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명분 충족 (4)
[어리석은 놈들. 나에 맞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레벨 250의 필드 보스 용인 카르마가 마검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새까만 검을 뽑아 들며 그리 말했다.
나는 그의 대사에 이죽거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보스급들은 대사 짜 주는 사람이 전부 같은 건가? 어째 다들 내뱉는 말이 똑같네.”
이런 내 대사에 높은 지능을 가진 카르마 표정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놈은 금세 감정을 추스르며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디 네놈의 실력이 그 가벼운 입만큼 하찮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놈은 새까만 날개를 크게 펼치며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놈이 비행형 몬스터임을 나인포에게 들어 알고 있다.
우리 파티 역시 전원 비행 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굳이 놈의 전투 방식에 어울려 주며 공중에서 도그파이팅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역구축.”
그래서 나는 한 아이템을 사용했다.
[영역구축 / 팔찌 / 등급: 유일]
-1 세제곱 킬로미터의 공간을 원하는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
-영역구축은 중복 사용할 수 없으며, 영역 주인이 자리를 벗어나도 마력석 10개를 소모해 하루 동안 변형된 영역을 유지할 수 있다.
-구축된 영역 내에 함정 및 방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마력+9
아이템 설명이 유일 등급의 장비치고 지나치게 짧지만, 그 효율성은 이미 동티모르의 아타우루 섬에서 증명이 됐다.
-드드드드드!
내 뜻에 따라 필드 보스가 자리하고 있던 지하 공동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천장이 내려오고, 바닥이 평평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높이가 5미터로 제한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자신감이다.
땅에 발을 붙인 상태에서 검을 나눌 경우 절대 밀리지 않을 거란 내 자신감을 담은 공간.
[허…….]
허공에 떠올랐던 녀석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변해 버린 주변을 바라보았다.
나는 손에 쥔 드래곤 슬레이어 아스칼론 외에 제3의 손에 바리사다를 쥐고, 자율 공격 무기 프라가라흐를 방출했다.
프라가라흐가 염력 스킬에 의해 상시 조종 중인 대검 5자루와 함께 항성 주변을 공전하는 행성처럼 내 주위를 빠르게 회전했다.
마지막으로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것으로 전투 준비를 끝낸 나는 시에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좋아! 시작은 내가 화려하게 장식할게!”
그러자 시에나는 자신의 애병인 신궁 비자야에 빛의 화살을 걸었다.
이어서 그녀는 당황한 보스를 향해 즉시 시위를 놓았고.
나는 쏘아진 그녀의 빛 화살과 함께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그래, 덤벼라!]
전투 개시를 알리는 시에나의 빛의 화살과 함께 내가 달려들자, 용인 카르마가 핏빛 안광을 번뜩이며 바닥에서 2미터 정도 뜬 상태로 새까만 검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시에나의 공격을 검으로 쳐 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
이유는 그 빛의 화살이 놈의 검을 투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가 가진 ‘링 오브 메모리’란 반지 효과다.
유일 등급의 반지인 링 오브 메모리는 한 가지 스킬을 저장해 사용할 수 있어, 그곳에 내 바리사다의 투과 스킬을 담은 것이다.
[큭!]
시에나의 공격은 그대로 놈의 방어구까지 투과하며 어깨를 관통해 버렸다.
원랜 심장을 노리고 날아든 공격이었으나, 레벨이 250인 준드래곤급 몬스터의 신체 능력은 찰나의 순간에도 엄청난 회피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에나의 공격은 한 번 피한다고 끝이 아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녀의 화살엔 유도 스킬이 걸려 있어서 놈을 관통하고도 다시금 방향을 바꿔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2차 공격은 내가 놈의 코앞에 당도한 순간과 딱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놈은 앞과 뒤를 동시에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아니, 앞과 뒤가 끝이 아니다.
-휙! 휙!
놈의 양옆을 사신의 낫을 든 헬레나와 단검을 쥔 다켈프가 바닥에서 솟구치며 덮쳤고, 머리 위론 윌리아의 대인 공격 스킬이 떨어져 내렸다.
더불어 내 자율 공격 무기인 프라가라흐(검)와 시에나의 자율 공격 무기인 브라흐마스트라(화살)가 발밑을 파고들었다.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 같은 공격임에도 우리 파티의 합은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아무리 상대가 준드래곤급 몬스터라 해도 당황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전개.
‘물론, 이걸로 죽진 않겠지.’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이 모든 공격을 타파하긴 힘들고.
이런 식의 공격이 연거푸 이어진다면, 아무리 녀석이라도 단독으로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 * *
“이거 참 대단한 무기군.”
서백호의 손을 잡는 대가로 받은 유일 등급의 5강 무기, 부르트강의 내장 스킬을 사용한 헤르만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유는 평소 힘들여 사냥하던 몬스터가 일격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템빨이란 건가?”
덕분에 평소라면 1분은 넘게 걸렸을 사냥이 1초 만에 끝났다.
아니, 그가 한 마리를 잡는 동안 그의 동료 NPC인 제니스도 한 마리를 해치웠으니, 사냥 속도는 훨씬 빨랐다.
더불어 공격 범위도 큰 만큼 이전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을 몰이 사냥마저 가능할 것 같으니, 레벨업 속도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쯤 되니, 서백호 일행이 어찌 그리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 알 것 같네.”
당연히 전투에서 템빨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뛰어난 실력에 이만한 템빨까지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격차가 벌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헤르만은 어딘가 허탈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쓰게 웃어야 했다.
서백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와의 격차가 체감되었으니 말이다.
“형씨는 뭐 느끼는 거 없나 봐? 시종일관 달관한 표정이네.”
점점 옅어지는 서백호에 대한 대항심.
그러나 이에 비례해 다른 사람에 대한 대항심을 키워 나가는 헤르만이었다.
그 상대는 바로.
[데이비드 카터 / 레벨: 192]
서백호의 중개로 함께 파티를 맺게 된 라이벌인 미국의 데이비드 카터였다.
그 역시 서백호의 장비 지원으로 엄청난 전투력을 뽐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헤르만과 달리 장비에 놀라긴커녕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아니꼽게 여겨지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나는 서백호 씨에게 대항심이 없으니까. 그는 우리를 마계에서 구해 준 존재야. 격차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누가 그걸 몰라?”
합을 맞추고 있지만, 여러모로 데이비드와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헤르만이었다.
그렇게 헤르만과 데이비드, 그리고 그 둘의 파트너인 NPC 동료들이 조금씩 손발을 맞추며 사냥을 이어 갔다.
아직 잘 맞진 않지만, 그럼에도 경험치가 차오르는 속도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그때.
[한국인 서** 님이 레벨 250의 보스 몬스터를 토벌하셨습니다.]
[세계 최초로 레벨 250의 보스 몬스터를 토벌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이 됩니다.]
[모두 한국인 서** 님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 100이 넘는 사람이 흔해진 지금 이런 최초 업적 메시지를 보는 게 매우 힘들어졌다.
그런데 가끔 떠서 메시지 내용을 살피면 어김없이 서**라는 이름이 떠 있다.
“레벨 250의 보스 몬스터라. 이젠 놀랍지도 않네.”
이때부터였다.
헤르만이 서백호에 대한 대항 의식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순간이.
그냥 자기 역할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한 게 말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우리 파티가 레벨 250의 필드 보스인 용인 카르마를 힘겹게 쓰러뜨린 것도 보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후로도 우린 준드래곤급의 몬스터를 5마리나 더 사냥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유일 등급 장비와 특수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유일 등급 장비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는지 점점 구하기 힘들어져 그 가치가 나날이 오르고 있다.
하지만 우린 상관없는 현상이라는 듯, 꾸준히 새로운 장비를 추가해 무기 외 방어구와 액세서리마저 유일 등급으로 교체하고 있다.
이제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반대한제국 세력이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인지 현재 대외적인 국제 정세는 의외로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데이비드에 이어 헤르만도 레벨이 200을 넘겼다고 합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미국과 독일을 오가는 헬레나의 보고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 200은 꽤나 상징적이지. 데이비드가 레벨 200을 달성하고 미국이 어수선해졌던 것처럼 유럽도 장난 아니겠네.”
“네, 오히려 미국보다 유럽의 반응이 더 뜨겁습니다. 데이비드도 그렇고 헤르만도 백호 님의 지시에 따라 충실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는데, 특히 헤르만의 세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유럽 내에서만큼은 완전히 서백호 님과 같은 포지션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좋다.
내가 바라던 그림이 이거다.
누군가는 굳이 평화로운 이 상황을 이어 가면 되지 않냐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지만…….
이 평화는 작은 균열로도 붕괴할 수 있는 모래성과 같은 평화다.
차곡차곡 전쟁 준비를 갖춰 온 반대한제국 연합은 이쪽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일제 공격을 가해 올 게 분명하다.
인간끼리의 대전쟁은 마족의 침공을 우려하고 있는 나로선 바라지 않는 최악의 상황.
때문에 조금이라도 적은 피해로 세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내부 분열의 수를 쓰고 있는 거다.
다행히 헤르만도 데이비드도 충실히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둘 모두 순조롭게 미국과 유럽의 현 체제를 무너뜨릴 터이다.
특히 헤르만은 그 성격상 계기만 있다면 당장 유럽을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수를 써 볼까?”
때문에 자연히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흠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기자 옆에 있던 윌리아와 시에나도 같은 모습으로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
솔직히 시에나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윌리아라면 뭔가 좋은 의견을 낼 법도 하다.
하지만.
“화, 황제 폐하!”
최근 내가 꾸민 음모 몇 개가 잘 먹혀들어서인지 너무 자만을 했던 모양이다.
음모를 꾸밀 수 있는 건 나뿐만 아니건만.
완전히 나를 지칭하는 단어인 황제 폐하란 칭호를 다급히 외치는 강이솔이 중립도시의 왕성 휴게실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던 내게 들이닥쳐 상상치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반란입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 ‘반란’.
덕분에 나는 평소처럼 ‘황제라 부르지 말라니까요’란 대사를 칠 수 없었다.
벙찐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반문했다.
“러시아에서 들고 일어나기라도 한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요?”
“해체되었던 3자 교류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과 일본, 대만의 세력이 윤시아와 클로에 주, 김민희 파티 등 대한제국 내 최상위 파티 8개를 기습했다고 합니다!”
-콰앙!
그리고 이어진 상세 설명에 나는 의자를 쿵 쓰러뜨리며 벌떡 일어나야 했다.
3자 교류회의 중심에 있던 인물은 경상도 킹스맨이라 불리던 남부 패밀리의 리더 김시우다.
설마 전 세계의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던 대만 사태에 반성을 하며 군 생활 중이었던 그가 이 사태를 저지른 걸까?
“모두 무사합니까?”
“일단 지원 병력만 보내 놓고, 바로 달려와 사태가 어찌 되었는 지까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과연 김시우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저질렀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일에 연관된 놈들 모두 편히 죽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