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218화 (218/273)

218화 복귀 (2)

시나리오 자격 검증 시험을 치르는 도중 사망하게 되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 사실은 동료들과 같은 임무를 받았던 러시아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동료가 시험 도중 사망했는데, 그들은 어차피 가상의 세계에서 죽은 거니 현실로 돌아가면 그 동료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복귀 후에도 사망한 그 동료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시험이 시작되고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 아직 복귀하지 못한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은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 수는 237명.’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이 각국을 대표하는 주요 전력임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피해였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 안에 대한민국 사냥꾼 협회의 리더이자 전 세계 최고의 강자인 서백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백호 씨가 이대로 복귀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때 미국 제일의 사냥꾼이라 불렸지만, 현재는 LA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클로에 주’에게 그 위치를 빼앗긴 제임스가 물었다.

그러자 클로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되긴. 전 세계를 잇던 구심점이자 강제력이 사라진 셈이니, 곧 벌어질 대전쟁은 개판이 되겠지. 분명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거야.”

클로에의 대답에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국 서열 3위 사냥팀의 리더이자 거구의 흑인 남성 웨이드가 끼어들었다.

“이봐 광견. 겨우 한 사람이 사라진 거로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참고로 광견이란 건 클로에를 가리키는 수많은 별명 중 하나였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그녀는 성격이 지랄맞기로 유명했다.

결코 악인이 아니지만, 클로에가 친절하게 구는 상대는 어린아이들과 서백호뿐이었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생선 대가리 새끼가……. 대한민국이란 작은 나라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의 조율자 역할을 할 수 있던 건 전적으로 백호 님이 계시기 때문이잖아. 그런 인물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가 없어도 대한민국에 제법 괜찮은 사냥꾼들이 많잖아?”

“뭐, 너보다 나은 사냥꾼이 한 다스긴 해. 하지만 백호 님처럼 압도적이진 않아. 당장 우리 대통령이 나긋나긋하게 대한민국을 대하는 건, 혹시라도 백호 님이 백악관 천장을 뚫고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평화를 외치니까 다들 마지못해 따르는 척이라도 하는 거지.”

거침없는 클로에의 반응에 웨이드가 빡빡 민 자신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쓸며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들이 자리한 회의실의 상석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 영양가 없는 회의를 봐. 욕심 그득한 대사만 날아다니는 꼴을. 넌 이게 정상적으로 보여?”

[대책 회의]

짧게 쓰인 문구.

하지만 이 대책 회의는 서백호의 사망이 확실한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한국의…….

아니, 사냥꾼 협회의 대표 동맹이라는 미국이 이 정도이니,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백호가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게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러니 다들 서백호가 없는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이 회의가 역겹단 것은 이견이 없긴 해.”

웨이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났음에도 클로에의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팍스 아메리카의 재림을 기대하는 건가? 상황 파악 못 하고 신이 나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 보여. 아직 시나리오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친서백호 파의 클로에는 도끼눈을 뜨고 회의장 내부를 훑었다.

말은 거침이 없어도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불안감은 상당했다.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켜 주던 방패가 사라진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회의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누군가는 사냥꾼 협회를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누군가는 아예 적극적으로 영토전을 벌여 아메리카 대륙을 일통하자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내뱉었다.

“서백호가 죽었다면 그를 따르던 NPC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회유가 가능한가?”

“주인을 잃은 NPC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하더군. 그 둘이 사라지기 전에 호감도 작업을 하면 회유하는 것도 가능하긴 할 거야.”

회의를 듣다가 결국 짜증이 솟구친 클로에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덜컥!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열리면서 정보국의 부국장이 급히 달려왔고, 그가 심각한 얼굴로 대통령에게 어떤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의 모습은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여러분 기쁘게도 서백호 협회장께서 막 복귀하셨다는군요.”

“!!!!!!”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이어진 그 말에 클로에가 언제 짜증을 부렸다는 듯 표정을 풀며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급격한 감정 변화에 곁에 있던 제임스와 웨이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고로 오늘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회의 내용은 외부로 유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치 꽁지에 불이 붙은 강아지마냥 도망가는 정치인과 몇몇 사냥꾼들.

이들을 향해 클로에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다.

“누구 마음대로! 어떤 새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전부 기억해 뒀어!”

이 자리에 서백호와 클로에가 친밀하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이 아직 나가지 않았음에도 거침없이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저, 저기 클로에 양?”

찔리는 게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달려와 그녀를 말려야 했다.

“흥!”

이와 같은 상황은 전 세계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백호의 복귀를 아쉬워했고, 누군가는 반겼다.

사망으로 추측되었던, 서백호의 부재는 명백하게 피아를 구분 지은 것이다.

* * *

가상 세계에서 무려 한 달 반(현실 시간으로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오고 싶어 했음에도 가상 세계에서 친해진 인연이 있어, 작별 인사조차 못 하고 온 게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이 편안한 집이 최고인 것 같다.

“이, 이제 좀 떨어지는 게…….”

다만 딱 하나 불편한 게 있다면.

복귀하고부터, 윌리아와 시에나가 내 양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아는 연인이니 괜찮다.

하지만 시에나는 동생처럼 여기는 존재기에 조금 그렇다.

나는 딱히 하렘 만화의 주인공이 될 생각도, 양다리를 걸칠 생각도 없기에 시에나의 행동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밀치기엔 내가 걱정을 끼치게 만든 장본인인지라 미안하고.

“나를 팔에 난 종기라 생각해.”

그래서 말로 잘 구슬려 보려 했지만, 시에나는 꼭 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전투 상황이 아닌 만큼 크게 상관이 없으려나 싶긴 한데…….

“크흠, 말씀하신 대로 각국에 협회장님의 복귀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곳이 중립 도시의 전쟁관이며, 한반도의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은 물론, 사냥꾼 협회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들 친숙한 사람들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까 싶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윌리아와 시에나를 양팔에 붙인 채, 강이솔이 전달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다행히 국내엔 낙오자 한 명 없이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 모두(20명)가 무사 귀환했습니다.”

“더불어 해외 지부와 동맹국의 시나리오 조각을 보유한 협회원 72명 역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고요.”

“하지만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236명이 시험 중 복귀를 못 했고, 852명이 시험에 탈락했다고 합니다.”

내가 귀환하고 얼마 안 있어 모든 자격 검증 시험이 끝났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 말은 즉.

‘복귀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망했다는 거지.’

애석한 소식.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돌아오지 못한 외국인들의 걱정이 아니다.

앞으로 시나리오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가 중요하지.

“모두 이 메시지가 보일 겁니다.”

강이솔의 진행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전쟁관 상석에 자리한 지도로 향해졌다.

원래 그곳엔 한반도 지도가 떠 있었는데, 지금은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영토 지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메시지가 함께였으니까.

“이 영토 지정이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겠죠. 그러니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영토 지정을 진행할지. 아니면 다른 나라들의 상황을 보면서 간을 볼지요.”

시나리오의 시작.

마치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준비 운동이었단 느낌을 들게 하는 불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의외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진지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다.

“협회장님이 정해 주세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하는 게 원래 사냥꾼 협회의 분위기다.

그런데 내가 없는 동안 생각이 많았던 모양인지, 어째 다들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전엔 믿을 수 있는 동료 혹은 우상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군주를 바라보는 충성심 가득한 신하의 눈빛을 하고 있다.

내가 불길 속에 뛰어들라 해도 지체 없이 따를 것 같은 각오가 느껴진달까?

덕분에 책임감이 양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 선택은 거침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를 필요는 없겠죠. 바로 진행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지도와 가까운 쪽에 서 있던 윤시아가 즉시 영토 지정 메시지를 터치했다.

[영토 지정을 시작합니다.]

영토 지정은 길게 끌지 않았다.

예전에 우리끼리 사전에 정해 놓은 적 있었으니까.

3개의 시나리오 조각을 보유한 나는 세 개의 영토를 택할 수 있었는데, 서울과 충청남도, 강원도 서부를 골랐다.

서울은 제일 중요한 곳이라서, 충청남도는 월광도와 가의도가 자리해서, 강원 서부는 한반도의 중심이라 택했다.

[영토 지정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토 지정이 끝나자 시나리오 조각 보유자들의 외형에 변화가 생겼다.

정확하겐 신체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 지역 영주]

모두의 머리 위에 해당 문자와 함께 왕관 문양이 이모티콘처럼 떠오른 것이다.

누가 봐도 특별 취급.

아니, 내 입장에선 먹잇감이라 표현할 수 있는 마크였다.

그렇게 시나리오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데…….

[영토를 배정받은 영주들의 지배권이 부여됩니다.]

[영주는 영지 내에 ‘행정관과 기사를 임명’할 수 있으며, 행정관과 기사로 임명되지 못한 일반 영지민은 영주의 명령에 의해 즉시 감옥에 구금되거나 영지 밖으로 추방될 수 있습니다.]

말로만 영주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명령어 하나로 사람을 구금하거나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이 쥐어졌다.

그리고 영주의 권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영주는 매달 기본 봉급으로 1억 코인을 지급 받으며, 추가로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습니다.]

[영지가 일정 수준 발전하거나 인구가 증가하면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영지전에서 승리할 경우 대량의 추가 경험치와 코인 등의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영주란 지위가 얻을 수 있는 보너스는 생각 이상으로 커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메시지에 나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모든 영주는 한 달에 한 번 영지전을 치러야 하며, 이 규칙을 어길 시 영지가 몰수됩니다.]

[몰수된 영지는 특수 몬스터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설마 전쟁을 강제하는 내용이 담길 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동맹 시스템이 왜 존재하는 건데?’

심지어 나는 휘하의 동맹이 많아 검증 시험 난이도도 극악이었지 않은가.

내가 인상을 팍 구기자 시스템은 마치 달래듯 추가 메시지를 띄웠다.

[단 독립 영지의 영주가 아닌, 왕이 존재하는 국가에 속한 영주는 영지전의 의무가 사라집니다.]

[왕은 다섯 이상의 영주가 모여 선출하거나, 다섯 개 이상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을 경우 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왕을 만들면 영지전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안도한 나를 비웃듯 시스템은 다시금 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국가를 이끄는 왕은 한 달에 한 번 독립 영지 혹은 타국과 전쟁을 치러야 하며, 이 규칙을 어길 시 국가가 몰수됩니다.]

[몰수된 국가는 특수 몬스터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영지전을 막는 방법이 국가전을 치르는 거란다.

[전 세계가 하나의 나라. 혹은 하나의 군주국과 신하국으로만 구성이 되면 의무적 전쟁의 규칙이 사라집니다.]

더불어 공개된 시나리오의 과제는 절로 두통을 유발시켰다.

국가전이야 동맹을 하지 않은 나라나 세력이 있으니, 그들과 치르면 된다지만…….

‘나 외엔 전부 신하국으로 만들어가나 강제 병합을 해야 한다?’

이건 동맹들이라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 같지 않은가?

골치 아프게 생겼다.

왠지 대전쟁의 막이 오를 것 같은 느낌이랄까?

“서백호를 황제로!”

이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붙어 있던 시에나가 뜬금없이 그렇게 외쳤다.

그런데 웃긴 건 이에 망설임 없이 따르는 동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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