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돌파구 (1)
철원 중립 도시에 건설 중인 신도시에 투입할 인부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반도 전역에서 모집했다.
인부로 참여한 사람들은 도시에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분양권을 줄 생각인지라 경쟁은 매우 치열했고, 결과 1차로 한국에서 5만, 북한 측에서 2만의 인부를 선발해 투입했다.
내 신뢰도가 나름 높아서인지, 아니면 사냥꾼 협회에서 수차례 도시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행해서인지 인부들은 뽑힌 것만으로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
‘솔직히 행운을 바랄 시간에 레벨업을 하는 편이 미래를 위한 거라 생각하지만…….’
요청할 게 많은 만큼 도시 설계에 직접 참여했지만, 건설은 다른 문제다.
이쪽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전문가들의 영역.
나는 그저 게임처럼 설계대로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중간중간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덕분에 나는 다시 하던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바로 무주지 점령을.
[엘더 나이트 로드 에잇투 / 레벨: 230]
나는 어딘가 나인포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마족을 상대로 바쁘게 검을 놀렸다.
-차차차차창!
[제법이구나! 하하하하!]
로드급 엘더 몬스터들은 보통 종족명보단 칭호가 이름 앞에 붙는데, 그중에서도 매지션 로드, 나이트 로드처럼 직업이 들어간 칭호가 붙어 있는 경우 상대 종족은 마족이라 생각하면 된다.
몬스터로 등장하는 마족은 보통 엘더 몬스터 혹은 로드급 엘더 몬스터다.
아마도 마족은 인간 혹은 NPC와 비슷한 취급을 받아서 일반 몬스터로 등장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마족은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건 바로 레벨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상대가 있는 반면 레벨보다 못하게 느껴지는 상대도 있다는 거다.
인간들 역시 레벨은 같아도 실력에 편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말로 포장하면 개성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놈은 그중에서도 참…….’
그런 의미에서 이 마족 에잇투는 꽝이라 할 수 있겠다.
결코 적수로서는 마주하면 안 되는, ‘꽝’ 패를 뽑은 것과 다름없는 상대란 의미다.
놈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레벨보다 월등히 강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런 놈을 만난 게 나라서.’
아마 다른 사냥꾼들이 놈과 맞닥뜨렸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은 레벨 차이도 큰 만큼, 검을 맞대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차차차창!
내 주력 무기 듀랜달이 근래 이렇게까지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인 적이 있던가?
키가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중기사가 휘두르는 보랏빛 검이 육중한 외형과 어울리지 않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지며, 듀랜달을 밀어냈다.
질량, 크기 차이를 넘어 근본적으로 에잇투의 스텟이 나보다 우위에 있는지라, 한 번 한 번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뼈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하핫! 좋다! 좋다! 설마 이 보잘것없는 땅에서 네놈과 같은 존재를 만나게 될 줄이야!]
“너 검 좋아 보인다? 유일 등급? 갈 때 떨구고 가 줄 거지?”
뭐가 그리 좋은지, 나처럼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얼굴이 드러나는 형태의 마법 투구를 쓴 놈이 사자 갈기와 같은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그런 놈의 태도에 이죽거리며, 제3의 손을 이용해 바리사다를 휘둘렀고, 다크매터(망토)에 가려져 있던 검이 내 겨드랑이 사이로 뻗어 나오자 놈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틀었다.
본능인지, 아니면 뭔가를 알아차린 건지, 바리사다의 공격만큼은 귀신처럼 피해 내는 놈이었다.
하지만.
-푹!
내 공격은 제3의 손을 이용한 바리사다뿐이 아니었다.
명령을 내리면 알아서 적을 공격하는 프라가라흐(유일)가 에잇투의 발밑에서 솟구침과 동시에 직접 손에 쥐고 있던 듀랜달로 놈의 미간을 노렸기 때문이다.
[크윽!]
드디어 에잇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놈에게 타격을 준 공격은 다름 아닌 프라가라흐였다.
급소를 노린 듀랜달은 놈이 보랏빛 검을 휘둘러 막아 냈지만, 프라가라흐의 일격은 피할 수가 없어 발로 차 내려다가 되레 정강이를 꿰뚫리고 말았다.
비슷한 옵션의 춤추는 검은 희귀 등급이라 놈의 방어구를 뚫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유일 등급의 무기인 프라가라흐까지 막을 수는 없다.
[제법 잔꾀를 부리는구나!]
검에 정강이가 완전히 관통당했음에도 놈은 유쾌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보랏빛 검을 바닥에 꽂았다.
-드드드드득!
그러자 지면이 요란하게 요동치며 수백, 아니 수천의 검강이 촉수처럼 솟구쳐 나를 노려왔다.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담긴 극강의 검강 줄기들.
아직도 이런 수를 남겨 두고 있었다니, 진짜 쓸데없이 강한 놈이다.
-촤촤촤촥!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 또한 입꼬리를 말아 올렸는데…….
-투투투퉁!
-쿠릉! 콰아아앙!
에잇투가 필살기를 사용함과 동시에 하늘 위에서 놈을 노린 공격이 연거푸 쏟아졌기 때문이다.
강렬한 뇌전과 새하얀 빛줄기.
바로 놈의 부하들을 처치하고 돌아오고 있는 윌리아와 시에나의 공격이었다.
[…….]
이제 놈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나를 향한 공격을 거두고 두 사람의 공격에 대항할지.
아니면 다 무시하고 나를 공격할지.
찰나와 같은 순간임에도 놈의 선택에 호기심을 표해야 했다.
[하하하핫!]
그런데 이 미친놈은 윌리아의 시에나의 극강의 스킬을 피하지 않고 나를 공격하는 변태 같은 선택을 했다.
심지어 웃음까지 흘리니 순간적으로 내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블링크로 피할까? 아니, 이미 타이밍을 놓쳤어. 자칫 전송 중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어.’
대재앙 초반 만능으로 여겨지던 블링크도 상대하는 적의 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더는 완벽한 회피 수단이 아니게 되었다.
블링크는 전송 직전 무방비 상태가 되는 실낱과 같은 빈틈의 시간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일반적이라면 그 타이밍에 맞춰 공격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렇게 사방에서 무차별적으로 덮쳐 오는 공격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이면 어떻게든 윌리아가 회복시켜 주겠지만, 재수 없게 뚝배기가 날아가면 윌리아라 해도 손쓸 방법이 없다.
이럴 땐 차라리 적의 공격이 치명타가 되지 않길 기도하며 블링크를 쓰기보단 직접 대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춤춰라!]
에잇투에게 놀아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진 않지만 별수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듀랜달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반대 손에도 성검 칼립소를 소환하여 쥐고, 바리사다를 쥔 제3의 손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프라가라흐, 춤추는 검, 염력으로 조종하는 대검 10자루와.
‘분신!’
마지막으로 내 능력을 거의 온전히 구사할 수 있는 도플갱어, 분신까지 소환했다.
내가 가진 모든 공격 수단을 활용해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강기 다발을 쳐 내기 시작했다.
-쾅! 콰아앙!
콤마 초 단위로 수십 번씩 미세하게 검로를 바꾸는 네 자루의 유일 등급 검들.
일반적이라면 이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적의 공격을 쳐 낼 수는 없지만.
[에기르 헬름 / 등급: 유일]
-상대에게 강한 공포심과 위압을 준다.
-소유자의 부상을 자동으로 치료한다.
-내장 스킬: 크리티컬 카운터
[크리티컬 카운터 / 극상급 / 액티브]
-근접 무기에 카운터 스킬을 담아낸다.
-적의 공격을 카운터 스킬로 막아 낼 경우 더욱 강해진 위력으로 반사가 된다.
-마력 소모: 10
위압을 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욱 많은 에기르 헬름의 내장 스킬인 크리티컬 카운터를 활용하면, 작은 검로의 변화만으로도 적의 공격을 쳐 내는 게 가능했다.
아쉽게도 춤추는 검과 염력을 사용한 10자루의 대검엔 카운터를 걸 수 없어서, 오로지 적의 공격 경로를 비트는 것에 집중했다.
-투투투투퉁!
-콰콰콰콰콰!
머리가 두세 개 더 달려 있다고 해도 일일이 무기를 컨트롤하고 적의 공격에 대응하기란 힘든 상황.
그럼에도 나와 분신은 어떻게든 이를 해냈고.
마치 신들린 듯한 움직임으로 에잇투의 필살 기술에 대항해 나갔다.
‘큭…….’
하지만 이것만으론 살짝 부족한 것 같다.
팔이 꿰뚫리고, 옆구리가 뜯겨 나간 순간, 결국 나는 숨겨 둔 마지막 기술마저 꺼냈다.
‘폭주!’
능력치를 50% 뻥튀기시키는 기술.
분신은 일찍이 폭주 스킬을 사용시킨 상태였기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나마저 폭주 스킬을 사용하자,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 카운터가 놈의 공격 속도를 앞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오오오!
머지않아 상황은 끝을 맞이했다.
나는 본 적 없는 극강의 대인 공격 스킬 속에서 생존하는 데 성공했고, 마족 에잇투는 윌리아와 시에나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데다가 내 크리티컬 카운터에 의해 중상을 입게 되었다.
[크크큭!]
여기저기 뜯기긴 했지만, 무사히 생존한 나와 다르게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버린 녀석.
곧이어 먼 곳에서 윌리아와 시에나, 더불어 헬레나와 다켈프가 다가오는 게 시야에 들어오니, 승패는 완전히 갈렸다고 볼 수 있다.
“뭐가 웃겨?”
허세인지, 아니면 허탈함 때문인지.
끝까지 웃음을 흘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즐거워서 그런 것 아니겠나.]
“곧 죽게 생겼는데?”
[이런 죽음이면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 검사로서 너와 같은 상대와 싸울 수 있어서 즐거웠다.]
처음 보는 몬스터의 반응.
덕분에 나는 도리어 찜찜함을 느껴야 했다.
이놈도 설마 헬레나처럼 펫으로 만들지 않아도 꼬봉으로 부릴 수 있는 부류인가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자, 검을 들어라. 마지막 여흥을 즐겨야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검을 들라는 놈의 대사에 나는 다시금 달려들었다.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만신창이인 놈과 달리 나는 에기르 헬름의 회복 옵션 덕에 부상이 벌써 완치된 상황이며, 분신에 폭주 스킬까지 유지 중이었으니 말이다.
[컥!]
바리사다가 에잇투의 심장을 꿰뚫고, 듀랜달이 목을 날렸다.
[레벨 230의 중국 하이난성 하이커우시와 원창시, 충하이시의 영주 엘더 나이트 로드 에잇투를 처치했습니다.]
[무주지인 중국 하이난성 하이커우시와 원창시, 충하이시 지역이 대한제국에 귀속됩니다.]
[영주를 지정하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잇투는 무주지에 배정된 몬스터인 주제에 중국의 영주 둘을 해치우고 영토를 확장했던 놈이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무주지 하나를 공격하고 3개의 영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완전 회복!”
하지만 놈의 전투에 심력 소모가 컸던 건지, 단순히 폭주 스킬의 후유증 때문인지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멀리서부터 최대 속도로 날아온 윌리아가 대뜸 회복 스킬부터 사용했다.
“괜찮으세요?”
안부는 회복 스킬을 쓰고 난 다음 이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뒤이어 시에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어때? 내 초장거리 공격 능력이? 참고로 윌리아도 내가 말한 좌표로 스킬을 사용한 거야. 도움 됐지?”
역시 시에나다운 반응이었다.
그녀들의 일격이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 나는 순순히 고마움을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윌리아는 괜찮은데도 나를 부축했다.
“죄송해요. 차라리 공격 스킬이 아닌, 완전 방어 스킬을 사용했어야 했는데.”
그러고 보니, 윌리아는 횟수 제한이 있지만, 어떤 공격이든 막아 내는 방어 스킬을 갖고 있다.
그 스킬이 있었다면, 더욱 쉽게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겠지만.
전투가 계속 이어지기만 했을 뿐 이렇게 끝이 나진 않았을 거다.
“아니에요. 오히려 공격이라 좋았어요. 두 분의 공격이 더해진 덕분에 이렇게 놈을 쓰러뜨릴 수 있던 거니까요.”
참 골치 아픈 상대였다.
혹여라도 쓰러뜨려야 할 타이밍에 쓰러뜨리지 못하고 도주라도 허용해 봐라.
뒤의 일은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놈의 성향을 보면 도주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쨌든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았는가.
웃으며 엔딩을 맞이하면 그만이다.
그에 합당한 보수도 얻었고.
[아론다이트 / 양손검 / 등급: 유일]
바로 놈이 갖고 있던 검이었다.
보랏빛의 칼날을 가진 화려한 장검.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슬레이어 아스칼론에 이은 두 번째 대검이다.
“응?”
하지만 아이템의 설명을 읽은 나는 미간을 좁혀야 했다.
이유는 아론다이트란 무기가 마족에 대한 의외의 정보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