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254화 (254/273)

254화 드래곤 (3)

멘탈 터진 드래곤이라니,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뭐, 질릴 만하긴 하다.

애초에 우린 놈과의 전투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우릴 우습게 여긴 놈은 그렇지 않았을 테니까.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장장 30시간이나 투덕댔으니, 드래곤 입장에서 좀 당황스럽겠는가.

[죽여라.]

목을 길게 뺀 채 뻗어 버린 실버 드래곤 안타레스.

그런 안타레스 주변엔 중국 3대 호수 중 하나인 타이호가 펼쳐져 있었는데, 원래의 아름다운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물이 모두 증발해 버린 데다가 크고 작은 크레이터와 거대한 칼로 난도질한 듯한 균열이 처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흉측한 모습에 호수 바닥의 펄과 오물이 더해지니 도무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섬이었던 작은 땅을 밟고 있던 나는 푸른 날개를 펼치며 놈에게 날아가 말을 받았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냐?”

[그게 무슨?]

“내 동료 중엔 시스템의 강제 없이 함께 활동하는 엘더 몬스터가 있거든. 차라리 너도 무슨 말인들 들을 테니, 살려 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내 말에 드래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를 치켜들었다.

살길을 열어 주면 과연 드래곤도 목숨을 구걸할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어질 놈의 말을 기다렸더니.

[그래? 그렇다면 나도 그리하지.]

너무도 쉽게 내 말에 따랐다.

드래곤도 자긍심이나 고귀함 따윈 없었다.

그저 실리를 택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녀석에게 이리 답했다.

“뻥인데.”

[뭐?]

그리고 마치 악당처럼 멍청한 반응을 보이는 드래곤을 한껏 비웃으며 바리사다를 휘둘렀다.

-서걱!

살이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혹시’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았던 드래곤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비열한…….]

“30시간이나 싸워 놓고 용서하겠냐? 그리고 최초 토벌 보너스하고, 업적 보너스를 어떻게 버리겠어.”

애초에 놈은 엘더 이터 헬레나와 달리 관리가 힘들다.

무려 30시간을 싸워야 하는 상대가 배신이라도 하면 어찌 되겠는가.

심지어 팽팽한 전투 상황에서 배신을 한다면?

때문에 위험한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장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는 놈만 질리게 만든 게 아니다.

-촤아악!

-쿠웅!

조롱+꼬장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은 나는 실버 드래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직후 푸른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무기를 거뒀다.

“와, 인성 보소…….”

그런 내 곁으로 동료들이 승리를 만끽하며 다가왔고, 시에나는 악마를 보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힘이 빠진 손을 그녀의 금발 머리 위에 올린 뒤 거칠게 헝클어뜨리고, 뒤이어 내 팔을 받치는 윌리아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윌리아가 온갖 종류의 회복 스킬을 걸어 주었다.

-파파팟!

몸에 활기가 다시 돌자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에 물이 증발한 타이호는 너무 더럽고 악취가 심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그래서 우린 클린 스킬로 몸을 청소한 뒤, 인근의 조용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

덕분에 이동 과정에서 뒤늦게 쑤저우를 비롯한 타이호 인근 도시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마치 유례없는 강진이 덮쳐 모든 게 붕괴된 것 같은 종말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위즈잉에게 최대한 주변에 피해 없게 하겠다고 했는데…… 미안하게 됐네.’

아무래도 우리가 자신의 전투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건 비용으로 돈깨나 깨지게 생겼군.”

“그래도 신화급 장비를 얻게 된다면 이득 아니겠어?”

눈을 반짝이며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짓는 시에나.

나는 그녀의 반응에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신화급 장비는 코인으로는 살 수 없는 게 현실이었으니 말이다.

신화급 장비를 바라는 그녀의 기대가 엇나가면 웃기긴 하겠지만.

혼란한 틈에 무서운 기세로 연달아 떠오른 메시지 속에서 다행히 그녀가 만족할 것 같은 내용이 스쳐 지나간 걸 봤다.

그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이동 속도를 높였고, 시에나도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희희낙락 내 뒤를 따랐다.

* * *

“벌써 30시간 가까이 싸우고 계셔.”

“그분이라면 승리하시겠죠?”

서백호의 드래곤 레이드는 상징성 면에서 세계 최대의 이벤트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

때문에 대한제국의 주요 사냥꾼들은 서백호의 승리를 기원하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전투를 예의 주시했다.

다만 직접 두 눈으로 관전하는 건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몰래 숨어서 감시용 오토마타를 이용해 전투를 지켜봐야 했다.

매 전투의 1분 1초가 마치 애청하던 드라마의 마지막 편 하이라이트를 보는 기분.

장장 30시간이나 진행되는 바람에 집중력이 떨어질 법도 하지만, 서백호의 측근들은 모두 홀린 것처럼 서백호의 전투 영상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저 공격을 피하지 않고 몸을 들이밀며 카운터를 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말도 안 돼! 대체 뭐야 방금 그 공격? 설마 윌리아 님의 공격에 드래곤의 몸이 밀릴 걸 예상하고 미리 빈 공간에 검을 휘두른 건가? 이 정도면 예지 능력을 갖고 계신 수준인데?’

‘맙소사…… 원래대로라면 스쳐 지나갔을 시에나 님의 공격을 검을 휘둘러 경로를 바꿔 유효타로 만들어 내셨어.’

이건 정말 귀한 기회였다.

강자의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레벨 300의 특수 몬스터와 서백호가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 얌전히 지켜만 볼 수 있는 기회는 매우 귀할 수밖에 없었다.

서백호와 그의 파티원들, 그리고 적인 드래곤까지 수준이 높아 눈으로 좇기 힘든 경우가 많았지만, 그중 일부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경악의 연속이었다.

“와, 헛웃음밖에 안 나네. 공격이 창의적인 건 물론, 허투루 흘리는 게 하나도 없어. 보면서 ‘왜 저러지?’라고 의문을 표했던 행동은 바로 복선이 되어 치명타를 만들어 내지. 대체 전투를 하면서 몇 수 앞을 보는 거야?”

헤르만의 당혹감 어린 혼잣말에 모두가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백호가 잘 싸우는 건 당연히 알았지만, 이렇게 전략적이고 똑똑하게 싸울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경외심이 절로 드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무조건 영상으로 저장해서 사냥꾼들에게 자료로 돌려야 합니다.”

“동감이야. 1할도 따라 하기 힘들겠지만, 추구해야 할 전투 방식이 어떤 건지 깨닫게 만들기엔 충분하니까.”

열렬한 서백호 지지자인 윤시아와 클로에 주의 이야기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 드래곤이 날지 못해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루할 틈이 없는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은 머지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그 말은 즉…….”

“마력이 떨어진 건가?”

드디어 전투의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머지않아 서백호와 드래곤 사이에 움직임이 멈췄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리까진 안 들려.”

“상대가 아무리 몬스터라 해도 분투한 드래곤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계시는 거겠죠.”

“맞아, 분명 그럴 거야.”

뒤이어 드래곤과 서백호가 어떤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 나오자, 눈에 제대로 콩깍지가 씐 사람들은 윤시아의 주장에 분명 그럴 거라며 동의했다.

다만 딱 한 사람 헤르만만이 다른 의견을 냈을 뿐이다.

“폐하 성격이 그리 좋은 분이셨나? 꼬장이나 안 부리면 다행이지.”

“뭐라고?”

하지만 그의 의견은 독기 충만한 눈으로 서늘히 바라보는 윤시아와 클로에 주에 의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아, 아니야…….”

머지않아 서백호는 그대로 드래곤의 목을 쳤고, 곧 단체 메시지가 모두의 눈앞에 떠올랐다.

[한국인 서** 님께서 최초로 레벨 300의 특수 몬스터를 토벌했습니다.]

[한국인 서** 님께서 최초로 드래곤을 토벌했습니다.]

[이 위대한 업적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한국인 서** 님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번 달성한 두 개의 업적.

정말 대단하단 말로도 부족한 그들의 리더였다.

* * *

나는 이번 드래곤 레이드로 무려 5종류의 보상을 획득했다.

1. 일반 토벌 보상

2. 최초 토벌 보상

3. 레벨 300 특수 몬스터 토벌 업적 보상

4. 드래곤 토벌 업적 보상

5. 실버 드래곤 안타레스 둥지의 보물

바로 이렇게.

“드래곤 하나를 잡았을 뿐인데, 쏟아지는 보상 보소.”

덕분에 한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단번에 레벨이 3개나 오른 건 둘째 치고, 모든 보상을 정리했을 때 쥐어진 것을 보면 절로 헛웃음이 났다.

우선 드래곤 둥지 한곳 당 30억에서 50억 코인이 잠들어 있었는데, 이걸 합친 것만으로 무려 200억 코인에 달했다.

‘붕괴된 타이호 인근 중국 도시들을 재건하는 데 써도 꽤 남겠는데?’

거기에 장비 수십 개를 +5강으로 만들어 줄 강화 아이템을 획득했으며.

신화 등급에 가려져 그렇지 여전히 좋은 유일 등급의 장비를 무려 18개나 획득했다.

[안타레스 가죽 방어구 5종 1세트]

[액세서리 3종 3개]

[무기 4종 6개]

[방어구 3종 4개]

나는 이미 세트 효과가 있는 유일 등급 방어구를 갖추고 있어서 안타레스 가죽 방어구 세트는 시에나에게 주어졌고, 기존 시에나가 착용하고 있던 건 다켈프와 헬레나에게 재분배되었다.

안타레스 가죽 방어구는 흰색에 가까운 색을 갖고 있었으며, 몸에 착 달라붙는 게 라이더 슈트를 연상시켰다.

그래서 아직 미성숙한 외형의 시에나가 흰색 라이더 슈트를 착용하면 뼈다귀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좋은데?”

“생각보다 어울리네요?”

의외로 잘 어울려서 신기했다.

안타레스 가죽 방어구 세트는 천방지축이지만 외모만큼은 미소녀 그 자체인 시에나에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부여했다.

왠지 신화 속의 발키리가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달까?

물론, 약간 어린 발키리 말이다.

“오오, 윌리아 님!”

그리고 시에나도 시에나인데…….

유일 등급 장비 중에서 윌리아에게 찰떡인 게 나왔다.

드디어 그녀에게 부족했던 하나가 맞춰졌달까?

그건 바로 이것이다.

[대천사의 날개 / 망토 / 등급: 유일]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천사의 고리, 치유의 헤일로와 세트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서포터 전용 순백의 비행 날개가 나온 것이다.

‘머리 위엔 천사의 고리, 등 뒤엔 천사의 날개, 옷은 성녀의 로브.’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에 위의 장비들이 더해지니, 절로 성스러움에 고개가 숙여질 지경이다.

이런 천사가 내 여친이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단검은 다켈프가 보조 무기로 쓰고, 이 반지랑 스카프는 헬레나가 쓰면 되겠다.”

“감사합니다.”

“오, 예뻐라.”

18개의 유일 등급 장비를 최대한 우리 파티 내에서 분배를 해도 몇 개가 남았다.

나머진 윤시아 등, 주요 부하들에게 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하이라이트네.”

유일 등급 장비를 포함해 지금까지 정리한 보상들도 충분히 좋다.

하지만 이제 남은 3개의 보상과 비교하면 분명 급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이렇다.

[안타레스의 심장 / 섭취형 영약 / 등급: 신화]

[현신 / 액티브 스킬북 / 등급: 신화]

[다기능 장거리 공격 지원 모듈 / 특수 장비 / 등급: 신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