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190화 (190/273)

190화 폭주 (1)

필리핀은 1억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국가이자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관광 국가였지만, 현재는 대재앙의 참혹함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국가로 꼽힌다.

고등 몬스터의 등장 비율이 높은 데다가 군사력도 그리 강하지 않고, 섬나라의 특성상 국민의 보호가 쉽지 않아 인구의 과반수가 초기에 죽어 나갔다.

또한 대통령을 포함해 국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목숨을 잃으며 정부가 무너지니, 군인이나 경찰 등, 힘 있는 자들이 각 지역의 지배자 행세를 하며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간이 지나 화기를 포함한 군사 무기들이 사용 불능이 되어, 왕 노릇을 하던 이들이 자연스레 몰락하고, 그 밑에서 코인 벌이를 위해 노예처럼 굴려지던 사냥꾼들이 굴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굴기도 반쪽짜리였으니.

한창 성장했어야 할 시기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만큼, 사냥꾼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사냥꾼들의 수준이 높지 않으니 위기는 수시로 닥치고, 사냥꾼 중에서도 과거를 잊은 채 타인을 갈취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필리핀은 계속 줄어가는 인구처럼 미래가 밝지 않았다.

[4시간이 경과 했습니다.]

[현재 성장 순위를 발표합니다.]

1위. 대한민국 서** / 레벨: 30

2위. 대한민국 시** / 레벨: 25

3위. 대한민국 윌** / 레벨: 24

4위. 미국 ***주 / 레벨: 23

5위. 인도 ***자다브 / 레벨: 22

6위. 미국 ***제임스 / 레벨: 22

7위. 대한민국 윤** / 레벨: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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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위. 필리핀 **파스쿠알 / 레벨: 16

하지만 위기에서 영웅이 등장하는 법.

‘호세 파스쿠알’이란 한 남성이 부상하기 시작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혼란이 가득하던 필리핀에 체제를 갖추고, 악인 토벌과 함께 세를 불려간 그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덕분에 호세 파스쿠알과 그의 직속 파티는 인근 국가(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최상위 팀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수준이 되었다.

“가까스로 100위 안에 들었네.”

능력과 재능이 넘치는 호세 파스쿠알.

그러나 떠오르는 필리핀의 젊은 영웅도 세계에서 난다긴다하는 괴물들 틈에선 존재감이 흐릿한 게 현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4시간 만에 레벨 30을 찍는 게 가능하지? 분명 모두가 아무것도 없이 똑같이 제로에서 시작했는데.”

특히 천상계 중에서도 절대자의 위치를 가진 서백호의 존재는 그에겐 수수께끼 같을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초기화된 이벤트에서까지 도대체 뭐가 다르기에 자신과 그 사이에 이런 차이가 벌어진단 말인가?

“완전히 제로는 아니지요. 아무것도 모르던 때와 달리 지금은 몬스터의 공략법도 알고 있는 데다가 무기 사용도 익숙하고, 전투 노하우 또한 몸에 배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차이는 단순히 공략법이나 노하우로 때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아. 레벨 30이면……. 대충 레벨 16인 나보다 15배 많은 경험치를 습득했단 건데. 혼자서 그게 가능해?”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파스쿠알의 반응에, 운 좋게 그를 일찍 만나 파티를 이룬 필리핀팀의 간부도 어깨를 으쓱여야 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상위권을 차지한 인원 중 상당수가 지난 이벤트 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이들이란 겁니다. 즉, 이 순위는 운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란 소리죠.”

“거참…….”

부정행위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그 정돈 파스쿠알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가슴으론 이해가 안 될 뿐이지.

“랭킹 1위 전투 영상을 봤던 시청자들에게 물을게. 그와 나의 차이가 그렇게 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ㅇㅇ 차이 개큼]

[아뇨 별로 안 큽니다]

[어딜 비벼!]

[카리스마는 파스쿠알 님이 위예요!]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야]

[솔직히 잘생김은 님이 승]

[그가 호랑이라면 너는 고양이…… 아니 물벼룩임]

[여러분 필리핀 사람이면 파스쿠알을 응원합시다]

그랬더니, 채팅창에 불이 났다.

서백호를 찬양하는 이들과 파스쿠알을 떠받드는 시청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대부분이 필리핀 사람인 시청자들에게 물은 건데도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자 파스쿠알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필리핀의 영웅인 만큼 극성팬도 많은데, 이렇게 의견이 나뉜다는 건 상대가 대단하단 것을 증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봤자야. 개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선 한계가 있을 테니까. 당장 우리가 둘러싸기만 해도 어쩌지 못할걸?”

[응, 한 방 컷!]

[응원합니다! 파이팅!]

[1초는 버티려나?]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채팅창의 반응은 한결같이 반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시청자에게 물어봐서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길게 떠들어 뭐 하겠어? 지금은 타인을 신경 써 봤자 나만 손해지.”

“맞는 말씀입니다.”

파스쿠알은 애써 서백호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사냥을 이어 갔다.

“대장!”

“어!? 파스쿠알 대장님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의 파티엔 필리핀 소속 사냥꾼들이 속속들이 늘며 어느새 20명을 달성하게 되었다.

인원이 많아지니, 생존율이 올라가고 사냥의 실패 확률도 낮아졌다.

비록 경험치도 분산되었지만, 그만큼 몬스터를 많이 잡으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탐색에 나선 동료들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대장! 서큐버스 사냥터 발견했습니다!”

“오, 그래?”

서큐버스는 매혹만 잘 막아 내면 전투력은 보잘것없는 몬스터다.

쉽게 말해, 효율이 매우 좋은 사냥터를 찾아냈단 의미다.

“허공에 대고 불만 좀 토했더니,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인걸?”

“그러게 말입니다.”

때문에 그는 기대감을 표하며 일행들을 이끌고 서큐버스 스폰 지역에 들어섰다.

그러자 멀리서부터 달콤한 향기가 풍겨 오고, 알게 모르게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서큐버스 넷!”

그리고 머지않아 이들의 눈앞에 서큐버스들이 등장했다.

-퍼퍽! 퍽!

-서걱! 서걱!

매혹의 파훼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사냥은 어렵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 정도면 다음엔 더 높은 순위를 기록할 수도 있겠는걸?”

덕분에 이들의 성장 속도는 이전보다 확실히 빨라졌고.

“대장! 하급 매혹 방어 스킬북 획득했습니다!”

“오!”

매혹 방어 스킬북까지 나오면서 속도는 물론, 안정감까지 더해졌다.

그로 인해 파스쿠알은 언제 아쉬움을 표했냐는 듯 웃음기 띤 얼굴로 사냥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어? 대장! 저기 보세요!”

잠시 후, 한 파티원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자연스레 파스쿠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멀리서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엄청난 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는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전투 난이도가 높습니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의 사냥에 성공할 시 귀한 보물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에 파스쿠알은 눈을 번쩍 떴다.

‘귀환 보물?’

탐색 스킬이 없어서 레벨을 포함해 정확한 몬스터의 정보는 볼 수 없었지만, 결코 놓쳐선 안 되는 몬스터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저거 잡자.”

“괜찮을까요?”

“어차피 레벨 20대의 필드에서 나온 녀석이야.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어? 그리고 여기선 죽어도 진짜 죽는 게 아니니. 도전을 망설이지 말자고.”

“알겠습니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의 외형은 서큐버스와 비슷한데, 더 큰 날개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장도 190이 훌쩍 넘어 보였다.

하지만 쓸데없이 아름다운 외형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서큐버스들처럼 전투력은 썩 높지 않을 것 같았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니까, 신중하게 움직여!”

파스쿠알과 그의 동료들은 전투태세를 취하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등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낀 파스쿠알이 본능적으로 상체를 틀었다.

-서걱.

-툭.

그러자 방금까지 그와 나란히 서 있던 동료의 목이 떨어지고, 파스쿠알의 뺨엔 한 줄기 붉은 선이 생겨났다.

화끈거리는 통증.

그건 칼에 베인 상처였다.

“대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린 그는 한발 늦게 자신들의 진영 한복판에 선 새로운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윽.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대가 얼굴을 들자 파스쿠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는 필리핀 사람이 아니지만, 얼굴을 모를 수 없는 유명인이었다.

[어?]

[어어?]

[흥미진진!]

[저런 비겁한 놈!]

시청자들 역시 크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현 단계에서 세계 최고, 최강이라 불리는 사냥꾼.

대한민국의 서백호였기 때문이다.

“하, 한국의 대장이 왜?”

그리고 파스쿠알이 잘못 알아본 게 아님을 증명하듯.

상대가 검을 휘두르자, 백광이 번뜩이며 일순간 3명의 목이 날아올랐다.

-서걱! 서걱!

-푸왁!

그들 모두 필리핀팀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서백호의 능력치는 레벨 30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을 텐데, 검이 어찌나 빠른지 제대로 눈이 쫓질 못했다.

“젠장! 인간 사냥을 하겠다는 건가!?”

몬스터를 뒤에 두고 인간끼리 싸워야 하다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 레벨이 높았던 이유를 이제 알겠어. 자신의 명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거로군!”

그럴 줄 알았다는 파스쿠알의 당당한 외침.

하지만 오해였다.

“대장! 저 사람 머리 위 봐 봐!”

“응?”

그의 머리 위에 이런 메시지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매혹에 걸린 상태입니다.]

“어?”

알고 보니 그는 특수 이벤트 몬스터에게 붙들린 상태였다.

즉, 자의에 의한 전투가 아니란 뜻.

괜한 오해로 얼굴이 붉어진 파스쿠알이 한 동료의 이름을 외쳤다.

“크리스!”

“네, 넵! 하급 매혹 방어!”

그는 서큐버스를 잡고 얻은 매혹 방어 스킬을 익힌 서포터였다.

매혹 스킬이 풀리기만 하면 위기는 끝이다.

때문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해제를 위해선 상급 이상의 매혹 방어 스킬이 필요하다는데요!”

“뭐 상급!?”

애석하게도 단단히 잘못 걸리고 말았다.

‘하긴, 저 정도 되는 사람이 매혹에 걸릴 정도면 어중간한 건 아니었겠지.’

파스쿠알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재차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하지만, 토벌되어 줘야겠어.”

매혹 스킬을 깨는 방법은 제법 많다.

하지만 그들이 그 방법을 하나하나 시도해 볼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그를 쓰러뜨리는 게 최선이었다.

“알렉스! 네가 이벤트 몬스터 물고 드리블해!”

“아, 알겠습니다.”

파스쿠알은 재빠른 동료에게 특수 서큐버스의 드리블을 하도록 지시하곤 서백호에게 접근했다.

그런 그와 함께 동료들이 움직였다.

4명이 죽고 1명이 드리블을 위해 빠졌지만, 남은 수는 15명으로 여전히 많았다.

무엇보다 그 15명 중엔 파스쿠알이 속해 있지 않은가.

‘그래,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한국의 대장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자고.’

서백호의 레벨이 더 높긴 하지만, 이 정도 인원을 제압하는 건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

“방어 위주로 태세전환! 정신 똑바로 차려!”

“네!”

전투가 재개되었다.

파스쿠알은 프리 롤.

나머지 인원은 방어 중심으로 간간이 공격하면서 시간을 끄는 역할이었다.

-퍼억! 빠각! 서걱!

그런데 파스쿠알의 작전은 통하지 않았다.

“무, 무슨?”

“컥!”

“으악!”

서백호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최대한 소극적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대응을 하려 했음에도 누구 하나 서백호의 일 검을 막지 못해 목이 날아갔다.

-촤아아악!

검의 귀신이 있다면 저럴까?

“허…….”

마치 꽃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붉은 핏물 속에서 춤을 추는 서백호를 보며, 파스쿠알은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괴물이다.

괴물 중에서도 진짜 괴물.

“…….”

정신을 차려 보니, 상대의 무용에 넋을 잃고 걸음을 멈춰선 파스쿠알 본인 외에 살아남은 필리핀팀은 아무도 없었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를 열심히 드리블하던 동료마저 죽은 지 오래.

[내가 아주 좋은 검을 얻었어.]

키와 날개가 큰 것 빼곤 서큐버스의 외형과 동일한 특수 이벤트 몬스터는 서백호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만족스레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매혹 스킬의 영향인지, 서백호는 아름다운 여인의 육탄 공격에도 표정 변화 따윈 없었다.

곧이어 그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스쿠알을 향해 서백호가 접근했고, 이내 검을 휘두르며 전투에 마침표를 찍었다.

“컥!”

제대로 전투조차 성립되지 못한 일방적인 패배.

필리핀의 젊은 영웅이라 불리며 주변의 존경을 받던 파스쿠알도 서백호 앞에선 흔하디흔한 잡캐일 뿐이었다.

* * *

‘뭐야, 나한테 쓴 매혹 스킬은 남발하지 못하는 건가? 저 사람도 쓸만한데 왜 사용하지 않지?’

쪽팔리게도 몬스터의 매혹에 당해 20명으로 이뤄진 팀을 전멸시킨 나는.

몸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정신은 매우 또렷했다.

서큐버스가 어찌나 앵겨 대는지 시야 가득 맨살이 보여 므흣한 장면이 연출 되고 있지만, 이 장면이 여자 친구에게 걸리면 뒷일이 걱정되는 만큼, 어서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 또 왔네? 역시 서큐버스가 너무 좋은 사냥감이란 건가? 사냥팀이 끊이지 않고 계속 오네.’

하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생길 리 없고.

“커억!”

“이, 이럴 수가 혼자서 어떻게…….”

그사이 매혹에 당한 나는 보스 몬스터라도 되는지, 인간이 보이는 대로 썰어 넘겼다.

그런데…….

[경험치 1,210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1,435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1,321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인간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와도 같은 이곳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니, 그로 인한 보상은 그대로 내게 들어왔다.

덕분에 레벨업까지 하게 되자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도 썩 나쁘진 않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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