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전쟁의 시대 (3)
무주지는 말 그대로 주인이 없는 땅이다.
때문에 별도의 규칙 없이 누구나 해당 지역을 지배하는 몬스터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그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지배하는 지역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영지는 영지들끼리, 국가는 국가들끼리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냥꾼 협회가 나이지리아를 공격했단 의미는.
서백호의 대한제국이 ‘빈트’라는 남성이 국왕으로 있는 나이지리아를 침공한 거란 뜻이다.
-콰앙!
-철컥. 철컥.
나이지리아의 국왕 빈트는 옛 대통령궁을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통일이란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지만…….
집무실의 문이 뜯겨나가듯 거칠게 열리며, 금속 마찰음이 요란히 울려 퍼지는 부츠를 신은 윤시아의 등장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머, 멈춰라!”
“막아!”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이 윤시아와 동료들을 막기 몸을 날렸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윤시아가 가볍게 창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들은 맥없이 나가떨어졌으며, 눈 몇 번 깜빡이니 어느새 그녀는 빈트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항복하시죠.”
의자에 앉은 그를 내려 보며 담담하게 내뱉은 그녀의 말.
하지만 빈트의 입장에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기도 했다.
“싫다면?”
일단 빈트도 사냥꾼이다.
그것도 레벨이 100이 넘는 고레벨의 사냥꾼.
그는 애써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반문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에 대한 답은 심플했다.
“죽습니다.”
마치 너의 목숨 따윈 크게 관심이 없다는 말투.
감정의 고저 따윈 없으며, 승리에 대한 기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단 태도였다.
나이지리아의 국왕 빈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누가 서백호 없는 사냥꾼 협회를 별거 아니라 했던가. 결국, 범의 자식도 범이거늘.’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들의 강함을 인지해 봤자 소용없다.
자신은 그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이런 파국을 맞이한 거니까.
결국, 빈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에게 거역해 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지 않으니까.
“항복하지.”
그의 선언과 함께 메시지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대한제국과 나이지리아의 전쟁이 종료됩니다.]
[나이지리아의 모든 영토가 대한제국에 편입되며, 영주와 국왕에게 지급되었던 세금이 몰수됩니다.]
[전쟁으로 획득한 보상을 정산하여 대한제국의 국왕 서백호에게 보고합니다.]
[대한제국의 국왕 서백호가 보상의 분배 방식을 정했습니다.]
[보상은 전쟁 참여자들의 공로 순으로 지급됩니다.]
전쟁 보상을 독차지할 수도 있는 게 국왕 혹은 영주의 자리다.
하지만 서백호는 참전자들에게 모든 보상을 넘겼고, 덕분에 윤시아를 포함한 고위 사냥꾼들은 수차례 레벨업을 함과 동시에 거액의 코인을 벌 수 있었다.
부하들의 공로에 탐을 내지 않는 서백호의 행동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건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나이지리아 국왕의 물음에 윤시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지금과 크게 바뀌진 않을 겁니다. 그냥 평범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뭐?”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해서 식민지라도 만들 줄 알았습니까? 여긴 나이지리아인들의 땅이니, 당연히 나이지리아인들이 관리해야죠.”
“저, 정말인가?”
“가까운 시일 내에 각 지역을 담당할 영주들을 뽑아 명단을 제출하세요. 당연히 전쟁을 주도한 당신과 지금의 영주들은 안 됩니다. 만약 새로운 영주 후보자들에게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당신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할 생각입니다.”
“…….”
이럴 거면 뭐하러 전쟁을 일으켰냐는 표정.
그에 윤시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목적은 최대한 큰 피해 없이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는 거지. 세계 정복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꾸준히 전해 왔음에도, 믿지 않은 건 당신들입니다.”
물론, 서백호가 시스템상으로 이들의 지도자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악용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배가 불렀을 땐 탐탁지 않게 느꼈던 제안이, 목에 칼을 들이민 상태에서 들려주니 좋게 느껴지는 모양이군.’
결국, 마음가짐의 차이란 거다.
나이지리아의 폐위 왕 빈트는 한 번에 긴장감이 풀려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르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용건이 끝난 윤시아와 사냥꾼 협회 멤버들은 그에게 등을 보였다.
빈트는 다급히 윤시아를 붙잡으며 물었다.
“이, 이대로 가는 건가?”
“정리할 나라들이 몇 곳 더 있거든요.”
그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다고 판단한 윤시아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고, 빈트는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부하들과 함께 허탈한 웃음을 흘려야 했다.
새삼 자신들이 저들에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열린 새로운 시대 2.0에서도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 * *
서백호가 직접 나서지 않았음에도 윤시아를 필두로 한 사냥꾼 협회의 주축 멤버 1,000여 명이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남아공, 이스라엘까지 총 3개국을 단 하루 만에 점령한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더불어 압도적으로 질이 높은 정예 병력 덕분에 전투 결과에서 치열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저 파도처럼 밀어붙였을 뿐이란 사실도.
이에 사냥꾼 협회의 라이벌을 자칭하던 이들은 기겁하며 그들의 전력을 재평가해야 했다.
서백호를 제외하고도 이렇게 강하다니, 만약 서백호 파티가 더해진다면 홀로 세계와 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다소 과한 이야기까지 돌 정도였다.
덕분에 중국과 인도, 이란을 포함해 내전 가능성이 점쳐지던 나라들은 침묵에 빠졌으며, 미국과 러시아, 독일 등 강력한 나라들이 물밑으로 움직였다.
그로 인해 세계는 일시적인 평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것도 오래가진 않겠지.’
그러나 머지않아 세상은 다시 시끄러워질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무 전쟁’ 규칙이 존재하는 이상 각국은 두 가지 중 한 가지 길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대한제국 휘하로 들어갈지, 아니면 힘을 합쳐 대항할지.
이 평화란 이름의 침묵은 선택의 기로에서 모두가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펼쳐지는 상황이다.
마치 태풍 전의 고요처럼.
그렇게 많은 이들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을 때.
[시설 뽑기권에서 상수 생산 시설을 획득했습니다.]
“오, 나이스!”
서백호는 강원도 철원군에서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현실에서…….
[상수 생산 시설]
-음용 가능한 상수를 하루 최대 50만 톤 생산할 수 있다.
-코인을 지불하여 매립 수도관을 다양한 시설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장소에 해당 카드를 들고 ‘설치’를 외치면 시설을 배치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도시 건설과 다른 점이라면, 그가 있는 장소가 기존의 대도시가 아닌 철원이란 것과.
마지막 이벤트였던 보물찾기 게임에서 획득한 11장의 시설 뽑기권을 적극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뽑기권을 사용하면 상수 생산 시설이나 하수 처리 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상수 시설은 저쪽에 설치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도시를 제멋대로 만들 수는 노릇이니, 서백호의 곁엔 건설 전문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끝을 흐리는 그들의 모습에 서백호는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자리한 산을 하나 볼 수 있었다.
산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동산 수준.
때문에 서백호는 간단히 말했다.
“산 없앨까요?”
“오! 그게 가능합니까?”
그에 전문가들은 반색했다.
도시를 계획하는 데 저 작은 산이 번번이 걸림돌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서백호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성검을 뽑아 들었고.
-콰아아아아아!
곧 눈 부신 빛과 굉음이 울려 퍼지며 산이 사라졌다.
-떠억.
산을 치운다는 게 시설을 설치하는 것처럼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건 줄 알았지, 설마 물리적 파괴를 뜻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엄청난 공격에 건설 전문가들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눈앞에 있는 인물이 사냥꾼들의 정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힘들이지 않고 작은 산을 날려 버릴 정도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있을까?
신화의 영역이 아니고?
“언제든 지형을 바꾸고 싶으면 말씀해 주세요. 터널을 뚫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하하…….”
서백호 덕분에 중립 도시를 중심으로 시야가 뻥 뚫린 평지가 만들어졌고, 도시 계획이 한결 수월해졌다.
이후 서백호는 계속해서 시설 뽑기권을 사용했다.
그 결과 아래 시설들을 얻을 수 있었다.
[상수 생산 시설]*3
[하수 처리 시설]*2
[마력 발전소]*2
[자동 방어 타워]*1
[성벽 (길이 50km, 높이 5m)]*1
[성채 (연면적 5천 평)]*1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상수 하수 처리 시설은 물론이고.
공기 중의 마력을 전기로 전환하는 발전 시설 역시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적의 침입을 자동으로 방어하는 타워에, 시민들을 안심시킬 높고 긴 성벽.
도심의 한 축이 될 성채까지 고루고루 잘 뽑혔다고 볼 수 있다.
“상수 처리 시설 하나는 서울로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배치하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현재 사냥꾼 협회의 메인 거점은 서울이다.
그곳이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 철원에 대규모 도시를 건설하려는 이유는 머지않아 이곳이 한반도의 중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철원에는 한반도의 중립 도시가 존재한다.
‘중립 도시가 이렇게까지 중요한 곳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
중요하지 않다면 존재할 이유도 없겠지만.
모두가 생각하는 중립 도시는 전쟁관을 비롯해 영주관과 왕궁이 자리한 행정 구역이란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사냥꾼뿐 아니라, 수많은 NPC가 들어와 이벤트 상점과 떠돌이 상인에게서나 구할 수 있던 귀한 물건들(유일 등급 아이템 X)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결과 새로운 상업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중립 도시로 들어오는 웨이포인트 비용은 무조건 무료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하는 사람들은 중립 도시의 웨이포인트를 거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게 당연해지면서 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덕분에 중립 도시 내부의 고급 주택들과 일반 주택은 이미 돈 있는 사냥꾼들이 선점하여, 새로운 강남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서백호는 이 근처에 새로운 대도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예상 수용 인원은 300만. 중립 도시 내부 거주지에 10만 명이 생활할 수 있으니, 최대 310만 명의 인원이 수용 가능한 도시가 되겠지.’
이 정도면 새로운 수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서백호가 기초 단계부터 이런저런 간섭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심시티 나름 재밌는데?’
철저하게 계획하에 만들어지는 대도시인 만큼, 이왕 만드는 거 예쁘게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미친 세상에서 최고의 안식을 제공하는 그런 도시 말이다.
때문에 서백호는 해당 도시 곳곳에 뽑기로 뽑은 시설뿐만 아니라, 가의도와 월광도에 도입되어 있는 드워프 동료 토레프의 기술을 아낌없이 섞을 예정이었다.
“저, 협회장님…….”
“네.”
“아무리 새로운 공법과 아이템을 이용해 도시를 건설해도, 인부가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까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을 옮길 방법이 있으신가요?”
중립 도시의 웨이포인트 이용 비용이 아무리 공짜여도 웨이포인트를 찍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용할 수가 없다.
시나리오 조각의 보유자들은 자동으로 중립 도시의 웨이포인트가 등록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웨이포인트 점퍼의 보유 수량이 많아지긴 했지만, 수만의 인부를 실어 나르는 데는 무리가 있다.
건설 전문가들의 난감한 표정에 서백호는 작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서백호는 인벤토리에서 팔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연히 건설 전문가들은 의아함을 표했고, 이어서 그가 팔찌에 달린 보석을 누르자,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면서 슈퍼 카를 닮은 날렵한 생김새의 무언가가 등장했다.
생김새가 슈퍼 카를 닮은 거지, 덩치는 덤프트럭 수십 대를 합친 것보다 더욱 커 보였다.
“부유 방호 차량입니다. 한 번에 1,000명까지 탑승할 수 있죠. 마력석 하나면 서울에서 철원까지 최대 시속 200km로 사람들을 안전하게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오오! 이런 아이템이 있다니!”
이 또한 보물찾기 게임에서 시설 뽑기권과 함께 얻은 탈것 뽑기권으로 획득한 장비였다.
저 멋들어진 디자인을 보라.
건설 전문가들은 역시 세계 최고의 사냥꾼은 달라도 크게 다르다며 감탄사를 흘렸다.
“웨이포인트 점퍼와 달리, 부유 방호 차량은 운영 횟수에 제약이 없으니 사람들을 꾸준히 실어 나르면 되겠군요.”
탑승 인원 1,000명에, 수송 횟수에 제약이 없다면 대규모 인원을 실어 나르기엔 웨이포인트 점퍼보다 유용해 보였다.
그런데…….
“1,000명을 태우는 부유 방호 차량은 3대 더 있습니다. 그리고 5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고속 부유 방호 차량 2대와 3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초고속 비행체도 1대 있고요.”
서백호가 획득한 탈것 뽑기권은 무려 7장이었다.
만약 서백호의 이 말을 다른 나라에서 들었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럼 한 번에 5,3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단 거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 이유는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들은 이미 빠른 침공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단 뜻이었으니 말이다.
대한제국은 생각보다 더욱 전쟁 준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마치 대전쟁을 대비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