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고강화 (4)
내가 강하단 건 알고 있었을 테지만, 레벨 170의 엘더 몬스터마저 단번에 죽여 버릴 거라고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내 무력은 회의에 참석한 각국 수장들의 상식 수준을 넘어섰고, 덕분에 다들 생각이 많아진 듯 보였다.
이후 회의는 막힘이 없었다.
일부는 내 무력에 겁을 먹어서인지 더욱 눈치를 살피게 되었지만, 대부분은 나를 존중하며 말 하나하나에 열을 내지 않고,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 러시아는 시나리오 조각이 동과 서 2개 구역으로 나뉘어 분포되어 있습니다. 서부에 25개, 동부에 15개, 총 40조각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중 서부 14개, 동부 6조각을 획득한 상태입니다.”
“대단하시네요. 국토가 넓은데도 벌써 20조각이나 찾아내시다니.”
“흠흠, 서부는 이미 과반수 이상의 조각을 획득했고, 지금의 페이스를 보면 동부도 충분히 제시간에 과반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즉, 러시아는 우리 협회의 도움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커버가 가능하단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린 초기부터 시나리오 조각 확보에 신경을 써 온 입장인지라, 다른 나라들보단 사정이 나을 테니까요.”
“상황에 여유가 있으면 굳이 저희가 지원할 필요는 없겠죠.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무력 시범 이후 러시아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이 예의를 갖춰 협조적으로 나오니, 회의 진행이 더욱 수월했다.
우선 각국의 시나리오 조각 현황을 파악하고, 급히 지원이 필요해 보이는 나라들이 가려졌다.
“아니, 인도네시아는 조각 획득률이 고작 10%도 안 되면서 비협조적으로 나온 거였습니까?”
“조각 획득률이 저조한 만큼, 쉽게 주도권이 넘어갈 수도 있는 거니까요.”
“중국도 문제가 크군요. 구역이 많이 나뉘어 있는 만큼 조각 습득률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가 너무 커요.”
중국과 인도네시아처럼 인구 대국이거나 호주, 아르헨티나 등 땅이 큰 나라들의 상황이 안 좋았다.
그리고 그들은 바뀐 여론에 순응하듯,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진작 회의가 이렇게 진행되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역시 타국이 우리나라의 시나리오 조각 수집을 도와주는 건 내키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국토의 일부를 떼어 주는 건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 100% 일치되는 결과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여러분 7개국은 앞서 말했듯 사냥꾼 협회의 지원 대상에서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겠죠?”
“그게 협회장님의 방침인 이상, 어쩔 수 없죠.”
“좋습니다. 여러분은 이만 돌아가시죠. 대신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나라는 총 41개국.
그중 7개 국가가 끝끝내 자리를 뜨고 34개국이 내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나는 남은 국가들과 이후의 대응에 대해 논의를 해 나갔다.
회의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모두가 만족스럽진 않아도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면서 포괄적인 협력 활동을 약속했다.
“오늘 회의 도중에 나간 국가와 아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국가들은 어쩔 예정입니까?”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고, 우린 샴페인을 터뜨리며 친선에 대한 조촐한 파티를 펼쳤다.
그때,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함께 다가와 물었다.
내 무력에 매료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태도를 바꾼 러시아 덕분에 예상보다 많은 나라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웃는 낯으로 솔직하게 생각을 밝혔다.
“윗대가리가 멍청하면 고통받는 건 국민이죠.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당연히 점령할 생각입니다.”
“…….”
그런데 내 대답이 지나치게 솔직했을까?
두 대통령이 움찔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 정말로 세계 정복을 바라는 건 아니겠죠?”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본과 몽골이 사냥꾼 협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만, 철저히 현지인들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고 있으며, 저희는 한 번도 국정에 간섭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중2병 같은 세계 정복이 아니라, 세계의 안정일 뿐이다.
다만 그 안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뿐이지.
물론,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우려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할 일은 아니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세계 주요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행된 회의를 통해 ‘국제 협력 기구’가 설립되었다.
국제 협력 기구를 설립한 건 사냥꾼 협회이지만, 초대 의장으로 추대된 것은 서백호가 아닌, 대한민국의 김응수 대통령이었다.
이 단체는 ‘국가 간의 협력’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사냥꾼 협회보다 대한민국 정부가 전면에 내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는 분명 명예로운 자리건만…….
김응수 대통령은 어째 짬 처리를 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만큼 서백호 협회장이 현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 능력을 믿고 있단 뜻이 아닐는지요.”
하지만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건 대통령뿐, 청와대 주요 인사들은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세계 최고 단체의 운영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니 말이다.
“참, 아이러니해. 대재앙이 발생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와중에 한국은 잘나가고 있으니까.”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상황.
대재앙 이후에 찾아온 느닷없는 전성기에 대통령은 쓴웃음을 흘려야 했다.
“참, 무기 제작 상황은 어떠한가?”
“순조롭습니다. 자금에 여유가 생긴 만큼, 수량 확보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은 국제 문제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도 순조롭게 풀어 가는 중이었다.
사냥꾼 협회에 의해 안전한 도시가 전국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최근엔 자금에 여유가 생긴 청와대도 자체적으로 안전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청와대는 사냥꾼 협회로부터 정기적으로 세금을 받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기술자들을 끌어모아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자금 상황이 매우 좋았다.
“전 국민의 강화라…… 참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그런 정부가 최근 사냥꾼 협회와 손을 잡고 공들이는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위급 상황 발생 시, 국민들의 생존력을 높이고자 전 국민의 레벨을 일정 수준 이상 올리자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서백호가 기획한 것으로 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정부에 정식으로 채택됐다.
때문에 현재 정부에선 이 일의 시행을 위해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해 줄 무기를 대량으로 수집, 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 국민의 레벨을 20 이상 올린다는 게 가능할까?”
서백호는 이번 이벤트에서 맨손에서 시작해 하루 만에 레벨을 50 가까이 찍는 기염을 토했지만, 싸워본 적이 없는 일반 국민들에게 레벨 20은 꽤나 높아 보이는 벽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이들이 이 기획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군 계기가 없어서, 누군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등을 떠미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가?”
“당연히 반대 여론도 있습니다만…… 앞서 활동한 사람들이 탈 없이 성공적으로 성장을 한다면 부정적인 반응도 자연히 수그러들 거라 생각합니다.”
초기엔 비록 많은 재원과 인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지만, 그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해결될 터이다.
레벨 20 이상의 사냥꾼이 많아지면, 당연히 정부와 사냥꾼 협회의 수입도 많아지고, 후인 양성에 도움을 줄 인력도 많아지게 되니까.
“이거 나중에 가선 대한민국에 초인들만 살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요.”
대통령은 청와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열심히 성벽이 올라가고 있는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청와대가 속한 생존 구역이 안전 도시화 되어가고 있는 광경이었다.
처음엔 혼란이 가득했지만, 이젠 제법 미친 세상에서의 삶이 익숙해진 대통령이었다.
* * *
한국의 전 국민 강화 계획.
레벨 20까지의 성장을 정부와 사냥꾼 협회에서 지원하는 이 계획엔 한 가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돌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목숨을 지켜 줄 안전장치의 존재다.
“으아악!”
-콰아앙!
계획은 좋은데, 만약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다면 국민들의 참여율이 저조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망자를 최소한으로 막는 게 필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 사냥꾼들을 감독관으로 일일이 현장에 파견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한국엔 감독관을 대신할 아주 훌륭한 대안이 존재했다.
“가, 감사합니다. 트롤 형님.”
-크룩.
바로 ‘엘더 이터 헬레나’라는 고등 몬스터가 펫처럼 서백호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백호는 헬레나를 이용해 전국의 생존 구역을 정비해 나갔다.
덕분에 사냥꾼 협회에서 대량의 몬스터를 부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몬스터들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뒤따른다고 해서 새삼스레 문제 될 게 없었다.
방금 오크와 맞서 싸우다가 자칫 크게 다칠 뻔한 국민을 구한 트롤 또한 서백호의 지시를 받고 헬레나가 파견한 몬스터 감독관이었다.
“와, 진짜 트롤 형님이 아니었으면 골로 갈 뻔했네.”
“진짜 든든하다.”
“정부와 사냥꾼 협회에서 전 국민을 레벨 20까지 키우겠다며 자신감을 표할 만하네.”
사람들의 칭찬을 알아듣는 건지 트롤은 콧바람을 뀌며 턱을 치켜들었고, 신입 사냥꾼들은 든든한 아군 덕에 안심하고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사냥꾼 협회에서 몬스터를 조종할 능력이 있으면 차라리 몬스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편하게 죽이게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냥 몬스터 샌드백을 바치란 거지?”
“그럼 편하잖아?”
저 트롤로 자신들을 지킬 게 아니라, 차라리 저 트롤을 손쉽게 사냥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낫지 않냐는 말.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모두가 그럴싸하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트롤을 형님이라 부르며 감사 인사를 했던 청년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이 생각 못 하겠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건가?”
“듣기론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냥할 경우 경험치를 획득하지 못한다더라. 그러니 이런 방법을 취하는 거겠지.”
“아, 그래?”
과거 서백호가 안전 텐트를 끼고 전투를 했을 때처럼, 지나친 꼼수는 시스템에 의해 차단을 당한다.
그런 문제가 있을 거란 걸 예상치 못한 이는 무안한 듯 뺨을 긁적였고.
트롤에게 구원받은 청년은 잔소리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레벨을 올려 봤자 무슨 소용이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텐데.”
“그냥 레벨 올려서 능력치만 높여 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 단순히 생존만 생각하면?”
“너 정말 레벨 20만 딱 찍고 끝내게?”
“애초에 그게 정부와 사냥꾼 협회의 계획이잖아.”
뭔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이는 동료에게 청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이건 기회야. 왜 그걸 몰라?”
“뭐?”
“안정적으로 전투 노하우를 배워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
“너 설마?”
“그래, 난 진짜 사냥꾼이 될 거다. 서백호 님 같은 그런 진짜 사냥꾼이.”
다들 정부의 지원 사업이라 참여하는 것이지, 대재앙 초부터 발버둥 쳐 고레벨을 달성한 사냥꾼들에 비하면 한참 뒤처진 이 시기에 그런 꿈 같은 생각이나 한다니.
동료들은 그의 선언과도 같은 포부에 혀만 찰 뿐이었다.
그런 동료들의 냉랭한 반응에도 청년은 굴하지 않고, 이 기회를 살려 열심히 실력을 쌓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