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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233화 (233/273)

233화 명분 충족 (3)

“그러니까. 나를 키워 주겠다?”

헬레나로부터 서백호의 전언을 듣게 된 헤르만은 오래지 않아 황당함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 짧은 물음에 굉장히 언짢은 감정이 담겨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헬레나와 다켈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 태도로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덕분에 헤르만의 저택 내 식당엔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헬레나였다.

“어째 반응이 백호 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네. 그분께서 당신이 불쾌한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면 전하라고 한 말이 있어.”

“뭔데?”

자존심 때문인지 헤르만의 말투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헬레나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의 정세가 정상적이라 생각해?”

“뭐?”

“대한제국에 대항하겠다며 전 세계가 손을 잡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몬스터까지 끌어들이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냐는 거야.”

그제야 상대의 말뜻을 이해한 헤르만은 미간을 좁혀야 했다.

정작 이 말을 한 장본인도 몬스터였지만, 그는 질문의 본질에 집중했다.

그가 쉬이 답을 못 하자 헬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지. 심지어 당신도 꽤 불쾌할 텐데? 영주급 몬스터는 대부분이 마족이잖아? 그쪽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놈들과 같은.”

“날 조롱하고 싶은 건가?”

“어떻게 보면 이 사태가 벌어진 게 당신의 탓이기도 해.”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렇잖아? 당신이 제대로 백호 님의 대항마 역할을 해 주었으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을 테니까. 원래대로라면 유럽은 ‘헤르만 로렌츠’를, 미국은 ‘데이비드 카터’를 키우며 대한제국에 대항하는 꿈에 한창 빠져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 해 주니까 이 사태가 벌어진 거잖아.”

그녀의 말에 헤르만은 뒤늦게 서백호가 자신들을 아무런 조치 없이 고향으로 돌려보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고삐인 셈.

미국이나 유럽 등 주요국이 폭주하여 엇나가는 것을 제어하기 위한 고삐로 서백호가 스스로 그들을 대항마로 내세웠단 뜻이다.

“하, 그 인간 바보인가? 그러다가 되레 잡아먹히면 어쩌려고?”

“입만 나불대는 당신의 지금 모습을 보면 그리 걱정할 필요 없었을 것 같은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상대를 도발하는 언변이 아주 일품인 헬레나였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보만 없다면 헤르만은 눈앞의 여성이 몬스터인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헬레나는 고등 몬스터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증명하는 존재였다.

“아무튼, 결론이 그거야. 너희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으니, 도움을 주겠다. 유럽과 미국이 이번과 같은 뻘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발언력을 키워 주겠다.”

“결국, 나를 강화시켜 유럽의 고삐를 쥐게 만들겠단 건데…….”

솔직히 헤르만의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서백호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거지만, 그 과정에서 헤르만이 손해 볼 게 없었으니까.

헬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헤르만이 처음으로 여유를 보이며 이죽거렸다.

“영주급 몬스터들을 끌어들인 반대한제국 연합이 위협적이긴 한가 보네, 서백호 그 양반이 이런 수까지 쓰는 거 보니.”

하지만 헬레나는 그의 이죽거림에 열을 올리긴커녕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너희처럼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계시지 않으니까.”

“무슨 뜻이야?”

“조금 거국적으로 멀리 보고 움직이신단 거지.”

“하하, 거국적이라고?”

“그래, 백호 님은 인간끼리의 전쟁보다 그 이후의 일을 걱정하고 계시거든.”

인간끼리의 전쟁 그 이후.

헤르만도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대한제국에선 인간끼리의 전쟁이 끝나면, 마계와의 전쟁이 이어질 거라 주장한다지?”

“그렇게밖에 볼 수 없잖아. 굳이 마계와 연결된 길이 존재하는 거 보면.”

“흠…….”

그제야 처음으로 헤르만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그가 생각해도 대한제국의 추측은 충분히 타당해 보였다.

“인간들 틈 사이에서나 백호 님이 특출나지, 마족들 사이에선 아니야. 인류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몬스터를 끌어들이며 분열하고 있으니 참 미래가 밝겠어. 그치?”

때문에 코웃음 섞인 헬레나의 말에도 헤르만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생각을 정리하던 헤르만은 처음으로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헤르만의 시선이 향한 곳엔 그의 동료이자 NPC인 제니스가 잠자코 앉아 있었다.

제니스는 설마 그가 의견을 물어 올진 몰랐는지, 작게 놀란 듯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직 저들이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건지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저울질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네.”

지극히 당연한 제니스의 주장에 헤르만이 그걸 듣지 못했다며 헬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직접적인 물적 지원과 효율적인 성장을 위한 사냥터 정보 제공, 더불어 전투 인력 지원까지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서 헬레나는 식탁 위로 몇 개의 아이템을 꺼냈다.

[부르트강 / 양손 대검 / 등급: 유일 / 강화: 5단계]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검을 집어 든 헤르만은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무려 5강의 유일 등급 대검이었으니 말이다.

5단계 강화 상태면 내장 스킬의 위력이 5배나 상승한다.

가뜩이나 유일 등급 무기의 공격 스킬은 현 최고 단계인 극상급을 넘어서는 위력을 갖고 있는데, 그게 5배나 더 강해지는 거다.

‘서백호는 공격 한 방으로 산을 날려 버린다고 하지? 그게 허풍이라 생각했는데, 유일 등급의 5강 무기가 있다면 가능한 일일지도…….’

사냥꾼이라면 욕심이 안 생길 수 없는 극강의 무기.

심지어 그녀가 꺼낸 추가 장비들은 희귀 등급이었으나, 4강까지 강화가 된, 유일 등급에 준하는 장비들로 하나같이 유럽연합에서 심혈을 기울여 마련해 준 기존 장비보다 압도적으로 좋았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싸움 실력이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뛰어난 실력이 있다고 해도 그 뒤를 받쳐 주는 장비가 후지면 최고가 될 수 없어.”

마치 유혹하듯 이어지는 헬레나의 대사에 자신의 실력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헤르만조차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성의 표현이 되는 것 같은데?”

제안이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선물에 헤르만의 시선이 다시금 NPC 동료인 제니스에게 향했다.

그런 제니스 앞에도 윌리아가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귀한 장비들이 올려져 있었다.

“대단하군, 이런 장비를 턱 하니 내어 줘도 상관없을 정도란 건가?”

헬레나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헤르만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도 귀한 것들이긴 하지. 하지만 없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되는 건 아니야.”

새삼 서백호 일행과의 격차를 느끼게 된 헤르만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효율적인 레벨업을 위한 사냥터 정보에 전투 인력 제공까지 이어진다는 거지?”

“그래.”

“인력은 어떤 식으로 제공되는 거지?”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해 줄 수 있어.”

두 가지 방안을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란 뜻.

헤르만은 어째서 그들이 두 가지 방안을 제안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네가 싫어할 수도 있는데…….”

“말해 봐.”

“서백호 님 휘하에 시스템으로 엮인 고레벨의 마족 부하들이 제법 많거든? 이들을 지원받는 거야.”

같은 마족이긴 해도 시스템으로 엮인 부하는 무주지의 영주 몬스터와 완전히 입장이 다르다.

하지만 헤르만은 마족 그 자체를 싫어하는지라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나는 너만큼 좋은 장비로 무장하고 너하고 같은 입장인 파티를 붙여 주는 거지.”

“같은 입장?”

의문을 표하던 헤르만이 이내 두 눈을 크게 뜨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미국의 데이비드와 그의 NPC 동료 말이야.”

“호오…….”

헤르만에게는 서백호뿐만 아니라 미국의 데이비드도 경쟁 상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와 실력이 비슷하니 함께하라?

이는 서백호가 아닌 이상 감히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재밌네.”

결국, 헤르만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서리고, 헬레나는 끝끝내 그에게서 원하던 대답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 * *

마계와 지구의 경계인 마경.

그 마경의 중심엔 아무리 나라고 해도 덤벼들 수 없는 드래곤급, 준드래곤급의 존재가 많다.

인간들 틈바구니에서나 절대자처럼 굴고 있지, 나보다 강한 상대는 얼마든지 있단 뜻이다.

“아무리 미끼라지만, 너무 과하게 지원해 준 거 아냐?”

그런 마경의 중심에서 그나마 상대가 가능하다 판단한 준드래곤급 존재의 공략을 준비하던 내게 시에나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져 왔다.

주어가 빠지긴 했지만, 그 물음이 독일의 헤르만과 미국의 데이비드에 관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지난 러시아 전쟁으로 얻은 부르트강을 포함해 전부 우리가 쓰지 않는 장비인 데다가…….”

나는 그녀의 궁금증에 씨익 웃어 보이며 답을 했다.

“쓸모가 다하면 뺏어 오면 그만이니까요.”

“오?”

그제야 내가 거리낌 없이 귀한 장비들을 건넨 이유를 알게 된 시에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악마 새끼를 키웠어.”

그런 그녀의 감상에 윌리아가 지적했다.

“엄연히 따지면 넌 우리의 딸 포지션인데. 네가 누굴 키워?”

능청스러운 시에나의 대사에 언제나처럼 딴지를 거는 윌리아.

“뭐래 공기가?”

하지만 시에나도 그런 윌리아의 딴지를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최근 대화의 주체가 시에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윌리아를 공기라 놀리는 그녀였다.

덕분에 그리 크지 않은 지하 동굴에 두 사람이 티격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만요.”

그러나 나는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을 말려야 했는데.

이유는 저 멀리 빛이 보이는 출구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딴짓 말고 어서 덤벼 오라는 거 같네요.”

레벨 200이 넘는 특수 몬스터에겐 몰래 접근하려야 할 수가 없다.

아마 통로 끝에 위치한 존재도 일찍이 우리의 접근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달려들지 않고 뜸을 들이니 저렇게 불만을 표시하는 거 아니겠는가.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리고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통로 끝을 향했다.

-화아아악!

-휘이이이잉! 히히!

그러자 강한 바람이 전신을 때리고.

그 바람이 우리가 지나온 통로로 빠져나가며 괴기스러운 소음이 울려 퍼지는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드넓기 그지없는 공동의 중심엔 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목을 틀었는데.

[필드 보스 용인족 카르마 / 레벨: 250]

그의 머리 위에 무시할 수 없는 정보가 떠 있었다.

이곳은 던전이 아닌 마경의 필드.

그래서 녀석도 ‘필드 보스’로 정의되었다.

검붉은 동공에 머리 위로는 형광색으로 빛나는 뿔이 치솟아 있고, 등 뒤엔 한 쌍의 검은 날개가 달린 그는 마족보다 더 마족다운 외형을 갖고 있었다.

‘용인이라면 드래곤 슬레이어(아스칼론)가 통하려나?’

용인 카르마는 나인포가 가진 마경 중심지에 대한 정보 중 최고로 꼽히는 몬스터 중 하나다.

최근엔 굳이 이런 도전을 하기보다 무주지의 영주급 몬스터를 처치하는 걸 선호했지만, 이젠 ‘반대한제국 연합’의 영향으로 무주지를 공략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반대한제국 연합 내에 심어 둔 열매가 무르익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그동안은 기존 스타일대로 사냥을 이어 가기로 했다.

‘카르마는 내가 처음으로 도전하는 준드래곤급(레벨 250 이상)의 존재.’

놈에게서 유일 등급 혹은 그 이상이 있을지 모를 등급의 장비를 얻길 기대하며, 나는 익숙하지 않은 양손 장검 드래곤 슬레이어 아스칼론을 꺼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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