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195화 (195/273)

195화 고강화 (3)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비로 무장한 서백호.

그는 가만히 바라보는 게 힘들 만큼 강한 위압감을 뿜고 있었다.

사실 서백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의 정체는 그가 쓰고 있는 왕관 형태 투구인 에기르 헬름(유일 등급)의 효과였다.

하지만 사실을 모르는 회의 참석자들은 그 위압감이 레벨이 높아지면 자연히 흘러나오는 강자의 기운 같은 거라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이번 회의는 기탄없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을 만큼 평화로운 주제가 아니거든.’

어디서든 힘 있는 자가 대화를 주도하는 법.

서백호는 에기르 헬름의 효과를 잊은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켜 놓은 거였다.

이번 회의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재각인시키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재앙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국제회의인 만큼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백호는 순진해 보이는 미소를 띠며 그리 말했지만, 그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재앙 이후 뒤바뀐 국가 간 파워 밸런스에 불편함을 표하거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서백호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불만이 있는 사람이어도 서백호의 시선이 향해질 때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내리깔았다.

에기르 헬름의 위압 효과 덕이었다.

“하하, 이렇게 많은 국가 지도자가 한자리에 다시 모이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 대한민국 사냥꾼 협회와 협회장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냥꾼 협회에선 각국의 지도부를 웨이포인트 점퍼를 이용해 몽골 울란바토르로 실어 날라야 했다.

이는 전 세계 주요 지역의 웨이포인트를 찍어둔 데다가, 웨이포인트 점퍼의 보유량이 넉넉한 사냥꾼 협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연하게 서백호와 사냥꾼 협회를 금칠하는 미국 대통령의 태도에 일부 사람들의 찡그려진 표정이 풀렸다.

미국이 솔선하여 사람들에게 현실을 인식시켜 주니 목이 빳빳한 옛 열강들도 마냥 불편함을 표할 순 없었다.

“우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서백호는 고맙다며 미국의 대통령에게 눈으로 인사를 전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에 서백호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새로운 중국의 주석 류이창(신 상하이방)이 반문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라뇨?”

“각국의 시나리오 조각 수집 현황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각국 대표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다들 대만 사태 이후 시나리오 조각 수집에 열을 올리고는 있지만, 수집을 완료한 국가는 대만 이외엔 한국뿐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서백호는 담담하게 답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확보하지 못한 조각이 어떤 식으로 처리될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국민 중 누군가에게 남는 조각이 랜덤으로 배정된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최악의 경우도 생각을 해야지요.”

시나리오 시작까지 겨우 한 달여가 남은 상황.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시나리오 조각 수집을 완료하지 못할 터이다.

“어쩌면 수집하지 못한 시나리오 조각은 전쟁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죠.”

“예를 들면 어떤 방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싸워서 뺏을 수밖에 없는 적대 세력을 배치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남은 시나리오 조각의 영주가 특수 몬스터가 된다든가, 인간 사냥꾼이 된다든가, 어쩌면 그런 것들보다 무서운 적이 등장할 수도 있죠.”

“…….”

서백호의 말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일리 있어 보이는 말이었기에 쉬이 흘려들을 수 없었다.

“문제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각국의 시나리오 조각 보유 현황을 이 자리에서 공개할 이유는 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을 이은 사람은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처음 서백호가 입장할 때부터 반감을 강하게 드러낸 인물 중 하나였다.

서백호의 시선이 향하자 강한 위압감에 러시아 대통령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참으로 배짱이 두둑한 인물이었다.

“저는 문제가 될 부분은 사전에 차단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시나리오 조각 획득량이 저조한 나라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리고 이어진 서백호의 대답에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도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서백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사냥꾼 협회 측에서 타국의 시나리오 조각을 수집하겠다는 겁니까?”

시나리오 조각의 보유자는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검증이란 과정을 거쳐 한 지역의 영주가 된다.

때문에 지금 서백호의 말은 사냥꾼 협회가 타국에 영지를 확보해 놓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매우 위협적인 제안이었다.

혹시라도 서백호가 딴 맘을 먹으면 나라 전체를 빼앗길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시나리오 조각 수집을 미리 완료한 저희가 될 수도 있고, 대만이 될 수도 있죠.”

사실상 대만도 지금은 사냥꾼 협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그러니 서백호의 제안이 마냥 좋게 들려오지 않았다.

“요, 욕심이 지나치십니다. 이 회의의 목적이 사냥꾼 협회의 타국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였습니까?”

러시아 대통령에 이어 독일 총리가 끼어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에 서백호는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서 말했듯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야 안전한 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기존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겠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렇지 못할 테니까요.”

“……. 아무리 그래도 국토를 타국에 넘긴다는 게……. 더구나 확보하는 데 실패한 시나리오 조각이 몬스터나 악인에게 배정될 수도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 아닙니까?”

그들의 걱정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국가관이 흐릿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내 나라의 땅을 타국에 넘기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마음에 여유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거다.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모든 게 부질없지 않겠는가.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쪽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겁니다.”

“네?”

“지난 대만 사태로 전 세계에 고등 몬스터가 준동했을 당시 저희 사냥꾼 협회는 많은 나라를 구했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죠. 우리가 노력한 만큼 구조비란 명목으로 소정의 비용을 받기로 했으니까요. 하지만 살려만 주면 무엇이든 하겠다던 사람들이 돈을 낼 때가 되자 말을 바꾸더군요. 그때 느꼈습니다. 도움을 퍼 줄 필요 없다는 것을요.”

부정적인 반응 속에서 서백호는 선언하듯 말했다.

“앞으로 우리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나라는 저와 사냥꾼 협회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겁니다.”

서백호의 제안은 어디까지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것.

때문에 매우 강경하게 입장을 표명했다.

“그렇다면 동맹도…….”

“네, 저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라와만 동맹을 맺을 겁니다.”

시나리오 시작 전에 전 세계가 동맹을 맺게 만들어서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거라 생각했던 이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비동맹국은 어떻게 상대하실 생각인지요?”

“시스템 규칙에 따르겠죠.”

“말 안 듣는 비동맹국은 정복하겠다는 뜻입니까?”

“차라리 저희의 관리를 받는 편이 시민들도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

단호한 그의 발언이 몇몇 국가엔 세계 정복 선언으로 들렸다.

아니, 그 감상이 정확히 맞다.

세상을 동맹과 비동맹으로 이분하고, 비동맹을 향해선 정복을 불사하겠다고 하니, 이게 세계 정복이 아니면 뭐겠는가.

이전까지 그가 보인 행보를 생각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대응이었다.

“허, 협회장께서 일본 만화를 너무 많이 보신 모양이군.”

덕분에 몇몇은 그런 그를 오만하다며 이죽거렸으나, 사냥꾼 협회의 협회장 서백호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규칙에 따르는 것뿐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자국의 영토 일부를 내어 주는 한이 있어도 동맹을 맺을지, 아니면 말지.

갑작스러운 선택 강요에 많은 이들은 신음을 토했고.

“시간 낭비만 했군. 나는 가겠소.”

한껏 화가 난 러시아 대통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 눈치만 보던 다른 나라의 수장 몇몇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때.

“어째서입니까?”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한 인도 측 자리에서 한 청년이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그는 지난 이벤트에서 윌리아와 편을 맺었던 인도의 아르준 자다브였다.

“협회장님께서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한껏 뜨거워졌던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듯 냉정해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국가의 수장들도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런 그의 물음에 서백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메인 시나리오라는 콘텐츠의 끝이 인간끼리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 그게 무슨?”

“시나리오의 끝은 인간과 마족의 전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다소 건방진 태도를 취한 것도 그때를 대비해 세계의 지휘 체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그런 것이고요.”

아직 마계는커녕 마경 구경도 못 해 본 이들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그들에겐 서백호의 발언이 뜬금없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다.

서백호는 세계 제일 강자이자, 다른 사람들보다 수 걸음 앞서 나가는 인물인 만큼, 그가 가진 정보를 감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런 말을 한 데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현실적이었다.

“마계엔 마왕이 있고, 그 휘하에 여러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들이 있습니다. 시나리오로 인해 만들어질 지구의 체계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으음…….”

“물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추측 단계니까요. 하지만 저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 * *

이후 나는 마경과 마계의 정보를 꺼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하나 같이 생각이 많아진 모습을 보였다.

회의장을 벗어나려던 국가 정상들도 어느새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상태.

나는 힐끔 시선을 돌려 인도인 남성을 바라보았다.

‘미국의 대통령이 내게 꺼낼 질문이었는데…….’

인도인 청년 아르준 자다브가 내게 던진 질문.

그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원래 그 질문은 미국의 대통령이 때맞춰 내게 할 예정이었다.

질문의 주체가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회의가 바라던 반향으로 진행이 되고 있으니 나는 속으로 만족감을 표했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면 미리 그렇다고 말씀을 하실 것이지.”

“하지만 협회장님의 의견이 극단적인 건 변함없습니다.”

여전히 내게 불만을 품은 이들도 있었으나, 새로운 적의 등장에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정신이 팔렸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이 내 뜻에 따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그런데.

나는 난데없이 밀려오는 불쾌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회의실의 천장을 바라보아야 했고.

-모, 몬스터!

-막아! 요격해!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회의실 건물의 천장이 터져 나갔다.

[하하! 레벨 높은 인간들이 먹기 좋게 한자리에 모여 있구나!]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몬스터였다.

그것도 강하디강한 레벨 170의 엘더 몬스터.

[엘더 올드리치 / 레벨: 170]

검은색 바탕에 은색 실이 수 놓인 화려한 로브 차림의 리치가 피처럼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등장했고, 덕분에 회의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레벨 170의 엘더 몬스터라고?”

“저런 몬스터가 왜 갑자기!?”

“도, 도망쳐! 저건 못 이겨!”

참고로 저건 내가 작전을 위해 끌어들인 게 아니다.

진짜 그냥 우연으로 나타난 몬스터인 거지.

고레벨의 사냥꾼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인간을 잡으며 레벨을 올려 온 몬스터인 것 같았다.

레벨 170의 마법계 엘더 몬스터라면 손가락 하나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하고도 남을 강적이었다.

[하하하! 죽어라! 죽어서 내 양분이…….]

-고고고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엔 내가 있다.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던 엘더 몬스터는 난데없이 솟구친 푸른빛에 삼켜졌고.

그 푸른빛은 녀석을 삼킨 것으로 모자라 흐릿했던 하늘을 꿰뚫으며 구름 일부를 도려내듯 증발시켰다.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구름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고.

“회의 계속하죠.”

내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성검을 거두며 말하자 사람들은 벙찐 표정을 지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레벨 170 엘더가 일격에…….”

이거 뜻하지 않게 무력 과시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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