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269화 (269/273)

269화 인도자 (2)

지금은 단일 세력으로 통일되었지만, 여러 나라가 난립해 있던 지구, 마계와 달리 천계는 처음부터 강한 권력을 쥔 의회 아래 하나의 정권만이 존재했다.

물론, 천족은 인구수가 1만밖에 되는 만큼, 나라가 분할돼 있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지구와 마계가 공통의 적을 상대하려 세력을 일통했다면, 천계는 오로지 효율 하나만 놓고 단일화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효율을 중시하는 단일 국가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하나의 폐해가 발생했는데, 그건 바로 체제를 위협하는 개성의 배제와 강력한 통제였다.

개인보단 국가가, 감정보단 사회의 이념이 우선시 되는 세상.

지구에서 흔히 말하는 디스토피아의 색채를 가진 곳이 천계라 할 수 있었다.

[7,201번부터 7,350번까지의 국민에게 배당된 금일 활동은 식량 생산 공장의 반복 근로 업무입니다.]

[4,501번부터 4,550번까지의 국민에게 배당된 금일 활동은 전력 생산을 위한 정령석 수집 업무입니다.]

천족들도 각자 이름이 있긴 하지만, 사회에선 번호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하루의 활동마저 의회에서 하달한 명령에 따라 정해졌다.

자유 따윈 없고 오로지 의회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톱니바퀴와 다름이 없는 존재가 천족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족 사이에도 자율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뭐, 뭐야. 저 괴물은?”

“…….”

“몇이나 놈들에게 당한 거지?”

“대략 3할 정도?”

그들은 바로 천계를 관리하는 지배 계층이자.

의회를 운영하는 최고위 천족 20인이었다.

천계의 중심 중 최중심부라 할 수 있는 센트럴 카운실의 대회의장.

족히 300평은 될법한 넓은 실내 공간에 덩그러니 20개의 테이블이 둘려 있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20개의 테이블과 그 주변 공간은 각 의원의 취향에 따른 맞춤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한 여성 의원은 자신의 공간을 핑크색으로 물들인 데다가 천계의 다양한 동물을 본뜬 인형으로 가득 채워 놓았고.

금주의 세상에서 애주를 즐기는 배덕의 남성 의원은 테이블을 완전히 바(BAR)로 만들어 놓는 등, 각양각색의 테이블들이 다양한 구역을 만들었다.

개성이 배제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개성 넘치는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천경에 저런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더불어 의회에 소속된 최고위 천족들은 어딘가 불쾌함이 느껴지는 다른 천족들과 외모부터 달랐다.

얼굴이 부자연스럽고, 불쾌한 골짜기를 갖고 있는 로봇처럼 느껴지는 일반 천족들과 달리 하나같이 아름답고 완벽한 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져 있었다.

“천경의 존재가 아닐 수도 있지.”

“뭐? 그렇다면?”

천계의 의원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는 바로 대회의장 중심에서 송출되고 있는 영상 때문이었다.

그 영상은 일련의 무리가 이들에게도 익숙한 천족의 병사들을 학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영상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의원들조차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아마 우리의 적수가 될 세계의 존재 아니겠어?”

“웃기지 마! 그 두 세계의 코스트를 전부 합쳐도 우리의 5할 정도였다고!”

분홍색으로 도배된 구역을 차지하고 있던 여성 의원이 술을 마시며 자신의 말을 받아친 남성 의원을 향해 버럭 외쳤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허공에 손을 뻗었는데.

그 여성 의원이 가리킨 방향엔 커다란 수정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과 함께 수정구 정면에 하나의 메시지창이 떠올랐고,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계의 정보를 표기합니다.]

-천계: 97(한계 코스트: 100)

-중간계: 19(한계 코스트: 50)

-마계: 37(한계 코스트: 70)

“보라고! 시스템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

그 수정구가 바로 세상의 근원이자 정수인 ‘시스템’이었다.

그녀를 비롯한 천계의 의원들은 시스템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는 없어도 일부 간섭을 하고 정보를 찾아보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정보를 찾아보면 천계만 표기되던 것에 느닷없이 중간계와 마계가 추가되었다.

덕분에 이들은 두 세계의 존재를 천계 침입 전에 눈치챌 수 있던 것이다.

“코스트는 세계의 강함을 표기하는 절댓값이 아니야.”

“하, 하지만…….”

각각의 세계엔 정해진 코스트라는 게 있는데, 그 코스트에 맞춰 성장 한계를 정할 수 있다.

천계의 인구가 적은 이유도 바로 코스트 때문이다.

그들은 적은 인구수를 유지하는 대신 인구 1명당 높은 코스트를 배정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결과 천족 하나하나가 매우 높은 레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막말로 중간계란 곳의 코스트가 겨우 19밖에 안 돼도 그걸 겨우 몇 놈이 몰빵으로 갖고 있다면 저런 무력도 가능하지 않겠어?”

심한 비약.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 지금껏 잠자코 있던 다른 의원들이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만큼 저 존재가 특별하단 거지.”

그리고 최고위 천족들의 이러한 반응은…….

영상 속의 적이 느닷없이 공격 루트를 바꾸면서 더욱 극적으로 변했다.

“어어?”

“아, 안 돼!”

“제길! 제노비스가 당했어! 도주할 틈도 없이!”

그들과 같은 의원이자 최고위 천족으로, 천경 탐색팀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레벨 350의 제노비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병력을 물려야 해!”

결국, 이들은 자랑스러운 천계 병사들의 추태를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병력의 후퇴를 거론했다.

모든 의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시선을 받은 사람은 시스템 바로 아래에 자리한 남성이었으니.

[천계 의장 헤르시안 / 레벨: 365]

그는 레벨 341~350이 대부분인 의회 멤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360을 넘긴 천계 의회의 의장 헤르시안이었다.

꽃미남이란 표현이 절로 어울릴 헤르시안은 영상 속 인물들, 그중에서도 특히 검을 휘두르는 남성을 주의 깊게 살피던 중이었다.

“솔직히 이곳 모두가 나서면 놈들을 쓰러뜨리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영상 속 존재와 싸우게 된다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헤르시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세계의 정점에 선 존재.

상대에게 무슨 수가 있을지 알 수 없는데 무작정 몸을 들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영상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놈들이 더 있다면?”

“어후, 최악이겠는데?”

“어쩔 수 없지. 탐색팀을 물리도록 해. 적들의 정보가 적은 만큼, 더욱 시간과 공을 들여서 정예 원정 부대를 만들어야겠어.”

결국, 천계는 천경에서 마주한 극강의 존재에 밀려 병력을 물리기로 했다.

이는 상식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지만.

분명한 실책이었다.

천계는 더 큰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영상 속의 존재를 죽였어야 했다.

그에게 시간을 줘서 좋을 게 없고, 또 그를 죽이기만 하면 나머지 두 세계를 상대하는 게 월등히 쉬워지니 말이다.

* * *

“도망간다.”

사방이 피로 가득한 세상.

그 한가운데 오연히 서서 적들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놈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더니, 이내 완전히 등을 돌려 후퇴하는 것을 보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죽을 생각으로 덤벼든 건 아니지만, 자칫 삐끗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던 상황이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겨 냈고, 끝내 놈들을 물리는 데 성공했다.

“수고하셨어요.”

그런 나를 향해 윌리아가 다가와 팔짱을 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하늘 위에 떠 있는 눈 때문에 약한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릴 감시하는 아이템이겠지.’

예전이라면 감시 장비부터 파괴했겠지만, 이번엔 일부러 내 무력을 과시하듯 보여 주었다.

네놈들이 상대하게 될 세계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리고 이런 엄포는 제대로 통했는지, 천계의 탐색팀은 소수의 공격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의회 소속의 사령관까지 잃고 말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다음엔 더욱 공을 들여 준비한 전력으로 덤벼 올 거다.’

즉, 다음 공격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단 뜻이기도 하다.

-서걱!

나는 감시의 눈을 더 이상 남겨 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베어 없애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동료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휘이잉!

강렬했던 전투의 여파 때문에 어디선가 정체 모를 바람이 불어왔지만, 나는 비릿한 혈향이 조금이라도 가시는 것을 보며 만족해야 했다.

“저걸 언제 정리하지?”

“하하, 그러게요.”

천족의 시신은 몬스터와 달리 NPC 취급인지라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시신들은 각각의 장비와 재산을 지닌 만큼 직접 우리가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크게 불만은 없었다.

이유는 저 시신 하나하나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고위 천족 중에는 신화급으로 보이는 장비를 갖고 있는 놈도 있던데?”

“아아, 맞아요. 저도 몇 번 봤던 것 같네요.”

고위급 천족만 해도 신화급 장비를 소유한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우린 최고위 천족이었던 사령관까지 잡았다.

즉,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란 뜻이다.

‘물질적 보상뿐만 아니라, 경험치도 엄청 쏠쏠하겠지.’

덕분에 우린 아주 잠깐의 휴식 후, 보상 타임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웃는 낯으로.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기쁨 때문일까?

아무리 종족이 다르고 적이라지만, 시신으로 가득한 공간을 보고 웃다니, 이젠 나도 정상인은 아닌 것 같다.

“오오! 백호야! 여기 봐 봐! 신화급 장비 나왔다!”

“뭔데요?”

“백호 님 여기에도 있어요!”

“오오!”

그렇게 나는 전설로도 남을 비슷한 레벨의 적들을 상대로 한 1000:1 전투에서 승리했다.

* * *

서백호가 천경에서 천계의 군대와 홀로 싸워 병력을 물리게 만든 사건은 빠르게 알려졌다.

18:1도 아니고 무려 1000:1의 전투.

누군 허풍이 아니냐며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으나, 어느 날 서백호가 천 단위의 유일 등급 장비를 대한제국 소속 사냥꾼들에게 뿌리게 되면서 이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실 생각이지?”

“그분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레벨을 올리고 있는데, 도저히 닿지가 않아.”

덕분에 대한제국의 주요 사냥꾼들은 서백호의 활약에 기쁨을 표하면서도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이대로 세계의 운명을 한 사람에게 맡기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당장은 없었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은 몬스터를 처치하고 레벨을 올리는 수밖에.

다행히도 서백호의 활약 덕분에 천계의 혹시 모를 침공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 황금 같은 시간을 허투루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

서백호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부하 모두가 성장에 박차를 가했고, 이런 지구의 모습에 제대로 자극을 받은 제로원 황제도 열심히 부하를 굴렸다.

“천계가 조용하네? 이대로 안 쳐들어오는 거 아냐?”

“그럼 더할 나위 없지.”

그런데 천계의 공격에 대비하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던 이들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또 세 달이 지나도록 천계가 얌전하자 의문을 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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