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신세계 (1)
“뭔가 숨겨 놓은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한번 꺼내 봐.”
거만하기 그지없는 서백호의 대사.
그에 지구를 침략한 천족의 대표인 두 의원, 제르미나와 아카디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천족은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 대해 파악을 끝내 놓은 상태.
결과 저자가 지구 수준에 맞지 않는 돌연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서백호를 쓰러뜨린다면 지구 침공의 큰 방해물이 없어진단 의미다.
“뭐, 뭔가 이상하네? 분명 침략자는 이쪽인데, 왜 우리가 겁박당하는 느낌이지?”
“그러게…….”
두 의원은 애써 웃어 보이며 여유를 표하려 했지만, 서백호가 검으로 자신들을 겨누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방어 태세를 취하며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검 끝이 겨눠진 것만으로도 본능이 도망치라고 경고를 보내왔다.
두 의원은 무기를 맞대고 싸워선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쪽의 숨겨 놓은 수가 궁금하다고 했나? 그래, 그토록 바란다면 보여 주도록 하마.”
그리고 제르미나와 아카디안은 합장과 동시에 천족의 특징인 하얀 날개를 넓게 펼쳤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의 등 뒤에 이변이 발생했다.
마치 블랙홀의 생성 과정을 보는 것처럼 작은 스파크에서 시작한 검은 구멍이 점차 영역을 넓혀 갔기 때문이다.
이내 그 구멍은 지름 30미터 정도까지 확장을 거듭하다가 크기가 고정되었다.
마치 무저갱과 연결된 듯 새까맣게 일렁이는 구멍.
그러나 이내 구멍에 금빛 마법진이 그려지며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진 공간이 나왔다.
비로소 서백호는 그 구멍의 용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공간 연결?”
공간이동이 아닌, 공간 연결.
실시간으로 다른 장소 두 곳을 하나의 문으로 연결한 것이다.
일반적인 공간이동과 급이 다른 훨씬 고차원적인 스킬이었다.
“하하! 이제 알아채도 소용없다! 이 머저리 자식!”
“거만하게 굴더니 꼴좋구나!”
그리고 그 문 너머엔 수많은 천계의 병사들과 함께 9명의 의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상대해야 할 적의 규모가 의원 단 2명에서 의원 11명에 천족 병사 2천으로 바뀌어 버린 상황.
단 한 번의 방심이 위기로 이어졌다.
“어쩐지 전력을 쏟을 거란 예상과 달리, 외부 활동 중인 천계 의원의 수가 적다 했어. 나머지 절반을 대기 병력으로 숨겨 두었던 거구나?”
현재 지구 내에서 활동 중인 의원 모두가 이 수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들 존재 자체가 함정이란 의미다.
즉, 그들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닌 게 서백호와 같은 규격 외 전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이었단 뜻이다.
덕분에 서백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은 제르미나와 아카디안을 만족케 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한 번에 날리기 쉽게 예쁘게 모아 놨네.”
“뭐?”
언제 당황했냐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서백호의 얼굴에서 악귀와 같은 사악함이 읽혔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제르미나와 아카디안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두 천족의 뒤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지며 지원군들이 문을 통과하고자 전진을 시작했다.
“현신, 폭주, 사고 가속, 몰아일체.”
곧 게이트에 천계의 병력이 몰리기 시작했고, 서백호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주문을 외듯 연거푸 스킬을 사용했다.
처음은 자신을 강화하는 버프 스킬들이 이어졌으며.
“언령 위력 증폭, 언령 이동 방해.”
뒤이어 강력한 한 방을 위한 양념이 준비되자 제르미나와 아카디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빌어먹을 피해!”
“강력한 공격 날아올 거다! 막아!”
누군 막으라 하고 누군 피하라 한다.
어긋난 지시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
이유는 어떤 지시를 내리건 소용없는 짓이었으니 말이다.
“중력 붕괴(테라의 반지), 개벽(엑스칼리버).”
이어진 공격은 대응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었다.
* * *
땅 속성 정령왕의 힘이 깃든 테라의 반지 내장 스킬인 ‘중력 붕괴’는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여 압축시키는 신화급 스킬이다.
그런데 이 중력 붕괴 스킬이 엑스칼리버의 ‘개벽’ 스킬과 참으로 상성이 좋다.
개벽 스킬은 위력이 매우 강력한 데다가 공격 범위까지 넓은 광역 스킬인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공격 특성 때문에, 민첩한 상대에겐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 개벽에 중력 붕괴 스킬이 더해지게 되면, 적중률은 무섭게 올라가 버린다.
아무리 강한 상대여도 중력 붕괴 스킬에서 즉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더불어 언령으로 중력 붕괴 스킬을 강화하고, 또 언령으로 이동 방해 효과마저 추가로 더하게 되면…….
대부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개벽 스킬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콰콰콰콰콰콰쾅!
현신 스킬로 1분간 마력 소모가 없어진, 나는 개벽 스킬을 쓰고 또 썼다.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개벽 스킬의 난사.
더구나 사전에 받은 윌리아와 시에나의 버프에, 현신, 폭주, 언령으로 공격력이 강화된 덕분에 시드니 일대는 연거푸 핵폭발이 발생한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주변의 모든 건물이 붕괴되고, 대지는 요동쳤으며, 대기가 찢겨 벼락과 폭풍을 만들어 냈다.
-쿠쿠쿵!
-드드드드드!
추후 알게 된 사실인데, 이때 행한 공격으로 인해 호주 대륙 전체가 흔들렸으며, 시드니를 기점으로 발생한 지진은 4,900km 떨어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서조차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좋네.”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던 공격을 마음 놓고 쏟아 낸 나는 더없이 상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폭주 스킬의 효과가 끝나면서 디버프가 걸려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나는 미리 준비해둔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 초기화권’을 사용했다.
이 스크롤을 이용하면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은 물론, 폭주 스킬로 인해 생긴 디버프 효과까지 말끔하게 초기화가 되기 때문에 나는 즉시 원래의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 하하…….”
제르미나와 아카디안이 만든 문에서 황급히 도망 나온 존재.
[천계 의장 헤르시안 / 레벨: 365]
천계 의장 헤르시안이 헛웃음을 흘리다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무시무시한 개벽 스킬의 폭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는데, 문제는 그와 의원 넷을 제외한 지원 병력 모두가 일시에 증발해 버렸다는 것이다.
무려 천계의 전력 2할의 병력과 의원 다섯이 말이다.
개벽 난사는 예상만큼이나 강력했다.
나를 치겠다고 파놓은 함정이 도리어 자신들의 무덤이 되어 버린 셈.
‘개벽 스킬만 있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쇼였어.’
중력 붕괴와 언령, 현신 등, 모든 스킬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만들어 낸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당연한 걸 해냈다는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전투에선 기세 싸움도 중요하니까.
이내 심검 12자루를 만든 나는 언령을 사용했다.
“언령, 마력 폭주.”
신력의 수치가 높아지면서 내 언령은 할 수 있는 게 더욱 많아졌다.
그중 마력 폭주는 대기 중에 흩어진 마력을 날뛰게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효과는 간단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간이동을 못 하게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레벨에게 없어선 안 되는 기본 능력인 기감을 헝클어뜨려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콰아앙!
곧 마력 폭주의 효과로 놈들이 열었던 두 공간을 연결한 문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이내 닫혀 버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기감에 살아남은 천계 의원들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깃들었다.
“이런 미친.”
마력 폭주는 나에게도 페널티라 할 수 있는 사용법이다.
하지만 저쪽 놈들과 달리, 수차례 훈련을 거듭해 온 방법이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임은 분명했다.
아마 이쯤 되면 놈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게 깃든 필살의 의지를.
이미 기세가 넘어온 상태에서 이런 모습마저 보이니, 살아남은 천계 의원 여섯의 동공이 쉼 없이 요동쳤다.
뿐만 아니다.
-휘이이이익!
-키에에엑!
윌리아와 시에나, 오귀스트, 헬레나, 다켈프 등.
다른 지역에 파견 나가 있던 동료들이 지원을 위해 빠르게 달려와 내게 합류하니, 숫자마저 밀리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살아남은 천계 의원들의 반응도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에 의해 천계가 흔들리다니, 꼴이 말이 아니군.”
내 입장에선 천계가 소수 정예를 우선시한 세계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더 많은 쪽수로 광범위하게 지구를 덮쳐 왔다면 감당이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아무리 강해도 혼자만의 힘으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휴전을 제안하면 받아 줄 텐가?”
나는 레벨 365의 천계 의장 헤르시안의 제안을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쳤냐?”
그에 놈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기습적으로 눈부신 백광을 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불쾌한 골짜기 없이 왕자님과 같은 외모의 남성이 백광을 뿌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주인공의 자태 그 자체였다.
심지어 놈은 특수 체질인지 다른 의원들과 다르게 앞선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때문에 놈의 검은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랐지만.
“의장이면 네가 제일 강한 거 맞지?”
“…….”
아쉽게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빠르게 현신과 사고 가속, 몰아일체를 사용하여 신체를 강화한 나는 너무도 쉽게 엑스칼리버로 놈의 공격을 흘렸고, 곧 심검 12자루를 소환하여 투과 공격 12연격을 날렸다.
헤르시안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내 공격에 대비해 전신에서 뿜고 있던 백광을 더욱 강화했다.
-서걱.
놀랍게도 헤르시안이 내뿜는 빛은 심검 12연격을 밀어내는 기적을 보여 줬다.
투과 공격이 이렇게 막혀 보긴 처음이지만…….
-툭.
“어?”
내겐 심검 외에도 투과 공격 수단이 또 있었다.
헤르시안의 시선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심검과 내게 빼앗겨 있는 틈을 타 땅속을 투과하여 솟구친 제3의 손의 바리사다가 그대로 헤르시안의 발목을 베어 버렸다.
기감이 정상적이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공격.
깜짝 놀란 헤르시안은 최고의 천족답게 금세 떨어진 발목을 수복했다.
하지만 찰나와 같은 빈틈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싸움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안이 되니…….
-촤아악!
이능의 날개를 신화 등급의 신의 날개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생긴 제4의 손이 성검 칼립소를 휘둘러 헤르시안의 목을 베어 버렸다.
헤르시안이 내게 달려들어 공방 끝에 목이 베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초 남짓.
순식간에 승패가 나뉘는 것을 보며 윌리아 등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천계의 의원들은 비명과 같은 경악성을 토해 냈다.
“응?”
-콰아앙!
하지만 이어진 상황에 나는 헛바람을 삼켰고, 곧 강렬한 충격과 함께 튕겨졌다.
이유는 헤르시안이 몸이 목을 베였음에도 검을 휘둘러 왔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에 떨어졌어야 할 머리는 새하얀 빛으로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
목을 베어도 죽지 않는다니?
“이놈!”
곧이어 헤르시안의 머리가 다시금 목과 연결이 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본 나는 황당함에 웃음을 흘렸고, 놈은 그런 내게 분노 가득한 노호성을 내질렀다.
천족이란 종족에 왕자와 같은 멋진 외모를 가졌지만, 이제 놈은 공략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하긴, 그렇게 죽으면 너무 쉽긴 하지. 무려 천족의 대장인데 부활 정도야 뭐.”
이런 기이한 전개에 천계의 의원들도 놀라긴 했지만, 곧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불사신과 같은 적을 상대함에 있어 짜증보단 흥미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거 장비빨이냐? 아니면 스킬?”
목이 베어도 회복을 하는 놈의 능력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내 모습이 바라던 상황은 아닌지 뻘겋게 달아올랐던 헤르시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리가 부서져도 부활 되는 건가?”
“몸 전체가 잘게 다져지는 건?”
“부활 횟수 제한은?”
그리고 내가 연거푸 질문을 던지며 눈을 반짝이니, 헤르시안은 미친놈 다 보겠단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고.
“뭐, 계속 죽여 보면 알게 되려나?”
그 대사와 함께 검을 고쳐 잡으니, 놈의 눈빛이 격하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