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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270화 (270/273)

270화 인도자 (3)

겨우 1~2초 차이의 타이밍으로 게임의 승패가 갈리기도 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일에는 적절한 타이밍이란 게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신중한 천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누가 봐도 이런 타이밍을 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신중할 수밖에 없단 건 잘 알고 있어.’

천계는 자신들의 적이 있다는 것은 파악했지만, 상대의 수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나와 같은 존재가 더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보다 강한 존재가 지구나 마계에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할 것이다.

이는 그들의 조치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탐색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천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두 가지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천계 내부에 정치적인 문제가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을 만큼 확실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이왕이면 첫 번째 상황이면 좋겠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이 박힌 리더가 있다면 시간을 끌어 좋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터이다.

때문에 확실하진 않아도 두 번째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린 이에 대한 대비를 했다.

예를 들면, 천경의 방어 라인이 뚫려서 놈들이 지구나 마계에 쳐들어오게 된다면 방어전은 의미가 없다.

천족들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의 사냥꾼이 아직 충분치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되는 게 쪽수의 법칙이지만…….’

그랬다간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될 테니, 아예 놈들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게릴라전을 진행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선 시민들이 안전하게 숨어 있을 공간이 필요한데, 지하와 산 중에 방어 시설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시스템이 만든 이상 지형을 철저히 이용하기로 했다.

이상 지형 중엔 외부로 드러나지 않지만 숨겨 있는 공간이 매우 큰 곳들이 있다.

성장의 탑이라던가, 시에나를 처음 만났던 평택의 엘프 마을이라던가.

이런 공간은 각국에 고루 퍼져 있다.

그렇게 시민들을 피난시킨 후 천족들을 각개 격파 하는 게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보였다.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천족은 쪽수가 그리 많은 종족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오오, 이곳이 천경.”

“폐하께선 벌써 6개월 전에 입장을 하신 곳인데, 우린 이제야 왔네.”

“그것도 용의 심장까지 지원받아서 말이야.”

더구나 나 이외의 사냥꾼들이 놀고 있었다는 건 아니니.

데이비드와 헤르만, 윤시아와 클로에 주, 김민희 등의 황성 소속 주요 사냥꾼들이 이끄는 6개 파티, 32명이 천경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최도겸, 김현수, 무당파 진후에이 등 2진 멤버들이 그들의 뒤를 바짝 쫓고 있어서, 많진 않아도 일반 천족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갖춰졌다.

‘이게 모두 앞선 천족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유일 등급 장비를 대량으로 얻은 덕이기도 하지.’

6개 파티 32명을 천경에 입장시키느라 지구와 마계, 마경과 천경을 돌아다니며 얼마나 많은 드래곤을 처치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천경에 입장시킬 인원은 지구뿐만 아니라 마계에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열심히 뛰어다닌 만큼 지구도 제법 괜찮은 전력이 만들어졌다.

‘이젠 내가 없어도 지구가 마계에 밀리지 않는 수준이 되었어.’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나 역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한 상황이다.

[상태창]

-레벨: 330

-칭호: 신격을 갖춘 자

-능력치

근력: 705(+165)

순발력: 705(+170)

마력: 701(+208)

신력: 2,850

3개월 만에 레벨 12를 더 올려 330을 달성했고, 신력도 꾸준히 올라 3천을 목전에 두고 있다.

“황제 폐하셔!”

-우와아아아!

-폐하!

그리고 당연히 신력이 크게 상승한 만큼, 지구 내에선 내 인기는 하나의 종교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 다름없다는 게 아니라 진짜 종교라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백호 황제 폐하는 인류의 수호자이자 인도자!]

[폐하를 불신하는 자는 악이요, 인류의 배신자이다!]

지구 곳곳에 내 동상이 세워지고 있단 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한 달 전에 참석한 대회의에선 내가 등장하자 전체 시민 중 3할 정도가 아예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심지어 오글거리다 못해 무섭기까지도 한 팻말이 여기저기 걸려있으니, 증가하는 신력 수치가 장식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황제란 칭호를 어색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황제란 호칭이 완전히 입에 붙어 당연한 게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내 분투에 대해 알아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거 괜찮은 건가 모르겠다.

‘에이, 몰라. 신력 수치는 전투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일단은 생존이 우선이란 판단 때문에 과한 믿음을 보이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기로 했다.

아무튼 이렇게 나 자신의 파워업까지 이룬 상태이니, 천계의 공격에 대한 대비는 나름대로 잘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폐하!]

정작 문제는 놈들이 언제 움직이냐는 것인데…….

[남극에서 천경의 문을 발견했습니다!]

나름대로 천경을 장악하고 있다고 자신하던 내 생각을 깨부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문의 상태가 뭔가 이상합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합니다!]

마계에 이어 지구에도 천경과 연결된 문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도 천경의 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예상했던바.

장소가 장소인지라 발견이 늦어진 게 흠이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점은 그 문을 늦게 발견했다는 사실보다, 어째 상태가 이상하단 것이었다.

[폐, 폐하! 천, 천경의 문이 부서졌다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그리고 머지않아 보고를 이어 가던 강이솔이 최악의 소식을 전해 오니…….

[으악! 부서진 천경의 문 너머에서 대규모의 천족 부대가!]

“전 세계에 대피령 내려요! 당장!”

[아, 알겠습니다.]

천경에서 천족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아채면 나름 여유롭게 대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단순한 바람으로 끝이 나며, 지구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이야.’

상황은 납득이 되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천족들을 때려잡는 것 말이다.

“가죠.”

천경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우리 파티는 귀환 스크롤을 찢었다.

* * *

천족이 침입한 장소가 남극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놈들이 정비 시간을 갖추고, 이동하는 동안 시민들의 대피가 이뤄졌다.

물론, 인원이 인원인 만큼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동안 꾸준히 대피 훈련을 진행해 온 덕에 시민들의 행동은 꽤나 신속했다.

비록 힘들게 가꿔 놓은 삶의 터전을 버려 두고 숨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아남는 게 우선인걸.

덕분에 전격으로 전 세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천족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빈 삶의 터와 몬스터들뿐.

그럼 놈들은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아, 우리가 이 새끼들을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라고.

천족들 기준에선 지구의 몬스터 수준도 생활 수준도 보잘것없게 느껴질 것이다.

비록 천족이 감정 표현이 적은 종족이긴 해도, 의회 소속인 지배 계층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마 놈들이라면 화를 낼지도?

* * *

“고작 이런 찌질한 세계 상대하겠다고 우리가 그간 이렇게 공을 들인 거야?”

“신중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돼. 지난번에 영상으로 보았던 그놈이 이 세계 사람인 것 같으니.”

“하아, 정말 그 자식이 중간계의 코스트를 몰빵으로 받은 놈이었나?”

“중간계는 천계의 시스템식 표현이고 이 세계 사람들은 이곳을 지구나 부르나 봐.”

[천계 의원 아카디안 / 레벨: 345]

[천계 의원 제르미나 / 레벨: 350]

금주의 세계인 천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애주가 아카디안과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제르미나.

두 의원은 완전히 폐허가 된 시드니의 구도심을 거닐었다.

그런 두 사람의 주변으론 레벨 321~330의 고위 천족 수십 명이 경호원처럼 둘러서 있었다.

“저게 뭐지?”

“그러게. 건물이 쓸데없이 크네?”

그런 두 사람은 머지않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몬스터 구역 한가운데 자리한 백화점을 발견했다.

호주의 경우 대재앙 초반 워낙 큰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해 주민들은 이웃 도시인 뉴캐슬로 이주해 모여 살고 있었다.

때문에 시드니의 백화점은 아직도 제법 상품이 남아 있었다.

다양한 의류와 지하의 식품 매장엔 주류도 있어서 두 천족 의원의 취향이 정확하게 관통당했다.

“와…… 내가 천계에서 먹던 술은 쓰레기였네. 여기 술 장난 아닌데?”

“이 옷 봐 봐,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개성이 절제되고 감정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 천계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다양한 특별함을 담은 물건들.

특히나 기계와 전자 공학이 주를 이루던 이전 지구의 공산품은 이들 기준에서 봐도 절대 조악하지 않았다.

“이거, 이 세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동감이야. 크흐.”

무표정한 주변의 경호원들과 대비되게 두 사람은 지구행을 꽤나 즐겼다.

하지만 이렇게 웃으며 지구의 것을 만끽하다가도…….

“의원님. 이곳에서 동북 방향 15km 지점에 이 세상의 주민들이 다수 숨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병사들 보내서 몰살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는 거 잊지 마.”

“네, 알겠습니다.”

숨어 있는 인간을 발견했단 소식을 전해 받으면 가차 없이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그런 이중적인 태도가 과연 천계의 지배 계층이라 할 만했지만…….

누군가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살판났군.”

두 의원의 바로 뒤.

언제 나타난 건지 고위 천족들의 경호 라인을 뚫고 들어온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그에 시드니 백화점에 자리를 깔고 패션쇼와 술판을 벌이고 있는 두 의원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치고.

“너는?”

이내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여성 의원 제르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예고 없이 난입해 온 존재는 천족들이 가장 경계하는 탐색 부대의 학살자, 서백호였다.

[서백호 / 레벨: 330]

그의 레벨은 자신들보다 낮았지만, 의원들은 방심할 수 없었다.

이미 놈은 레벨 318이던 시절에도 압도적인 무위로 자신들의 동료 의원을 죽인 전적이 있었으니까.

서백호가 사신과도 같은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의원은 너희 둘뿐이냐?”

그에 제르미나는 자신의 무기인 지팡이를 꺼내 들고, 술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의원 아카디안은 레이피어를 꺼내 들었다.

“주변에 있는 고위 천족들은 보이지 않나 봐?”

서백호의 물음에 제르미나가 턱을 치켜들며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서백호는 변함없이 서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촤아악!

-커억!

-큭!

두 의원을 지원하기 위해 사방을 에워싸듯 포위망을 좁혀오던 고위 천족 수십 명에게 이변이 발생했다.

그들이 일시에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

무슨 공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고위 천족 수십을 해치운 서백호의 무위에 두 사람은 경악했다.

분명 그는 강한 존재였으나, 일전에 보았을 때와 또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서백호가 공포스레 한발 다가오며 말했다.

“뭔가 숨겨 놓은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한번 꺼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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