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전쟁의 신호탄 (3)
마치 터널 붕괴 현장을 보는 듯 처참하게 무너진 지하 공간.
언제 비어 있는 지하를 토사가 덮쳐 메울지 알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풍경이 펼쳐져 있으나, 우리 파티의 신경은 온통 새로이 등장한 존재에게 쏠려 있었다.
[엘더 사이코 로드 메이즈 / 레벨: 220]
엘더 사이코 로드?
별 희한한 이름을 다 본다.
‘엘더’와 ‘로드’란 칭호가 붙어 있는 거 보면 이 녀석이 이곳의 영주인 모양인데, 나는 이 상황이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인간을 납치하여 언데드와 자폭 폭탄으로 만들고, 무시할 수 없는 함정을 기동시키는 데다가, 공간 전체를 생물처럼 조종한 게 이 녀석이란 뜻인데.
지금까지 상대한 몬스터들과 전혀 다른 전투 패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족?’
사이코란 게 종족명이 아닌, 직업을 뜻하는 거라면 이 녀석은 마족이 맞을 것이다.
솔직히 마족이건 뭐건 이놈의 잔혹한 행위를 보면 봐줄 필요가 없지만…….
지금까지 상식을 뒤엎는 전투 패턴을 보여 준 놈인지라 검을 휘두르기 전에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물음을 던졌다.
“네가 이곳은 영주인가?”
[네, 맞습니다요. 제가 영주입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며 느꼈던 공포스러울 만큼 강렬한 사기.
대체 그건 뭐였는지, 보잘것없이 앙상하게 마른 사내가 비굴하게 웃으며 목숨을 구걸해 왔다.
이곳까지 오면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내가 바보처럼 여겨진다.
그는 마른 것을 빼면 여타 마족들이 그런 것처럼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그저 머리 위에 작은 뿔이 달렸다는 정도?
순순히 답을 하는 놈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흘린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곳 지하 시설이 살아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거야?”
[저, 저희 가문의 가보 중 영역 구축이란 아이템이 있습니다. 그걸 사용해 제 취향에 맞는 보금자리를 만든 거죠.]
그리고 이어진 놈의 대답에 나는 작지 않게 놀랐다.
그럼 레벨 200이 넘는 사냥팀 중에서도 특출난 전투력을 가진 우리의 발길을 붙잡고, 수차례 위협을 선물한 게 단 하나의 아이템 덕이란 뜻인가?
[언데드와 자폭 몬스터 등은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저희 가문의 비전 스킬이 네크로맨시아인데, 둘 모두 비전 스킬에서 파생된 거거든요.]
“함정형 쐐기 공격은?”
[그건 구축된 영역의 자체 방어 시스템입니다.]
마족의 고위 귀족 중엔 비전 스킬을 갖고 있는 가문도 있다.
사실 비전 스킬이라는 게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그저 연관성이 있는 상급~극상급 스킬 여러 개를 하나처럼 묶어서 사용하는 고유의 스킬 트리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물론, 다양한 스킬이 거미줄처럼 엮어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기에 비전이라 하는 거다.
이는 가문의 절기이기에 유출을 꺼린다고 하던데, 솔직히 놈의 가문이 가진 비전은 혐오스러워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럼 네 가문의 아이템과 비전 스킬을 합쳐서 이 공간을 구축한 거다?”
[그, 그렇습니다.]
“시체 주변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 같은 건 뭐야?”
[각 장치를 작동케 하려면 마력원이 필요한데, 시체에서 사기를 추출해서 이를 대체했습니다. 마력석이나 정령석 등을 활용하면 굳이 시체 배터리를 쓸 필요 없지만, 효율 면에서는 역시 시체가 최고입니다.]
즉, 헬레나처럼 녀석을 살려서 데리고 있지 않는 이상 앞선 시설을 똑같이 구축하는 건 불가능하단 뜻이다.
궁금증을 풀었으니, 이제 놈을 보내 줄 차례인데, 나는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는 로드급 엘더 몬스터이자 영주가 된 마족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기회에 놈에게서 정보를 최대한 빼내기로 마음먹었다.
-척!
“몬스터화 된 마족을 볼 때면 항상 궁금한 게 있었어.”
[네네, 뭐든 여쭈셔도 됩니다.]
나는 듀랜달을 비실이의 목에 들이밀었고, 그에 놈은 아는 것이라면 모두 대답할 자세가 되어 있다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흰 마계에서 넘어온 거지?”
[제가 가진 기억이 시스템에 의해 심어진 가짜가 아니라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그럼 어떤 식으로 넘어오는 거야? 퀘스트 같은 건가?”
내 물음은 무주지를 점령한 영주 중 절반이 마족이란 점에서 기인한 궁금증이었다.
마족과의 대립은 거의 확실시 되고 있으니, 이왕이면 놈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네, 맞습니다. 어느 날 제가 바라던 것을 시스템이 보상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지구에서 제시된 임무를 달성하면 그 보상을 받고 마계에 복귀하게 되는 거죠. 임부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계에서 저의 존재는 없던 것이 되며, 임무를 달성하고 복귀한 후에서야 복구가 됩니다.]
진짜 그런 시스템이라고?
대충 찍은 건데, 맞췄다.
마족을 끌어들이면서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면 마계에서 관련 정보를 못 얻는 게 당연한 것 같다.
나는 흥미를 표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네 임무는 뭔데?”
[나만의 국가를 건설하고, 지구의 국가가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막는 겁니다.]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5개의 영지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시스템상으로 국가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짱박혀 있는 놈이 그런 임무가 가능하기나 할까 싶었다.
[실은 이곳을 포함해 이미 세 곳의 영지를 확보해 놨습니다.]
“뭐?”
그런데 나는 놈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이유는 동티모르의 섬인 아타우루가 다른 영지를 공격했단 소식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잡아 온 인간들을 통해 대략적인 국제 정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판단했죠. 섣불리 인간들의 영역을 건드려서 좋을 꼴을 보기 힘들겠구나라고요. 그래서 주변에서 레벨 200 이하의 몬스터가 영주로 있는 무주지를 공격해 그곳을 차지했습니다.]
몬스터가 몬스터의 영역을 공격해 차지했다고?
생각지도 못해 본 방식이다.
“넌 몬스터잖아?”
[몬스터 신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을 못 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내가 최초로 사냥한 로드급 엘더 몬스터도 인간을 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놈도 분명 마족이었지.
‘좋지 않은데.’
만약 다른 무주지의 영주들도 이놈처럼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 귀찮아질 것 같다.
때문에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이후로도 일방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놀랍게도 놈은 바다 아래에 땅굴을 파서 이웃 무주지에 침입하고, 영역화된 자신의 공간을 적극 활용해 그곳의 영주들을 암살하듯 처리했다고 한다.
그런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의 무주지 하나, 호주 북부의 무주지 하나를 먹은 것이다.
이놈 덕에 마족형 몬스터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전략을 써먹는다는 점에서 이 녀석들은 다른 몬스터들과 같은 취급을 해선 안 되겠어.’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온 무주지의 보스들은 운 좋게 단순한 무도 계열이었던 것뿐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의 환경에 익숙해진 무주지의 마족들이 연합이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사, 살려 주시는 거죠? 저 뒤에 몬스터처럼, 저도 당신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모두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다시금 납작 엎드리며 목숨을 구걸해 왔다.
아무래도 이쪽에 헬레나란 선례가 있어서 놈도 희망을 품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친절하게 질문에 대답한 건가 싶어 실소가 절로 났다.
“내가 왜?”
하지만 나는 놈의 기대를 배신했다.
비실이의 반응을 보니 더는 얻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 이제 그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오른손에 바리사다를 빼 들자, 놈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째서.]
내겐 거짓을 판별하는 진실의 눈이란 스킬이 있다.
그 진실의 눈이 유일하게 반응한 순간이 있었으니, 녀석이 살려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말이었다.
마족도 각자의 개성이 있다.
신의를 가진 마족이 있는 반면 단순히 악으로 가득한 놈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놈은 근본부터 썩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네가 여기서 한 짓들 보면 그냥 좋게 볼 수가 있어야지.”
[이익, 더러운 인간이!]
게다가 이 비실이의 손에 죽어 나간 많은 희생자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봐줄 수는 없었다.
“영역 구축 아이템은 드랍하고 가 줬으면 좋겠어.”
불쌍해 보이는 외형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놈은 레벨이 220에 달한다.
우리에게 겁을 먹어 그럴 뿐, 기본 능력은 출중하단 뜻이다.
순순히 당하진 않겠다는 듯 비실이의 손에 마력이 모였다.
하지만 승패는 이미 예전에 정해졌다.
마족형 몬스터에 대해 경각심을 심어 줬다는 점에서 놈과의 만남 자체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바리사다를 뻗었다.
* * *
사냥꾼 협회의 본부 청사이자, 대한 제국의 대외 업무를 관리하는 시설이 된 서울 1구역 관리처의 내부를 한 여성이 다급한 표정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는 사냥꾼 협회 관리 본부 본부장실 겸 대한제국 관리 총괄 지위를 가진 강이솔의 방문 앞에 도착했고, 비서가 말릴 틈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유나 님, 무슨 일이세요?”
급히 강이솔을 찾은 여인은 사냥꾼 협회의 전투 지휘관 조유나였다.
전직 프로게이머이자, 유튜버이기도 했던 그녀는 사냥꾼 협회와 대한제국의 주요 간부였기에 강이솔은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도 뭐라 하지 못하고, 순순히 방문 이유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발언에 강이솔은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협회 러시아 지부, 아니 대한제국의 러시아 영토가 일제히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현재 동과 서로 분리된 상태다.
동쪽은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해 모스크바의 주요 세력이 자리하고 있고, 동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7개 지역을 사냥꾼 협회 지부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예전엔 모스크바 정부가 방대한 동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방치하고 있었고, 이런 곳의 질서를 잡아 준 게 사냥꾼 협회인데, 그때는 두 세력이 동맹을 맺고 있던지라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시작되면서 동맹이란 게 유명무실해지고 대한제국이 출범하게 되자 모스크바의 항의가 거세져 갔다.
그러던 차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결국 일어날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 느낌이었다.
“젠장, 진짜 전쟁인가?”
이제 러시아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고와 같은 상태가 지금의 국제 정세이기에 자칫 이번 일로 인해 연쇄 작용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긴급 출동팀을 꾸리고, 협회장님께도 연락을 하겠습니다. 드미트리(러시아 영토 관리자) 님께 빠르면 30분 이내에 지원이 가능할 거라 전해 주시겠어요?”
그래도 다행이라면 자신들은 약하지 않다는 거다.
러시아 동부 세력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갖고 있는 만큼, 공격을 당한다고 쉽게 함락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강이솔이었다.
또한 자신들에겐 최강의 패 서백호가 있지 않은가.
러시아의 경솔한 행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강이솔의 판단은 바로 무너졌다.
“틀렸습니다.”
“네?”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무너졌을지 몰라요. 차라리 생존자들의 피난을 유도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게 무슨?”
“러시아 놈들이 레벨 200이 넘는 무주지의 몬스터 영주들과 손을 잡고 공격해 오고 있으니까요! 드미트리 님도 생사가 불분명합니다!”
“허…….”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폭탄 발언에 강이솔은 멍청한 표정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 *
대한제국의 영토가 공격을 받고 있다.
즉, 기다리던 전쟁이 발발했단 소리.
의무 전쟁이란 규칙을 없애기 위해 세계의 단일 세력화를 바라던 나로선 좋은 계기였다.
‘꽤 빠르네? 미국일까? 아니면 독일을 낀 유럽 연합?’
마계에서 구해 온 미국인과 독일인을 대가 없이 돌려보낸 게 이런 상황을 일으켜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연쇄 작용이 일어나면 이를 명분 삼아 한 번에 쓸어버릴 속셈이다.
하지만.
나는 공격을 감행한 게 미국이나 독일을 낀 서유럽 쪽이 아닌, 러시아란 사실에 황당함을 표해야 했다.
“허? 무주지의 영주 몬스터들과 연합을 했다고요? 러시아가?”
[그, 그렇습니다!]
동티모르 아타우루 섬에서 마주한 비실이 마족 덕분에 무주지의 영주 몬스터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던 차에 벌어진 사건.
설마 인간이 몬스터와 손을 잡고 같은 인간을 공격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해. 레벨 200이 넘는 영주급 몬스터 여럿과 연합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만들어지니까.’
몬스터들과의 동맹을 성사시키다니, 러시아가 보인 지옥의 외교술에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