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전쟁의 신호탄 (1)
“흐읍, 후. 이야, 공기부터 다른 느낌이군. 그리웠던 고국의 내음이 더욱 상쾌해졌어.”
“하, 하하. 네, 뭐……. 매연을 내뿜던 차량도 싹 사라졌으니, 공기가 좋아질 수밖에 없죠.”
마계에서 귀환한 독일인 헤르만 로렌츠는 유독 높게 느껴지는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신장이 2미터가 넘는 데다가 우람한 근육질 체형으로 인해 기지개를 켜는 것만으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곁에는 유럽 연합 사냥팀에서 붙여 준 아름다운 비서가 함께였다.
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탑 클래스는 아니어도 독일 내에서만큼은 최고위 사냥팀에 속한 그녀는 레벨 120대의 강자였다.
하지만 높은 레벨과 반비례하게 그녀는 독일인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도 훨씬 작아서 헤르만과의 체격 차이가 거의 세배는 나는듯했다.
“현 독일의 생존자 수는?”
헤르만 로렌츠의 물음에 여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 역시 대격변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500만 명 정도입니다. 영국의 생존자가 2천만이 넘는 걸 생각하면, 독일은 유럽 내에서도 피해가 큰 편에 속하죠.”
“그렇군.”
그래서일까?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봤지만, 헤르만 역시 가족 중 생존자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비교적 담담했다.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해, 가족들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던 게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가장 강자가 많은 나라이며 최근 들어 불필요한 희생도 크게 줄었죠.”
그러나 자부심 가득한 그녀의 말에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헤르만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강자가 많다?”
“물론입니다. 유럽에선 단연 최고라 칭할 수 있는 전력이죠.”
“그렇단 말이지?”
그는 이미 자신을 크게 환영하며 기대감 어린 시선을 던지던 유럽 연합 사냥팀의 수뇌부를 만났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이렇다 할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헤르만인지라 그녀의 말에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이어 님의 파티는 세계 5대 사냥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죠.”
“세계 5대 사냥팀?”
“네, 우리 독일의 마이어 님과 함께 미국의 제임스, 클로에 주. 한국의 윤시아, 김민희 파티를 일컬어 세계 5대 사냥팀이라 합니다.”
“…….”
“아, 맞아. 클로에는 이제 한국 진영(대한제국)으로 넘어갔으니, 정확하겐 독일 1팀, 미국 1팀, 한국 3팀이군요.”
그러나 헤르만의 표정이 오래지 않아 일그러졌다.
그가 지구로 귀환하고 이틀이 지났다.
귀환의 기쁨을 충분히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제 슬슬 지구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 둬야 할 차례였다.
그런데 세계의 정세를 잘 모르는 그라고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 여기저기서 한국이란 나라의 이름이 꽤나 많이 튀어나온다는 거였다.
더구나 그를 마계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도 그 한국인이었고.
‘복귀 과정에서 들른 서울의 생존 구역은 이곳과 차원이 다른 시설과 환경을 갖추고 있었지.’
심지어 5대 사냥팀 중 3곳이 한국 소속이라 하니,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당연했다.
“한국의 수준은 우리보다 더 높은가 보지?”
“그, 그건.”
정곡을 찔러 오는 물음에 재잘재잘 잘 떠들던 비서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숨겨서 뭐 하겠습니까. 유럽 연합 사냥팀에서 헤르만 님의 복귀를 특히 기뻐하는 이유가 한국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헤르만의 물음에 그녀는 지금의 국제 정세를 담백하게 풀었다.
비록 그녀의 설명이 유럽 중심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국이 가진 힘과 서백호란 존재를 재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 세계의 중심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며, 서백호란 인물은 혼자 수준이 달라서 5대 사냥팀과 같은 규격에 넣지도 못한다?”
“네…….”
“그런 점에서 나의 등장은 서백호를 견제할 수단이 생겼음을 의미하는 거란 뜻이고?”
“맞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헤르만은 한 가지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자신을 견제할 수단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서백호란 놈은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는 건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한국은 전혀 이쪽을 경쟁 세력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모양이군. 이렇게 나를 거리낌 없이 나를 돌려보낸 거 보면.”
“씁쓸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만약 헤르만 자신이 서백호였다면, 잠재적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을 마계에서 조용히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백호는 그러지 않았다.
헤르만은 엔탈론에서 서백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착한 척하는 위선자란 느낌을 받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중증인 녀석인걸?’
물론, 강한 만큼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헤르만은 서백호의 성향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출난 1명은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전체의 수준이 밀리는 건 무슨 창피야?”
“네?”
“유럽 연합 사냥팀은 쪽팔린 걸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헙…….”
거리낌 없이 빈정대는 그의 반응에 비서는 크게 움찔거렸다.
그리고 헤르만이 말을 이었다.
“대단하다고 자랑한 독일 제일의 사냥팀에게 안내해 봐. 직접 수준 파악을 해야겠어.”
“뭐, 뭘 하시려고요?”
“뭐긴, 대련이지. 너희도 내 수준이 궁금할 거 아냐?”
이번에도 정곡을 찌르는 헤르만.
비서인 그녀의 임무 중엔 헤르만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상부에 연락해 그의 요청을 전했고, 곧 헤르만과 유럽 최고의 사냥꾼 마이어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전력으로 덤벼 봐.”
“거절하지 않겠네.”
그렇게 레벨 180대의 헤르만과 레벨 160대 마이어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은 마이어와 함께 유럽 연합 사냥팀을 이끄는 각국의 대표들이 모인 곳에서 진행되었는데…….
-콰아아앙!
“이럴 수가.”
감히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생각보다 더 변변치 않은걸?”
그 마이어가.
세계 5대 사냥팀의 한 축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사냥꾼인 그가 아무것도 못 하고 패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니, 패배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승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지금부터 모두 내게 투자하도록! 그럼 다시는 동양의 소국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어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한 헤르만이 광오하게 외쳤다.
그에 대련을 직관한 사람들의 표정은 이해관계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여러 감상 중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진 일치된 감정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안도감이었다.
“드디어 우리도 규격 외 사냥꾼을 보유하게 되는 건가?”
“저자는 검투사 생활 때문인지 몰라도 장비가 형편없어. 그런데도 저리 강한데, 장비마저 제대로 갖춘다면 어찌 될까?”
“정말로 서백호에 대항할 수 있는 극강의 패가 될지도 몰라.”
“아니지, 어쩌면 대항의 수준을 넘어 잡아먹을 수 있을지도.”
비로소 자신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생긴 것이다.
더불어 이들 입장에서 폭거라 할 수 있는 한국의 행동을 막을 수단이 생긴 것이기도 하고.
“헤르만의 성장을 유럽 연합 차원에서 전력으로 지원해 줘야 해.”
“하지만 문제가 있어. 그의 보조를 맞출 동료가 없다는 거야.”
“없으면 만들어야지.”
“만든다고? 이제부터?”
“서백호의 곁에 멋진 성공 사례가 있잖아. 그걸 따라 하면 돼.”
“설마, 서백호 파티를 벤치마킹하자는 거야?”
“그래. 대부분의 NPC는 주인의 수준에 맞춰 능력치와 레벨이 부여되지. 그럼 손쉽게 같은 레벨의 동료를 얻을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호감도 작업은 쉽지 않아. 못해도 한 달은 공을 들여야 한다고.”
“아냐, 그 시간을 단축할 방법은 있어. 최근 새로 생긴 던전들에서 호감도 아이템이 나온다고 하니까.”
헤르만의 성향은 둘째치더라도 그의 강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유럽 연합 사냥팀은 헤르만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순조롭게 장악 중이네.”
나는 독일인 헤르만과 미국인 데이비드를 면밀하게 관찰 중이었다.
정확하겐 내가 움직인 건 아니고, 그들 틈에 섞어 놓은 정보원들로부터 상세한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있는 상태.
그런데 의외인 게.
딱 봐도 양아치 같은 헤르만과 달리, 조용할 것 같던 미국인 데이비드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며 나라를 장악해 나가고 있단 사실이었다.
덕분에 백악관의 힘이 강한 미국은 독일보다도 빠르게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제임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봐주며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의무 전쟁이란 지속적인 분쟁 시스템을 제거하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세계를 통합하여야 한다.
어차피 나는 세계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지 않으니, 통합은 표면상으로 이뤄지는 것일 뿐, 각국의 주권은 보장해 줄 것이다.
대한제국에 흡수된 나라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무주지의 점령을 이어 가는 와중에도 이런 뒷공작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백호 님. 저기 보세요.”
“저건?”
오늘도 우린 어느 무주지를 방문했다.
내가 공격하는 무주지는 보통 위험도가 높은 곳인데, 오늘 찾은 곳은 이전까지와 달랐다.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수수께끼라고 해야 할까?
세계에서 가장 작은 걸로 추측되는 영지였다.
이곳은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동티모르처럼 작은 나라는 인근 국가와 같은 지역으로 영지가 묶이곤 했는데,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동부의 일부 지역과 파푸아 뉴기니까지 3개국이 묶여 있는 곳에 속했다.
“문?”
“제가 보기에도 문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우리가 방문한 곳은 동티모르 소속 3개의 영지 사이에서도 유독 특별했다.
이유는 아타우루 섬이라는 울릉도보다 조금 큰 이 섬이 단독 영지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동티모르의 사냥꾼들로선 우선적으로 본토의 영지를 차지해야 했기에 아타우루 섬은 후순위로 밀려 결국 무주지가 되었고,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여유가 생겨, 동티모르 사냥팀들은 비로소 아타우루의 탐색을 진행했지만…….
‘그들 모두 귀환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더랬지.’
그래서 동티모르 측에선 인근 강성 세력인 인도네시아에 도움을 청했는데, 문제는 인도네시아의 조사 대원들도 귀환하지 못했다.
끝내 이 소식은 건너 건너 우리 대한제국에까지 알려지면서 이렇게 내가 방문하게 되었다.
“재밌는 곳이네. 대체 이건 또 뭘까?”
시에나의 감상에 나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티모르 아타우루 섬의 무주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섬 중심에 덩그러니 문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 문을 앞에 두고 고민해야 했다.
“아마도 이 문이 행방불명된 조사단들과 연관이 있는 거겠죠?”
“그렇겠지.”
이 문을 열어야 할지, 아니면 말지를.
위험해 보이는 건 건들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제가 염력으로 열어 볼게요. 잠시 물러나죠.”
결국 우린 문을 열어 보기로 했다.
대신 만약을 대비해 거리를 벌리고, 양손엔 귀환 스크롤을 쥔 상태에서 염력으로 열 생각이다.
쫄보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끼이이익!
잠시 후, 방공호처럼 생긴 녹슨 철제문이 염력에 의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곧 어두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났다.
“우와. 진짜 가기 싫어지게 생겼네.”
윌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감상을 내뱉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살벌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