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생태계 파괴자 (1)
레벨 250 이상의 특수(네임드 이상) 몬스터를 보통 준드래곤급 몬스터라 칭한다.
이는 서백호에 의해 널리 퍼진 표현인데, 굳이 이런 분류 방식이 생긴 이유는 모두가 생각하는 최강의 몬스터가 레벨 300의 드래곤이며, 레벨 250은 특수 몬스터의 수준이 확연히 높아지는 구간인지라 그 강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구에선 레벨 250의 특수 몬스터를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겼다.
이 준드래곤급의 몬스터를 토벌할 수 있는 사람은 서백호 일행뿐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 법칙이 오늘부로 깨지고 말았다.
-쿵!
[필드 보스 용인족 이로스 / 레벨: 250]
[축하드립니다. 필드 보스 용인족 이로스를 토벌하였습니다.]
서백호 파티의 도움 없이 지구의 사냥꾼들이 레벨 250의 필드 보스 몬스터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비, 빌어먹을, 죽을 뻔했네. 레벨 240대의 보스 몬스터와 급이 완전히 다르잖아? 겨우 레벨 10 차이인데, 왜 이렇게 센 거야?”
“괜히 그분이 레벨 250 이상의 특수 몬스터들을 준드래곱급이라 칭하는 게 아니지.”
이를 토벌한 인물들은 짧게나마 서백호의 라이벌로 여겨지던 독일인 헤르만과 미국인 데이비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어어, 그래 당신들도 수고 많았어.”
더불어 윤시아 파티, 클로에 주 파티, 제임스 파티, 김민희 파티, 마이어 파티까지 기존 세계 5대 사냥팀이 모두 함께하니, 이번 토벌 건은 사전부터 단단히 준비된 레이드임을 알 수 있었다.
“서백호는 이런 몬스터를 한참 전에 자신의 파티만으로 잡았다는 거잖아?”
준드래곤급 몬스터 토벌에 성공한 건 축하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헤르만은 고난 끝에 승리를 거뒀음에도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뭐, 레벨 차이도 있을 테고, 템 차이도 있을 테니까.”
데이비드는 애써 그런 헤르만을 위로했다.
실제로 서백호 파티가 준드래곤급 몬스터를 처음 잡았을 때보다, 이 자리에 모인 멤버들의 평균 레벨이 낮다.
당시 서백호 파티의 레벨은 220대였고, 현재 이들의 평균 레벨은 200대 초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평균으로 나눴을 때의 이야기다.
데이비드와 헤르만은 레벨 210을 넘겨 당시 서백호 파티와 큰 차이가 있지 않았고, 이번 레이드에 참여한 인원수가 35명에 달하는 것을 생각하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크다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어. 우리가 레벨 250의 준드래곤급 몬스터 잡겠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을 때, 서백호는 만렙에 육박하는 마왕들과 놀고 있으니까.”
“하하.”
헤르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파티원인 NPC 동료 제니스의 어깨에 은근슬쩍 팔을 걸치려 했지만, 고양이와 같은 그녀의 부드러운 무빙에 헛손질을 할 뿐이었다.
그에 머쓱해진 헤르만을 향해 윤시아가 웃는 낯으로 다가와 한마디 했다.
“폐하입니다.”
“뭐?”
“폐하라 부르시라고요.”
헤르만은 처음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서백호를 따르는 광신도 중 하나임을 알게 되면서 말뜻을 이해했다.
윤시아는 헤르만이 서백호의 이름을 막 부르는 걸 거슬려하는 거였다.
“아니, 서백호 본인도 폐하란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데.”
“아무리 그분이 원치 않으셔도 이 세상의 황제이신 건 변치 않는 사실이죠. 그러니 우린 당연히 폐하께 존중을 보여야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핵심 사냥꾼들이 폐하를 존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 권위를 가볍게 여길 테니까요.”
헤르만은 따발총처럼 쏘아 대는 윤시아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코 서백호를 만만히 봐서 호칭 빼고 이름만 부른 게 아닌데, 마치 엄청난 죄악처럼 말하니 말이다.
그녀의 이런 광신도적 태도는 유명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도 서백호를 신처럼 따르는 이가 많은지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았어, 폐하라 부를게.”
“좋습니다.”
호칭이 바뀌자 윤시아는 만족스레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그런 윤시아의 미소에 왜인지 헤르만은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을 이렇게 타박하며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여성은 처음 보았다.
어째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취향이 눈을 뜨는 듯했다.
“오오, 유일 등급 할버드 떴어!”
윤시아에게 혼나느라 메시지를 제대로 확인 못 한 헤르만은 뒤늦게 자신의 인벤토리에 들어와 있는 유일 등급 장비를 발견하고 기분 좋게 외쳤다.
“진짜요?”
“어디 봐요.”
장비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사냥꾼들이 우르르 모여드는 건 당연했다.
“할버드? 하필 매니악한 게 떠 버렸네. 고위 사냥꾼 중에 할버드 쓰는 사람이 있던가?”
“이탈리아인 중에 쓰는 사람을 본 거 같은데.”
“아아, 맞네. 기억난다. 그 녀석 주게?”
“줘야지,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장비 묵히고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하긴.”
유일 등급 장비를 지원받던 입장에서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헤르만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에 만족해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헤르만이 마왕을 만렙에 육박하는 존재들이라 했잖아?”
그런데 지금껏 사색에 잠긴 듯, 잠자코 있던 클로에 주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해 왔다.
“갑자기 그게 왜?”
“당신은 만렙을 레벨 300으로 여기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진짜 그게 만렙 맞을까?”
헤르만은 클로에의 물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마왕과 드래곤 모두 300레벨이 최대잖아. 레벨 300 이상의 존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그럼 당연히 그게 만렙인 거 아니겠어?”
“그건 마계인과 몬스터에 국한된 이야기지, 우리 지구인은 아직 모르는 거 아닐까?”
“그게 무슨?”
“그도 그럴 게, 마계인과 비슷한 포지션임에도 우리 지구인들은 성장에 제약이 없잖아. 그러니 혹시 모르지.”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클로에의 모습에 모두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렴 어때요. 전 레벨 300에 도달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요. 벌써부터 한계인 느낌이라.”
그리고 이어진 김민희의 대사.
한국에서 재능충이라 불리는 김민희와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레벨이 200을 넘은 후로 모두 매일같이 한계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지. 괜히 많은 사람이 힘에 부친다고 성장을 포기하고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아니니까.”
김민희는 물론, 윤시아와 클로에, 심지어 헤르만과 데이비드도 레벨 300까지의 도달을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 머릿속에 예외의 존재가 떠오르고 있으니.
“그런데 폐하께선 한 번도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린 적이 없잖아? 벌써 레벨도 250에 달하시고.”
“하긴 만렙이 300이 아니라면 그분은 거리낌 없이 돌파하실 것 같은 느낌이긴 해.”
그건 바로 서백호였다.
레벨 300이 끝인지 아닌지를 알 길은, 서백호를 통하는 방법뿐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 * *
쉽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레벨 차이도 차이인지라 힘에 부치는 게 당연하고.
하지만 이건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
신화급 무기를 소지한 마왕과의 전투는 순간순간이 위기의 연속이었다.
-콰콰쾅쾅!
“큭!”
단 1초 사이에도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중이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괜히 처음부터 오버했나?’
이쪽의 무기 역시 신화급임이 드러난 순간부터 나를 상대하게 된 마왕 일리야의 눈빛에서 얕잡아 보는 감정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진 전력을 다한 그녀의 공격에 나는 언제 나댔냐는 듯 버벅거려야 했다.
전투는 분명 마왕 일리야가 우위에 있는 상태다.
“이익!”
하지만 그럼에도 일리야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하늘을 뒤덮은 은하수 커튼 사이에서 쏟아지는 빛무리를 쳐 내고 쳐 내다가 실패해 옆구리가 뜯기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거리를 좁히면서 반격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10번의 위기를 겪으면 그녀 역시 적어도 1번, 많으면 3번까지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니 저쪽은 저쪽대로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파앗!
“바퀴벌레 같은 놈!”
“에베베벱. 반사.”
심지어 이쪽엔 최고의 힐러가 함께다.
마력 소모 없이 치유 계열 스킬의 효과를 2배 높여 주는 치유의 헤일로를 착용한 윌리아 덕에 아무리 부상을 입어도 순식간에 회복해 버리니, 마왕 일리야도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마음 같아선 윌리아를 치고 싶겠지만, 나를 상대로 다른 생각을 품을 정도의 여유를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바리사다 상위 호환 장비일 줄이야.’
그래도 내가 불리한 상황인 건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불리함은 마왕 일리야가 가진 신화급 장비에서 비롯되었으니.
마치 두부마냥 공격 한 방에 신체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녀의 공격은 방어구를 무시한다.
내 방어구가 어떠한가, 유일 등급 중에서도 최상급 장비 세트인 데다가 보물 창고를 얻고 넉넉해진 강화 아이템으로 풀강화까지 때린 물건이다.
그런 방어구가 맥없이 뚫린다는 건 그녀의 공격 역시 바리사다와 비슷한 투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의 공격이 바리사다처럼 완전한 투과 효과를 지닌 건 아니란 점과 내 망토 다크매터 덕에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다는 걸까.’
마왕 일리야의 공격은 바리사다의 완전한 투과와 달리, 방어를 무시하고 들어와도 검을 이용해 쳐 내는 게 가능했다.
더불어 내가 가진 망토 다크매터는 투과 스킬에 대한 저항 능력을 갖고 있어서 등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투투투투투퉁!
그럼에도 역시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오로라 속에서 수천 발씩 쏟아지는 투과 공격은 사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만약 내게 검술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크매터와 같은 대항 아이템이 없었다면 반격은커녕 진작에 골로 갔을 거다.
‘젠장! 이런 식으론 끝이 없겠어!’
나는 분명 잘 싸우고 있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임에 변화가 없으니, 이런 식의 전투가 계속된다면 결국 무릎을 꿇는 건 이쪽이 될 게 뻔했다.
고로 상황을 뒤집기 위해선 묘수가 필요하다.
‘아니, 아니야. 묘수는 무슨, 그냥 이대로 버티면 돼. 내 역할은 시간 끌기잖아.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거야.’
전투에선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내 분투 덕에 전쟁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때문에 시간만 끌어도 문제는 없다.
그러니 현상 유지에만 신경 쓰면 되는데…….
‘하지만 나는 마계인이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팬드래건의 공작이란 신분도 허울뿐, 전쟁의 승패보다 개인의 득을 우선시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시간을 끄는 것에 멈추지 말고, 지금은 눈앞의 마왕이 쥔 오브를 빼앗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본능이 외쳤다.
‘아!’
그렇게 승리에 대한 의지를 다시 불태우는 순간.
문뜩 한 가지 좋은 수가 떠올랐다.
“하핫!”
나는 돌연 웃음을 흘려야 했는데.
이런 내 반응에 마왕 일리야가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나한테 이렇게 묶여 있어서야 되겠어? 너희 목적을 잊은 거야?”
그리고 이어진 내 대사에 일리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불길함에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불안함을 읽은 나는 유쾌히 외쳤다.
“하핫 봐라! 우리의 황제께서 네 동료의 목을 자르는 모습을!”
“뭐!?”
마왕 일리야의 임무는 최대한 빠르게 나를 처치하고 황제의 뒤를 노리는 것.
하지만 그녀의 임무가 나란 걸림돌에 의해 지장이 생겼다.
그런 와중에 비웃음 가득한 외침이 이어지니, 일리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어?”
그런데 일리야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팬드래건 제국의 황제에게 압도당하고 있지만, 힘겹게나마 버티고 있는 알피던스 왕국의 마왕이었으니.
“속았지?”
혼신을 다한 내 연기에 그녀가 속아 넘어가면서 두 번째는 없을 빈틈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흠칫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엑스칼리버의 두 번째 스킬인 성화방출이 레이저처럼 뻗어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정돈!”
하지만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개벽 스킬(신화급)을 제외한 엑스칼리버의 내장 스킬들은 극상급이다.
고로 그녀는 방어막을 펼쳐 이를 막아 내려 했다.
“어?”
그러나 레이저처럼 직선으로 뻗어 온 성화방출 스킬은 독을 품고 있었으니.
-푹.
그녀의 방어막과 엑스칼리버의 성화방출 스킬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성화 속에 숨겨져 날아든 바리사다가 그녀의 방어막과 방어구를 관통했고.
이내 심장마저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