬레나는 물론, 상황을 주시하던 펫들도 공격을 퍼부었다.
[크큭!]
하지만 애석하게도 데스나이트를 처치하지 못했다.
놈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더니, 뒤이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등장했다.
‘그럼 그렇지.’
무려 레벨 210의 보스 몬스터다.
이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놈이 순순히 죽어 줬으면 좋았겠지만, 아쉬움을 표하기엔 전투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래도 해볼 만하네.’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을 희망적으로 여겼다.
첫 격돌로 인해, 우리가 녀석을 상대로 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웨폰제이저를 통해 손에 쥔 검을 듀랜달에서 성검 칼립소로 교체했다.
동시에 윌리아와 시에나는 초록빛으로 이뤄진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내 등 뒤로도 푸른빛의 날개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검사가 하늘을 날며 싸우겠다는 건가?]
올더 데스나이트 케일이 이죽거리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비행 능력을 꼭 허공에서만 쓰란 법은 없지.”
보조 날개를 손에 넣은 윌리아와 시에나는 하늘을 날면서 싸우는 걸 선호하지만, 나는 여전히 바닥을 딛고 싸우는 걸 선호한다.
내 대답에 올더 데스나이트는 미간을 좁히며 의문을 표했다.
아무래도 그럴 거면 날개는 왜 펼쳤냐는 반응 같은데…….
“그건 보면 알아.”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도약 스킬을 사용했다.
검사는 도약 스킬을 돌진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다.
도약 스킬을 사용하면 빠른 접근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헙!]
-콰아앙!
내가 쓰는 도약은 일반적인 도약과 격이 다르다.
이능의 날개가 더해져 거의 순간 이동이나 다름없는 속도를 보여 주니까.
그뿐만 아니다.
이능의 날개와 디딤판, 벽타기 스킬 등을 활용하면 발을 디딜 곳이 반드시 지면일 필요는 없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내 움직임은 변칙적이다 못해 유동적이다.
공격 방식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회피능력도 상식을 넘어섰다.
[뭐, 이런…….]
덕분에 올더 데스나이트는 점차 말을 잃어 갔다.
* * *
대만 사태로 인해 시나리오 개시일이 당겨졌다.
이제 남은 시간은 D-42로 6주밖에 남지 않았다.
때문에 각 단체는 시스템이 시킨 대로 시나리오 조각을 찾는 데 열을 올려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사냥꾼 협회는 대만에 이어 두 번째로 시나리오 조각 수집을 완료할 수 있었다.
“협회장님은요?”
“곧 오신다고 하셨어요. 레벨업이 얼마 안 남으셨다고 보스 하나만 잡고 오신답니다.”
“허, 정말 대단하시네. 난 레벨이 100을 넘은 이후로 슬슬 힘에 부치는 느낌인데…….”
“하하, 괜히 세계 1위겠습니까? 협회장님은 재앙에 맞서기 위해 태어난 분인걸요.”
“하긴……. 대재앙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분도 평범하게 사셨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협회장님이 평범하게 산다는 건 좀처럼 상상이 안 되네요.”
“그렇죠? 심지어 유튜버 활동까지 하셨다잖아요.”
“만약 지금도 유튜브를 할 수 있었다면, 협회장님의 흑역사를 마음껏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시나리오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 이유는 오늘이 4번째 생존 이벤트가 진행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강이솔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사냥꾼 협회의 핵심 간부 중 하나인 제주팀의 박성만은 멀리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오오! 성만이 형! 이솔 씨!”
그는 바로 수원팀의 김현수였다.
지금은 비록 밀리고 있지만, 한때 윤시아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김현수는 현재 유일 등급의 무기 레바테인의 주인으로 더 유명했다.
이번에 사냥꾼 협회에 검, 방패, 활 3개의 유일 등급 장비가 풀렸는데, 그중 가장 많은 사람이 눈독을 들이던 검이 김현수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핵심 간부 중에서도 은근히 그를 시샘하는 사람이 많았다.
“화염의 검 레바테인의 주인이 오셨네.”
“저 형, 이제 나는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네.”
그리고 그건 박성만 역시 포함되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협회장의 제자인 김민희에게 레바테인이 돌아갔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녀는 신분도 신분이지만, 잠재력이 윤시아에 뒤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김현수는 다르다.
박성만은 자신이 김현수에게 밀린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아쉬워했다.
“질투는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법이지, 이제 그만 미련 버려. 형.”
“이, 이 새끼가?”
그런데 박성만이 더욱 열 받는 건 김현수의 약 올리는 듯한 저 태도였다.
고양이와 개 사이처럼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은 나름 명물이라 할 수 있었지만, 사냥꾼 협회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들인지라, 괜히 옆에 있다간 불똥이라도 튈까 다들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다툼이 멈추기까지 그래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이 메시지 때문.
[한국인 서**님께서 최초로 레벨 200대의 보스 몬스터를 토벌했습니다.]
[이 위대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한국인 서**님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도토리 키재기는 그만하라는 것 같은 타이밍과 내용이었다.
그에 박성만과 김현수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걸 느끼곤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대단해서 이젠 놀랍지도 않네.”
“그러게 말이야.”
경쟁의식조차 소용없게 만드는 존재.
서백호는 레벨이 높아질수록 간극이 좁혀지긴커녕, 더욱 벌어지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런 그를 볼 때 드는 감정은 경외심과 더불어 같은 편이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었다.
더욱이 서백호에 비하면 자신들의 능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란 생각에 오만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사냥꾼 협회의 간부들은 다른 나라 세력의 간부들에 비하면 무척 겸손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혀, 협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머지않아 메시지의 주인공인 서백호가 생존 이벤트를 대비하는 자리에 등장했다.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화려한 장비들과 너무도 아름다운 그의 파트너들에 절로 시선이 빼앗겼다.
무력, 권력, 빼어난 미모의 연인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하지만 까마득한 능력의 차이 때문인지 신기하게 질투심이 들지 않는 대단한 인물.
“아, 마침 잘됐네요. 성만 님. 이거 받으세요.”
“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종종 사람을 감동시키기까지 한다.
[클라렌트 / 한손 반장검 / 등급: 유일]
박성만은 마치 사탕 던져 주듯 서백호가 건네온 아이템을 받아들곤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이, 이건.”
“옵션과 스킬이 제가 가진 장비들과 겹치더라고요. 민희 씨에게 줄까도 생각했는데, 사이즈가 동급 대비 유독 커서 박성만 씨가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유일 등급의 장검 클라렌트를 받아 든 박성만은 너무도 감동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특전사 출신의 그가 울 줄은 몰랐던 서백호는 깜짝 놀라 급히 말을 이었다.
“고, 공짜로 주는 거 아닙니다. 이걸 박성만 씨에게 주는 대신 남아 있는 떠돌이 상인 소환권을 제가 한 장 더 가져갈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