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한계 돌파 (1)
마경에 이은 천경의 등장과 그 문을 지키며 잠들어 있는 레벨 320의 거대 마룡.
천경의 문도 그렇지만, 레벨 표기가 잘못된 듯한 이 마룡의 존재는 제로원 황제가 말했던 한계 돌파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무시무시하군요.”
단순히 한계 돌파를 위한 시스템이 주된 유적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곳은 훨씬 복합적인 설정을 담고 있는 곳으로 보였다.
“이리 중요해 보이는 장소를 선뜻 공개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만큼 마계와 지구의 동맹 관계가 공고하단 뜻이며, 자네를 향한 짐의 신뢰가 굳건하단 의미지.”
단순히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보여서 선뜻 공개한 게 아닐까 싶지만, 황제가 저리 무게 잡으며 말하니 그런 것으로 치기로 했다.
나는 마룡과 천경의 문을 향해 더욱 다가갔다.
주변엔 경비를 서고 있는 팬드래건의 병사들이 쉬이 들어가지 못하게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긴 했지만, 감히 지구의 황제와 마계의 황제에게 걸음을 방해하는 존재는 없었다.
“오오.”
가까이에서 보니 마룡의 포스가 상당하다.
전신이 석화되어 굳어 있긴 하지만, 어떤 계기만 있다면 금방 깨어날 것처럼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보였다.
“자네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네?”
“아니, 마룡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잖나.”
역시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눈치가 빠른 황제.
나는 지금 이 순간 잠들어 있는 눈앞의 마룡 오귀스트를 보며 한 가지 아이템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이것이다.
[드래곤 라이더 / 반지 / 등급: 신화]
드래곤을 펫으로 길들일 수 있게 해 주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 말이다.
하필 이 아이템을 얻은 게 지구와 마경, 마계의 드래곤들 씨를 말리고 난 다음인지라 다음 리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 한 마리가 숨어 있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눈앞의 녀석은 내가 지금까지 사냥한 드래곤들과 달리 한계 돌파까지 한 상황이라 레벨도 320에 달하고, 심지어 태초의 마왕이자 마신과 맞싸운 것으로 알려진 매우 특수한 존재로 상징성까지 대단했다.
그래서 마룡 오귀스트를 본 순간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처럼 시선이 꽂힐 수밖에 없었다.
‘내 펫이 될 드래곤은 이놈밖에 없다고.’
하지만 드래곤을 펫으로 만들려면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드래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
즉, 눈앞의 이놈을 깨워서 설득하든 쥐어패든 허락을 받아야 펫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마룡을 깨우면 어떻게 될까요?”
“설마 사냥을 하려고?”
나는 당황하는 제로원 황제를 향해 솔직히 털어 놨다.
내게 드래곤을 길들이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있는데, 눈앞의 마룡을 내 걸로 만들고 싶다고.
당연히 이야기를 모두 들은 황제는 황당하단 반응을 보였다.
“지금 여기서 저 마룡을 깨웠다간 이 유적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겠나?”
“으음…….”
확실히 그의 말대로다.
특별한 지형의 경우 파괴가 돼도 복구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절댓값이 아니니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괜히 내 욕심 때문에 한계 돌파를 위한 중요한 장소를 날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욕심이 나긴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겠네요.”
“부탁하겠네.”
“하하.”
나를 사고뭉치 바라보듯 대하는 제로원 황제의 모습에 나는 뺨을 긁적이며 천경의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높이가 아파트 20층 높이에 버금갈 만큼 거대한 천경의 문 앞에 초라하다고 할 수 있을 작은 재단이 자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저게 뭡니까?”
“마경과 달리 천경은 입장료가 있더군.”
“설마 그 입장료라는 게 드래곤 하트입니까?”
한계 돌파를 위해선 용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사전에 들었다.
나는 이 재단을 본 순간 그 입장료와 한계 돌파의 상관관계를 깨달았다.
“왜 아니겠는가. 드래곤 하트를 재단에 올리면 천경에 입장할 자격이 주어지고, 천경에 입장하는 순간 막혀 있던 레벨 제한이 풀리게 되는 거지.”
그리고 제로원 황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역시나라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동시에 미간을 좁혀야 했는데.
이유는 천경에 입장하는 순간 레벨 제한이 풀린다는 건…….
“설마 이 문 너머엔 레벨 300 이상의 적만 있는 건 아니겠죠?”
추측이 맞다면, 천계의 존재는 모두가 마계와 지구에서 만렙으로 여기는 레벨 300을 돌파한 괴물들뿐이란 의미였다.
“그건 아니네.”
다행히도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어서 제로원 황제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을 꺼내 들었다.
[천경, 천계 도전기.]
그 책의 제목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초대 제로원께서 남기신 자료일세. 이 재단 위에 얹어져 있던 거지.”
“설마, 그거?”
“왜 아니겠나. 그분이 천경과 천계를 탐험하며 얻은 정보가 모두 담겨 있다네.”
지금까지 나는 남들이 개척하지 않은 길을 거닐며 선구자의 역할을 해 왔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을 개척하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
그런데 저 책이 있다면 그런 고생을 크게 덜 수 있을 터이다.
자연히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내 모습에 제로원 황제가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분이 남긴 자료에 의하면 천경에서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준은 마경보다 평균 50레벨 정도 높다고 생각하면 된다더군.”
마경은 중심지에 레벨 250~300대의 준드래곤급 또는 드래곤급의 존재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일반 필드엔 레벨 100~200의 몬스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드래곤급 이상의 일부 특수 몬스터를 제외하곤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필드란 뜻이다.
오히려 사냥을 다니기엔 더없이 좋은.
“천계에 대해서는 뭐라 쓰여 있습니까?”
천경의 수준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나는 다음에 우리가 상대하게 될 적에 대한 정보를 원했다.
바로 천계와 천족에 대해.
그에 황제는 책을 차르륵 넘기고는 답했다.
“천계에 대한 정보는 천경보다 적은 편이네.”
“정보의 양은 상관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기본적인 배경 정보니까.
“천계는 마계와 달리 단일 세력, 단일 종족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건 대충 예상했던 바이다.
시스템을 관리하는 세계라 했으니까.
만약 여러 세력이 있다면 서로 시스템을 차지하겠노라 다투지 않겠는가.
“고작 1만 명 남짓한 인구가 전부인 매우 작은 세계라 하더군.”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턱을 짚어야 했다.
마계보다 수준이 높은 세계인 게 분명한데, 인구가 적다는 뜻은…….
“인구 하나하나가 특별하단 거군요.”
“그렇네. 천계에서 가장 하등민으로 분류되는 일반 천족의 레벨이 301~320, 그들의 관리자인 고위 계층이 321~340, 천계에 군림하는 의회의 지배 계층이 341 이상이라고 하지.”
“허.”
레벨 300 이상이 1만?
엄청난 수치에 절로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물론, 아직 성장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천계의 길목인 천경에 들어서기 위해선 용의 심장을 구해야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난이도가 너무 극악했다.
때문에 적의 규모와 수준을 파악한 순간 든 생각은, 천계와의 전쟁에서 우리가 취하게 될 포지션은 공격이 아닌 수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천계의 정보가 적은 게 당연하겠어. 국민 하나하나가 레벨 301 이상인데, 거길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 심지어 종족도 달라 눈에 띌 텐데.“
그러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이내 감정을 추슬렸다.
이런 내 모습에 제로원 황제의 얼굴에 흥미라는 감정이 피어오른 게 느껴졌다.
“적의 막강함을 확인하고도 벌써 감정을 다잡은 건가?”
“미리 걱정해서 뭐 하겠습니까?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그에 맞는 대비를 할 뿐이죠.”
“그에 맞는 대비라?”
“이쪽이 강해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싱거운 질문을 던지는 제로원 황제를 향해 나는 마찬가지로 싱거운 답을 던졌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결코 싱겁지 않았으니…….
“오히려 적의 숫자가 많지 않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천족을 1만 마리만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당장 천계의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레벨 301~320 사이의 일반 천족은 지금도 때려잡을 자신이 있으니 그리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태도에 제로원 황제는 황당하단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듣고 보니 자네의 말이 맞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금 재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길게 잴 것 없이 바로 용의 심장을 바쳐 천경이란 곳으로 향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하핫! 유쾌한 놈이로구나!]
머리를 망치로 후려치는 듯한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강렬한 웃음소리가 유적 전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그 소름 끼치는 호탕한 웃음에 나와 제로원 황제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고.
곧 석화되어 딱딱히 굳어 있어야 할 거구의 존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레벨 320의 마룡 오귀스트가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니, 쉽게 깨어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며?
그런 놈이 무슨 남들 대화에 이리 자연스럽게 끼고 난리란 말인가.
“폐하!”
“백호 님!”
당연히 마룡이 깨어남에 따라 유적을 지키던 팬드래건 제국의 병사들은 난리가 났다.
윌리아와 시에나가 급히 전투태세를 취하며 나를 보호하려 들고, 제로원 황제 앞엔 레벨 280의 비밀 호위 넷이 바닥에서 튀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이 상황 속에서.
“진정들 하시죠.”
나는 당황하긴커녕 한껏 긴장한 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붉게 빛이 나는 마룡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마룡을 향해 나는 말했다.
“너 내 동료가 되라.”
[…….]
유행이 지난 대사.
제로원 황제는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 두 눈을 껌뻑이고.
윌리아와 시에나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친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놈을 보며 진작에 이상함을 깨달았었기 때문이다.
“레벨이 300을 넘었다는 건 마계에서 천경으로 건너간 경험이 있단 뜻 아니면, 애초에 천경에서 마계로 넘어온 존재란 뜻이잖아? 아니야?”
[호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몬스터가 혼자 다른 세계를 오고 가는 건 말이 안 되지. 시스템이 이를 용납하겠어?”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마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룡 오귀스트는 최초의 마왕이자 최후의 마신이라 불리는 제로원과 전투를 벌였다지. 그런 놈이 이렇게 살아 있는 데다가 한계까지 돌파했다면 답은 하나 아니야? 너 결국 그의 동료가 되었던 거잖아.”
-움찔.
정곡인 모양이다.
이런 내 말에 현 제로원 황제가 놀란 얼굴로 마룡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룡 오귀스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다시 제안했다.
“그러니, 이번엔 나의 동료가 되도록 해. 나와 함께 천경과 천계를 탐색하고, 천족 처치하자.”
유적 내부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린다.
하지만 마룡은 입을 닫은 채 가만히 나를 내려만 보았고, 덕분에 짙은 정적이 유적에 내려앉았다.
머지않아 마룡이 정적을 깼다.
[크크크큭! 하하하핫!]
미친놈이라 마룡인가?
놈은 대뜸 광소를 터뜨렸고, 나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싫다면?]
뭐, 예상 밖에 있는 대사는 아니었다.
지금껏 상대한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던 드래곤들도 죽을 정도로 맞으니 다들 목숨을 구걸하더라.
“죽도록 패서 길들여야지.”
나는 그런 놈을 향해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