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명분 충족 (1)
“이, 이러지 말고 우리 대화로 푸는 게 어떻겠나?”
러시아 대통령이 내 앞에 기고 있다.
대재앙 이전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세상이 한 차례 붕괴하고, 새롭게 자리 잡은 질서 속에서 이는 분명한 현실이 되었다.
“이제 와서?”
블라디보스토크 침공전을 승리로 장식한 이후, 우리 대한제국은 파죽지세로 러시아를 점령하여 단 이틀 만에 모스크바에 닿을 수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러시아의 땅덩어리가 무식하게 커서 이틀이나 걸린 거지, 어중간한 크기의 나라였다면 단 하루도 되지 않아 모든 거사가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행동한 것치고 정작 러시아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현 시간부로 우리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귀속을 선택하는 바이니…… 자, 자네가 바라는 게 학살이 아닌 평화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지 않겠는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강건하던 양반이 막상 죽을 위기에 놓이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지금에 와선 전쟁을 역전하는 건 불가능.
러시아 대통령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좋아. 러시아를 향한 공격 행위를 멈추도록 하지. 단, 책임자를 처단한 뒤에.”
“뭐?”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존재는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전범이다.
이를 심판하지 않고 무르게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나는 짧은 선고와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설마 일을 이리 크게 벌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자, 잠깐!”
-콰직!
그러자 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지옥견 멍멍이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돌고래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순식간에 러시아 대통령을 삼켜 버렸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전쟁이 종료됩니다.]
[러시아의 모든 영토가 대한제국에 편입되며, 영주와 국왕에게 지급되었던 세금이 몰수됩니다.]
[전쟁 승리로 대량의 경험치와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획득한 보상의 분배 방식을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해당 메시지와 함께 대량의 경험치와 코인이 입력되었다.
레벨이 210이 넘는 나와 달리 레벨 100대의 동료들은 이 보상만 잘 나눠 줘도 한 번에 대량의 레벨업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경험치는 균등 분배로, 코인은 공로순 분배로 선택했다.
-파파팟!
“오오!”
그러자 우리 파티를 제외한 모든 대한제국 소속 사냥꾼들에게서 연달아 레벨업 이펙트가 떠올랐다.
영주급 몬스터를 처치하고 얻은 경험치는 이미 받았다.
추가로 받게 되는 이 경험치는 어디까지나 전쟁 승리에 대한 보너스와 같은 것.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양인 만큼 공로순으로 차지했다면 한 번은 레벨업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 우리 파티 셋이 레벨 1을 올리는 것보다 부하 수백이 레벨업을 하는 게 전력 상승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윤시아 / 레벨: 173]
[클로에 주 / 레벨: 174]
레벨이 170이 넘은 윤시아와 클로에 주 파티의 경우 두 번의 레벨업에 그쳤다.
하지만 그녀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레벨 160대 후반인 김민희는 세 번의 레벨업으로 드디어 170을 찍었고.
우리 대한제국의 기둥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차상위 멤버들 김현수, 최도겸, 박상만, 조유나, 중국 무당파, 일본 다나카 파티 등 레벨 160 초반의 멤버들은 무려 네 번의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최정예 멤버들의 레벨업이 이 정도 수준인데, 그 밑은 말해 뭐 하겠는가.
아무래도 이번 전쟁의 상대가 러시아일 뿐 아니라, 무주지의 영주급 몬스터까지 다수 끌어들인 만큼 규모가 커서인지, 그 보상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전쟁 이상 가는 성장 수단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네. 아마 이것 또한 전쟁을 부채질하기 위한 장치겠지.’
러시아 대통령을 한입에 삼킨 멍멍이는 다시금 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백한 안색으로 완전히 굳어 버린 러시아의 한 군인을 바라보았다.
-흠칫.
그러자 완전히 기세가 꺾여 버린 군인이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처럼 러시아를 대표하는 사냥꾼이었다.
이미 몇 번이고 마주쳤던 인물인지라 얼굴 정돈 알고 있다.
“시스템은 전쟁의 승패를 정했지만, 불복한다면 덤벼도 됩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뭉친 러시아의 경우 대통령의 힘이 워낙 강해서 대표 사냥꾼도 군 소속으로 묶여 있었다.
러시아 사냥꾼들의 입장을 확인하고자 물은 질문에 그는 전투 의사가 없다며 양손을 들어 완전 항복을 표했다.
“아뇨. 이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죽은 지금, 러시아 군의 최고 명령권자는 바로 저입니다. 우리 군은 대한제국에 러시아가 귀속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대량의 레벨업으로 기분 좋게 능력치를 분배 중인 대한제국 사냥꾼들과 항복 선언을 하는 러시아 사냥꾼들의 모습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거짓은 아니군.’
참담한 감정을 느낄지언정 나를 속일 생각은 없는지, 진실의 눈은 그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려 주었다.
“좋습니다.”
덕분에 순순히 그의 선언을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시스템적인 지배권은 우리가 가져가겠지만, 실제 이 땅을 지배하진 않을 겁니다. 상점 및 코인 거래 세율도 대한제국이 그런 것처럼 기본 수치인 1할로 고정할 예정이고요. 그러니 당신들이 직접 영토를 관리할 새로운 대표를 뽑도록 하세요.”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후하다고 할 수 있는 결정이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도 불변하지 않을 대한제국의 방침이다.
우리 대한제국은 시스템으로 세상을 하나의 세력으로 묶기 위해 무기를 든 것이지, 타국을 약탈하기 위해 나선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관대한 결정을 내려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들로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침략자 포지션임에도 그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전쟁은 끝이 났다.
더 이상 미련이 없는 나는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망토 자락(다크매터)을 펄럭이며, 러시아 대통령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 * *
무주지의 영주급 몬스터를 아군으로 끌어들인 신선한 발상과, 이를 활용하여 대한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선택으로 인해 전 세계의 이목이 러시아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황당할 만큼 압도적인 러시아의 패배.
그동안 보인 대한제국과 서백호의 위용을 떠올리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결과가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에 많은 국가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러시아가 먹히게 되면서 전 세계의 3할은 대한제국 소속이라 봐도 될 정도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행보에 정의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번 전쟁으로 죽은 러시아인의 수가 무려 5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겉으론 옳은 척,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나서고 있지만, 그들은 단 한시도 팽창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명분이 생긴다면 거침없이 무기를 들고 타국을 침략하고 있어요!”
덕분에 어중간하게 간을 보는 식으로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각국은 대한제국의 휘하로 들어갈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렇게 대한제국을 나쁘게만 볼 필요 있겠습니까? 이번 전쟁은 러시아 측이 일으킨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패전국인 러시아가 받는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사실 서백호 협회장과 대한제국이 바라는 건 시스템상 세계를 하나로 묶고자 하는 거지, 진짜 침략을 위한 게 아님을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대한제국 휘하로 들어간다고 해도 시스템상으로 그들의 속국이 되는 것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은 각국의 행정 대표 선발부터 관리까지 해당 국가의 민족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세계가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진다면 의무 전쟁 조항도 사라지니, 오히려 사회는 안정될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대한제국의 손길에 거부감을 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 그들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소?”
“그건…….”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듯, 세계를 일통한 뒤 서백호가 마음을 바꿔 먹으면 막을 도리가 없지 않소! 더구나 시스템상 지도자는 주민을 임의로 추방할 권한이 있으니, 그가 반기를 드는 모든 이를 추방한다면 완전한 독재가 갖춰지고 만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자고로 욕심 없는 인간은 없는 법.
당장은 약속이 지켜지더라도 그 약속이 언젠가 깨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선택’이라는 대한제국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현재 대한제국과 대척점에 있는 주요국이 과거의 열강들인 만큼, 평화를 동반한 약속이 그리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는 건 그들 자신의 역사가 증명했다.
“하지만 곧 이어질 마족과의 전쟁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류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대한제국이 아닌, 마족에게 고향을 유린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그게 무슨?”
“마족의 침공은 대한제국의 일방적인 주장 아니오? 그리고 세계가 하나의 세력으로 일통되지 않더라도 협력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그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 그래도 세력이 일통되지 않으면 의무 전쟁으로 애꿎은 사람들만 죽어 나갈 거 아닙니까?”
“서로 하나의 영토를 주고받는 식으로 의무 전쟁을 넘기면 되지 않겠소? 오히려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세계 일통을 부르짖는 대한제국의 저의가 의심스러운데?”
시스템은 꼼수를 쉬이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반대 의견을 내기로 마음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
때문에 ‘친 대한제국’보다 ‘반 대한제국’의 의견에 힘이 실리는 게 당연했다.
“비록 러시아가 무주지의 영주급 몬스터 열둘을 동원하고도 패배하긴 했지만, 분명 전투는 성립했소. 그럼 우린 그들의 2배 이상의 영주급 몬스터를 끌어들이면 되겠지.”
“…….”
“아니, 이 기회에 반 대한제국 동맹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결국, 세계의 흐름은 서백호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한제국과 대한제국에 반하는 국가들로 세력이 깔끔히 양분되고 만 것이다.
이는 러시아 덕에 무주지의 영주급 몬스터를 회유하는 것이 가능하단 게 알려진 덕이 컸다.
* * *
이 말을 한 번쯤은 내뱉고 싶었다.
“감히 나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인가?”
한껏 무게를 잡고, 미국 측에서 보내온 외교 문서를 보며 나는 그리 말했다.
“야, 쟤 뭐 잘못 먹음?”
[권력을 손에 넣더니, 뒤늦게 중2병이 돋은 거 아닐까요?]
물론, 이런 나를 보며 시에나와 헬레나가 웅성거리는 것을 들은 나는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우리가 자리한 곳은 철원 중립 도시 내부의 왕성이다.
이 왕성 중심부엔 화려한 왕좌가 놓인 대전이 있는데, 그곳에 앉아 있을 때면 가끔 이런 대사를 내뱉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거지?”
내가 뻘쭘해하며 다가가자 어딘가 답답해 보이는 시에나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성을 냈다.
그녀가 화가 난 것도 당연하다.
미국에서 보내온 정중한 외교 문서에는 우리 대한제국에 대항하는 거대 세력의 발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당사국을 포함한 북미와 유럽 연합, 베이징, 아세안(동남아), 아프리카, 남미까지 대한제국에 속하지 않은 모든 국가들이 우리의 반대 세력이 된 것이다.
그 규모는 아무리 대한제국이라 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때문에 시에나가 이리도 성을 내는 것이다.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째서?”
나는 그런 시에나의 걱정에 태연하게 반응했다.
덕분에 그녀는 귀여운 얼굴을 들이밀며 궁금증을 표해 왔다.
그에 나는 씨익 웃어 보이며 답했다.
“이런 동맹은 오래갈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이 답이 명확한 내용을 품고 있지 않아, 시에나는 쉽게 말하라며 도끼눈을 떴다.
“저들은 내부에서 조금만 흔들어도 금방 무너질 겁니다. 때마침 내부에 심어 놓은 ‘장기말’도 있으니까요.”
“장기말?”
“네, 원랜 이 용도로 쓸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그들을 활용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나는 직접 몸으로 움직여 사건을 해결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필요하다면 음모 꾸미기를 주저하지 않는 현실주의자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어느 두 사람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이런 음흉한 내 모습에 시에나는 당장 설명하라며 내 양 귀를 잡아당겼다.
‘이거 잘하면 더욱 손쉽게 세계를 일통할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