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돌파구 (3)
마계에도 인간종은 존재한다.
하지만 나인포가 말하는 인간은 대재앙 초기에 지구에서 마계로 넘어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위험한 마계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그땐 레벨도 장비도 보잘것없었을 텐데.
몇몇 가능성이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건 이상 지형이 발생할 때 휩쓸린 것이다.
마경이 처음 발견됐을 때, 여의도 마경 입구 필드에 많은 생존자가 몰려 있던 것처럼 말이다.
레벨 100이 넘는 몬스터가 필드를 돌아다니는 지금보다 오히려 고블린과 오크, 다이어 울프가 주류를 이루던 대재앙 초기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중 일부가 마계에 섞여 들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강원도에 웨이포인트를 이용하지 않고도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는 이상한 지형도 있는 만큼, 특별함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듣는 게 낫겠군요.”
-짝짝.
나는 지구에서 넘어온 인간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드러내며 나인포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는데, 놈은 대뜸 이야기를 끊고 허공에 박수를 쳤다.
그러자 나인포의 수하 중 하나가 동양인으로 보이는 허름한 의상의 중년 남성 한 명을 데려왔다.
[박익준 / 레벨: 13]
누가 봐도 한국계로 보이는 이름.
그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한껏 어깨를 움츠렸고, 이내 나와 나인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참고로 무릎은 우리가 꿇린 게 아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스스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인포와 그의 수하를 째려보았다.
“뭐 해, 의자 드려.”
“넵. 죄송합니다.”
그러자 나인포의 수하가 이등병처럼 즉각 의자를 내와 박익준이란 이름의 남성을 일으켜 앉혔다.
“송구합니다.”
그에 박익준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신 비굴하게 행동했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가 나인포가 말한 지구에서 넘어온 사람 중 하나인 거 같은데,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 하하.”
내 시선에 나인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이자에게 상황 설명을 하기 직전에 주군이 들이닥치신 겁니다.”
“즉, 구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넵!”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박익준에게 물었다.
“한국인이십니까?”
그에 남성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 보았고, 이내 손을 벌벌 떨어 대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을 어찌 아느냐는 모습이었다.
“저도 한국인이거든요. 방금까지 서울에 있었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 안심하십시오. 잠시 후 제가 한국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대신 몇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지구로 돌려보내 줄 거냐는 둥 자세한 방법도 묻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는 그에게, 바로 질문을 던지기보다 나인포에게 먼저 물었다.
“이분은 어떻게 찾아온 거야?”
“노예로 시장에 풀린 것을 발견해 사 왔습니다.”
“노예?”
“예, 지구에서 건너온 인간 대부분의 현재 신분이 노예이거든요.”
몬스터의 밥이 되는 것보단 낫다고 해야 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박익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박익준은 하늘과도 같은 마족을 부하로 부리는 내가 신기한지, 아니면 이쪽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다과를 즐기는 여자들(윌리아 등)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연신 눈알을 굴리며 자신이 겪어 온 일을 알려 주었다.
“저는 강원도 강릉 출신입니다.”
* * *
박익준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분량으로 따지면 약 3분 정도?
그와 함께 수많은 강릉 사람들이 강한 지진에 휩쓸렸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생전 처음 보는 숲속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박익준은 사람들과 함께 숲속을 헤맸고 그 과정에 몬스터를 만나게 되면서 대부분의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도망을 치다가 도달한 곳이 바로 마족의 영역이었던 것이고.
‘역시 이상 지형에 휩쓸린 게 맞는 거 같네.’
하지만 부족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 마족의 성에 찰 리 만무.
덕분에 그들은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럼 이곳 마계에 있는 지구 출신은 강릉분들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있던 곳만 해도 호주 출신의 노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예 상인에게 되팔려 갔을 때, 일본인도 보았구요. 또 건너 건너 들은 소문에 의하면 검투 노예로 팔린 독일인이 있는데, 그는 체계적으로 키워져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어서 나는 나인포를 바라보았다.
왜 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건지 싶어서.
“아쉽게도 지구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대체로 팬드래건의 영역에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 엔탈론은 마계 남부 대륙에 있고, 팬드래건은 북부 대륙 끝에 자리한 대국이기 때문에 아직 정보 수집에 한계가 있는 곳이죠.”
또다시 등장한 팬드리건이란 국명.
‘제로원’이란 마왕이 다스리는 그 땅은 이곳 엔탈론 주변과 달리, 몬스터의 수준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마족은 몬스터와 달리 처음부터 레벨 100을 찍고 필드에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닌지라, 성장을 위한 장소가 필요했다.
아마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곳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기 엔탈론 주변에 떨어져 레벨 200 전후의 몬스터들을 만났다면 얄짤없이 몰살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놈은 분명 이곳에 떨어진 인간들의 상황이 재밌다고 했다.
그 말은 즉, 박익준이 말한 사실 외에 중요한 내용이 있다는 뜻이다.
“박익준 씨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 독일인 검투사처럼 이 마계에 잘 적응한 인간이 또 있습니다.”
“그래?”
“네, 레벨만큼은 주군에 버금가는 존재도 있죠.”
“오오!”
정말 흥미가 돋는 이야기가 아닌가.
설마 이런 험한 곳에서 내 경쟁자가 자라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 물론 레벨은 버금간다고 했지, 실제 능력은 주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딱 그 레벨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뿐이거든요. 레벨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주군에 비할 바는 아니란 겁니다.”
“아아.”
나는 레벨 200대 초반임에도 240 전후의 몬스터를 사냥하고 다니지만.
그는 레벨 190대로 비슷한 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존재라고 한다.
새삼 내가 규격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설명이었다.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눈여겨봐야 할 사람이 셋 있습니다.”
“셋이라……. 그래, 계속 말해 봐.”
“첫 번째가 팬드리건 제국에서 마탑의 실험체로 성장한 레벨 190대의 ‘미국인 데이비드 카터’. 두 번째가 검투사로 레벨 180을 달성한 ‘독일인 헤르만 로렌츠’죠.”
둘 모두 나에 미치진 못한다.
하지만 레벨이 160에 근접한 윤시아와 클로에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강자의 등장이니,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참고로 레벨은 데이비드 카터가 10 더 높지만, 실제 실력은 헤르만 로렌츠가 위일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독일인 검투사 말이지?”
“그렇습니다. 특히 대인 전투 능력에 특화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실험체라고 하면 엄청 강할 것 같은 느낌인데 의외다.
그리고 나인포는 마지막 세 번째 요주의 인물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본인의 레벨은 낮지만 팬드리건 제국 황태자의 눈에 들어 첩실이 된 예티엔이란 중국인 여성입니다.”
능력은 없지만, 권력을 등에 업은 존재의 등장.
어쩌면 가장 꺼려지는 부류의 상대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레벨 160대의 기대주가 넷, 그 아래에 레벨 130이 넘는 용병도 제법 있습니다.”
“다들 대단하네.”
“지구보다 더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 강하게 클 수밖에 없죠.”
나는 나인포의 정보를 정리했다.
그러다가 문뜩 무언가를 알아채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려야 했는데.
“야, 설마 너?”
이 정보를 어떻게 써먹을지를 깨달은 것이다.
나인포가 마계에서 강해진 인물들의 정보를 중요하게 다룬 이유.
아마도 현 지구의 상황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자들을 지구로 끌어들이시죠. 특히 데이비드와 헤르만을 끌어들이면 꽤 재밌는 반응이 일어날 겁니다.”
타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감동적인 이야기 같지만, 대뜸 레벨 190, 180의 강자가 나타나면 기존의 질서는 무너질 것이다.
아니, 아예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 체계가 구축될 가능성이 컸다.
그게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어쨌든 의미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변화가 생길 것은 분명하다.
“단 예티엔은 빼야겠네.”
“네, 마계의 황실을 등에 업은 여인이니까요.”
머리를 굴려서 작전용으로 써먹으면 써먹었지, 생각 없이 풀어 버리면 위험할 것 같으니 그녀는 제외하고…….
나머지 전투원들은 노예들과 함께 고향에 돌려보내 주면 좋을 것 같다.
“그 사람들 빼돌릴 수 있겠어?”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죠.”
“얼마가 필요한데?”
“넉넉하게 10억 코인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물음에 나인포는 자신만만하게 답을 하고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불쌍한 생존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자고.”
“네, 맡겨 주십시오.”
이런 우리의 작당 모의에 잠시 옆으로 밀려난 박익준이 헛바람을 삼켰다.
“10, 10억 코인…….”
아무래도 그는 우리가 꾸미는 일보다 운용하는 자금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 * *
철창 속에서 살아 있는 몬스터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는 짐승과도 같은 사내.
[데이비드 카터 / 레벨: 191]
그런 그에게 한 마법사가 다가와 조용히 어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엔탈론?”
“그래, 그곳에서 너처럼 지구에서 넘어온 인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있다는군.”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또 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고?”
“믿고 말고는 자유지만, 지금의 너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 아닐까?”
“…….”
실험체로서 마법사들에게 장난감처럼 다뤄지고 있는 몸.
확실히 그의 말대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입장임은 분명했다.
그에 고양이처럼 세로로 갈라진 금빛 눈동자를 갖고 있는 백인 남성이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방법은?”
“그럼 허락한 걸로 알겠다. 탈출 방법은 곧 가져올 터이니, 함구하고 기다리도록.”
“그러지.”
금빛 눈동자의 남자 데이비드 카터는 잊고 있던 고향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좁은 철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 보았다.
* * *
그야말로 주지육림을 표현한 듯한 공간.
담배 연기인지 미약의 연기인지 모를 매캐한 내음이 가득한 공간에 거구의 사내가 자신의 곁에 찰싹 붙은 여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헤르만 로렌츠 / 레벨: 180]
“고향으로 보내 준다? 그게 정말이야.”
반쯤 몽롱하던 정신이 고향이란 단어 하나에 온전해지며 남자의 또렷한 눈이 여인에게 향했다.
“물론입니다. 전사님의 동의가 있다면 바로 일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래?”
남자의 입꼬리가 말아 올려졌다.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사악하고, 또 무섭게 느껴져 여인은 흠칫 몸을 떨어야 했지만, 남성의 다정한 손길에 긴장을 풀었다.
“좋아. 부탁하지. 고향의 음식이 그립던 차거든.”
“알겠습니다. 탈출을 준비하도록 하죠.”
그리고 철창 안에 사는 실험체 데이비드와 달리 생활에 부족함은 없지만, ‘고향’이란 마법과도 같은 단어에 검투사 헤르만 로렌츠 또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