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돌파구 (4)
유럽은 대한제국과의 관계로 인해 동과 서 둘로 쪼개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래는 두 지역 모두 사냥꾼 협회와 동맹 관계였으나, 본격적인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그 내용에 의무 전쟁이란 항목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게 되었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중심 세력으로서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DNA에 남아 있는 침략욕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과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서유럽은 대한제국과 거리를 두며 독립적인 노선을 걷고 있다.
반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뭉친 동유럽은 진지하게 대한제국 복속 제안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두 지역을 대하는 대한제국도 온도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서유럽과 대한제국은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젠장, 언제까지 한국 놈들 눈치를 보면서 잠자코 있어야 하는 거야. 뭐라도 해야지.”
아니, 서유럽뿐만 아니라, 과거 강대국이라 불린 세력 대부분의 상황이 그들과 비슷했다.
현재 한국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을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건 국가의 지휘부도 국민들도 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들이 연합하여 대항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입을 닫고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으니, 휘하의 사냥꾼들은 이를 답답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지휘부에서 무주지 점령을 시도해 볼 생각인 거 같아.”
“무주지? 빈약하기 그지없는 동유럽과 아프리카를 두고, 굳이 레벨 200 전후의 레이드 몬스터를 건드린다고?”
“인간끼리의 전쟁엔 대한제국이 개입해 오니까, 결국은 그게 최선이지.”
“빌어먹을! 차라리 반대한제국 세력이라도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대항을 하든가. 그놈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인원이 많은 건 아니잖아? 단지 격이 다른 서백호 파티가 문제인 거지.”
언젠가 발생할 마계와의 전쟁에 대비해 세력을 보존시키고자, 인간끼리의 분쟁에 대해선 철저하게 개입하는 대한제국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은 철저히 문제 세력을 해체시키고 자신들의 휘하로 영토를 귀속시키니, 앞선 주장은 명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모순이나 다름없는 대한제국의 행보에 서유럽을 포함한 많은 세력이 그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어쩌겠어. 그 서백호가 존재하는 이상 모든 세력은 그들을 겁낼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국제 관계도 결국엔 힘이 결정하는 법.
미국과 유럽 등 힘 있는 세력이 합쳐지면 충분히 대한제국에 대항할 수 있지만, 이 경우 그들은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대한제국에는 서백호라는 방어가 불가능한 핵폭탄이 있었으니까.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뜻을 관철해야 할 때가 있는 거 아냐? 이래서야 독재자에게 전 세계가 놀아나는 꼴이잖아!”
독재자.
실제로 서구 선진국 중엔 서백호를 그리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나, 세력, 혹은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한 별수 없지.”
그때였다.
“그,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야?”
서유럽 제일의 무력 집단 유럽 연합 사냥팀.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사냥팀은 서유럽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다.
회의실에서 연신 한숨과 짜증 섞인 얼굴로 대한제국과 자신들의 국가지도부에 불만으로 토로하던 유럽연합 사냥팀의 핵심 간부들은 갑자기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부하를 보며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보통 이런 급보는 좋지 않은 일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하지만, 느낌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었다.
“방금 대한제국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대재앙 초기에 이상 지형에 휩쓸려 마계로 떨어진 지구의 생존자들을 구출했답니다. 그들을 각국으로 돌려보내겠대요!”
“그래?”
마경과 마계에 대한 정보는 사냥꾼 협회 시절 이미 공개된 내용.
그래서 유럽 연합 사냥팀의 간부들은 회의실에 난입한 부하의 보고에 흥미를 보이면서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진 부하의 후속 보고 속에는 감히 무시하기 힘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복귀자 중 마계 환경에 적응하여 강해진 인원들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인 중엔 레벨 190이 넘는 사람도 있고, 독일인 중 레벨 180이 넘은 인물도 있다고 해요!”
“뭐!? 레벨 180하고 190?!”
“그, 그게 정말이야?”
“네!”
그리고 마치 하늘이 기회를 주듯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서백호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바라던 이들에게 강력한 전투원을 내려 준 것이다.
그들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 대한제국 놈들이 수 쓰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런 이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주장이 등장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지 않아? 이토록 특출난 존재가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건데? 생존 기념 이벤트 등에서 두각을 드러냈어야 하는 거 아냐?”
일리 있는 말.
더구나 대한제국에서 마계의 생존자들에 대해 알려 온 시기도 미묘했다.
하필 냉전 체제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 굳이 적이 될 수도 있는 존재를 풀어 주겠다니…….
덕분에 끓어 올랐던 분위기가 급격히 식었다.
“다행히 그 점에 대해 대한제국 측에서 미리 답을 주었습니다.”
“그래?”
“그들의 현재 신분은 마계의 주민이랍니다. 아무래도 대재앙 발생과 동시에 그쪽으로 넘어가서 그런 모양이에요.”
“아…….”
꺼림칙한 부분의 퍼즐이 맞춰지니,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하긴, 대한제국 놈들이 허튼 말을 할 놈들은 아니니까.”
“그건 그래.”
웃기게도 이들은 대한제국을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 여기고 있으면서, 꽤나 쉽게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신께서 우릴 구원한 거지!”
반감은 갖고 있을지언정 묘하게 신뢰도가 높은 대한제국이었다.
* * *
마계에서 지구인 생존자들을 한데 모으니, 그 수는 무려 천 명이 넘었다.
다만 이들 중 200여 명만 전투원으로 성장했고 나머진 모두 노예였다.
그 200여 명의 전투원들의 수준은 이러하다.
-레벨 100 이하: 158명
-레벨 101~150: 43명
-레벨 151~163: 7명
여기에 레벨 180이 1명, 레벨 191이 1명 추가된다.
레벨 180 이상의 특수한 두 인물은 제외하고도 나쁘지 않은 수준의 전력이다.
우리 사냥꾼 협회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홀로 이 정도의 전력을 갖춘 나라는 드물었으니 말이다.
“당신인가, 우릴 구해 준 사람이?”
그때 2미터가 넘는 신장에 온몸이 두꺼운 근육에 뒤덮여 있는 남성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헤르만 로렌츠. 레벨이 180이랬지?’
그는 독일 국적을 가진 남성으로 검투사로 살아남아서인지, 실제 전투력은 한쪽 구석에 조용히 짱박혀 있는 미국인(레벨: 191)보다 강할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검투사인 헤르만을 빼내는 게 마탑에서 실험체로 쓰이던 미국인을 빼내는 것보다 더욱 큰 거금이 들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함인지 악수를 청하듯 내미는 그의 손을 나는 별생각 없이 붙잡았다.
-꽈아악!
그랬더니 이 검투사 새끼가 대뜸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도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그의 행동에 헛웃음을 흘렸다.
헤르만의 행동은 은인에게 할만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미친놈이네.’
나로선 딱 좋게 미친다는 느낌.
유럽으로 건너가면 내 뜻대로 신나게 분탕을 쳐 줄 것 같다.
나는 놈의 기대에 부응하듯 손에 힘을 주었고, 그러자 헤르만의 표정이 굳어졌다.
엔탈론에선 레벨을 비롯한 개인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선 특수 아이템을 사용해야 했으니, 힘으로 내 수준을 가늠해 보려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강해 놀란 거고.
“어휴 무서워라.”
헤르만은 어울리지 않게 엄살을 떨며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다.
그의 힘자랑에 윌리아, 시에나의 눈빛에 살기가 담기고.
헬레나와 다켈프는 각자의 무기(대낫과 단검)를 뽑아 헤르만의 목을 겨눴으며.
그림자 속에서 솟아 나온 지옥 늑대 멍멍이가 섬뜩한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대고 있었다.
아마 겁 없이 행동하는 그라고 해도 찔끔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고 동료들을 말리며 헤르만을 풀어 주었다.
“과보호를 받을 만큼 약해 보이진 않는데?”
끝까지 자기 할 말을 하는 헤르만.
나는 겁에 질린 생존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고는 헤르만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
“모기에만 물려도 걱정을 해 주는 게 가족이란 존재니까.”
“모, 모기?”
이런 취급은 처음인지 그는 황당하단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헤르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단한 양반 납시었군. 그래서 용건이 뭐야?”
“용건이라니?”
“사람들을 구한 것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설마 인도적 선택이라 하진 않겠지?”
오히려 말을 뺑뺑 돌리는 사람보다 이런 단순한 타입이 상대하기 쉽다.
나는 그의 말에 되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답했다.
“인도적 선택 맞는데?”
“…….”
눈앞의 독일인 헤르만과 저 구석에 앉아 조용히 음식만 섭취하고 있는 미국인 데이비드와 다르게, 나머지 사람들은 인도적 선택이 맞았다.
이런 내 모습에 그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덕분에 헬레나와 다켈프는 물론, 이번엔 윌리아와 시에나까지 무기를 꺼내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놈은 거친 성격 덕에 장기 말로서의 가치가 더욱 올랐다.
금방이라도 헤르만의 목을 딸 것 같은 동료들을 연거푸 말린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너와 달리, 내겐 입장과 위치라는 게 있거든.”
“본인의 위엄 혹은 명예를 위한 선택이란 건가? 뭐, 그렇게 이해하니 좀 낫네.”
자기 멋대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헤르만은 비로소 조용히 물러나 미국인 데이비드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위스키를 홀짝였다.
그건 나중에 헬레나가 예쁜 짓 하면 상으로 주려고 갖고 있던 거라 꽤 고가의 위스키였다.
덕분에 헬레나는 놈이 더욱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저놈 목 날릴 일 있으면 제게 맡겨 주세요.”
어째 점점 헬레나도 시에나의 닮은꼴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독일인 헤르만과 미국인 데이비드는 귀중한 패다.
냉전 국면에 접어들려 하는 현 지구의 국제 정세를 흔들기 위한 귀중한 패.
듣기론 미리 헤르만과 데이비드의 소식을 전해 받은 유럽과 미국은 축제나 다름없는 분위기라고 하던데, 과연 그 축제 분위기가 얼마나 이어질지 궁금하다.
‘느닷없는 상왕의 등장을 기존 권력자들이 좋아할까?’
특히 헤르만의 개 같은 성격을 보니, 벌써부터 유럽이 혼란에 휩싸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왕이면 미국인 데이비드의 성격도 개차반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응?”
그때, 문뜩 게걸스레 음식을 먹어 치우던 데이비드의 시선이 내게 향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행동은 예상치 못한 거였으니……..
-움찔.
마치 겁은 먹은 듯 몸을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기 때문이다.
듣기론 마법사들에 의해 짐승처럼 다뤄졌다고 하던데, 내게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다른 사람들에겐 안 그러면서 그는 유독 나를 두려워했다.
저래서 제 몫을 해 줄지 의문이지만.
‘뭐, 지켜보면 알겠지.’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저들은 존재 자체가 트러블 메이커였으니까.
“다들 행복하게 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미국과 독일은 데이비드와 헤르만의 복귀를 축하하며 큰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