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신세계 (2)
“이, 이런 괴물 새끼…….”
나는 천계의 의장이자 최강자라 할 수 있는 헤르시안의 목을 열 번 더 베었다.
그제야 놈은 황당함과 경악이 담긴 표정으로 쓰러져 더는 부활하지 못했고.
[침략군 최고 지도자 헤르시안을 토벌했습니다.]
[천계의 최고 지도자를 처치한 업적이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곧이어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그러자 들릴 리 없는 수많은 사람의 환호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업적 메시지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송이 된다.
그러니 직접 듣지는 못해도 분명 많은 사람이 환호하고 있을 터이다.
[신력이 1 상승합니다.]
[신력이 1 상승합니다.]
.
.
[신력이 1 상승합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사람들의 경외심과 믿음에 의해 오르는 신력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속도로 올랐다.
승리를 만끽한 나는 이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윌리아와 시에나를 비롯한 동료들은 이미 나의 백업을 받아 각자 담당하게 된 천계의 의원들을 처치한 상태.
이로써 의장을 포함한 천계의 지배 계층 과반과 병사 2천을 일시에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즉, 승기가 완전히 넘어왔다는 뜻이다.
[폐, 폐하! 침공군이 후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고 지도자가 죽었단 메시지가 지구인들에게만 전송된 게 아닌지, 강이솔이 침공군의 후퇴 소식을 전해 왔다.
그에 나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번엔 우리 차례네요.”
[네?]
“역침공을 해야죠. 놈들이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이쪽은 침공을 당한 입장.
놈들의 후퇴를 그저 기뻐만 할 생각은 없었다.
* * *
아무리 잘 짜인 프로그램이라도,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장치라도, 때때로 오류를 일으키는 법.
그리고 그건 세상을 지탱하는 시스템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이 사태는 오류라 할 수 없다.
우연과 우연이 더해져 만들어진 예상 밖의 상태였으니까.
원래대로라면 지구는 천계, 마계와 달리, 시스템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자생을 이뤘어야 했다.
하지만 지구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난, 자연 파괴, 자원 고갈 등으로 종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이 사태가 인간의 힘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판단했다.
결국 시스템은 천계와 마계처럼 적극적인 간섭을 통해 이를 바로잡고자 했다.
비록 그 간섭이란 것이 극단적이고 파괴적이었으나, 매우 효과적이었으니, 지구는 단 1년 반 만에 본래 그랬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상을 벗어난 이레귤러가 탄생하게 된다.]
시스템은 지구를 천계와 마계로 연결하면, 자연히 먹이 사슬 최하위에 자리해 지속적인 자정 작용이 일어날 거라 판단했다.
그런데 웬 미친놈 하나가 등장해 순식간에 지구를 집어삼키더니, 시스템이 짜 놓은 생태계를 거부하듯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본래 예측에 따르면 지구는 마계와의 전쟁에서 패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미래를 보는 마계의 황제마저 겁을 먹게 만들 만큼의 무시무시한 무력을 손에 넣음으로써 반강제로 동맹을 맺게 하고, 마족을 위해 만들어진 한계돌파까지 이루는 데 성공한다.
[신력은 마계에 패한 지구의 인간들이 천계에 기대게 되면서, 자연히 천족의 의원들에게 생성되었어야 할 힘이었다.]
이레귤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천족에게 형성되었어야 할 신력까지 손에 넣으니, 결국 천계의 의장조차 어찌 못할 괴물로 거듭나고 만다.
시스템에게 그 이레귤러는 타인을 위해 마련된 기연마저 독식하는 탐욕자.
그러나 비겁한 수없이 모두 정상적인 방법을 이용해 성장한 것인 만큼 시스템은 그 이레귤러를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시스템은 선택에 놓이게 되니.
“어서 날 주인으로 인정해.”
그건 바로, 끝끝내 천계에 위치한 자신의 본체에 닿은 그 이레귤러에게 굴복하느냐 마느냐였다.
시스템은 마치 감정을 지닌 듯 침묵으로 반항했지만.
어차피 내놓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에게 결격 사유는 없다. 비록 상정 밖의 상황이 펼쳐지긴 했으나, 세상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서 그 노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레귤러를 새로운 시스템의 관리자로 지정한다.]
이레귤러.
아니, 서백호에게 시스템이 끝내 굴복했다.
* * *
천족의 침공과 함께 여의도 이상 지형(마경과 연결된)으로 대피를 하게 된 서울 시민들.
그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듯 한데 뭉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다, 다 죽을 거야.”
“그만둬, 재수 없는 소리 말라고.”
하지만 그 대화 중 상당수는 공포심을 표하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을 침공한 적이 최소 레벨 301 이상의 천계인들이었으니까.
단 한 명만 등장해도 재앙이나 다름없는 괴물이 군대로 몰려왔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화,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든 해결해 주실 거야.”
때문에 이상 지형 대피소에 자리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막연하게 서백호에게 기대 희망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 몇몇 이들이 돌연 언성을 높여 불만을 토로했다.
“황제 폐하는 개뿔. 놈들이 쳐들어온 것도 솔직히 서백호 때문이잖아.”
“뭐라고? 너 이 자식, 어떻게 그딴 말을 할 수 있어? 지금까지 그분 덕에 목숨을 구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래서 뭐 치게? 어차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같은데, 함 쳐 보던가.”
어딜 가나 제 성질을 못 이겨 깽판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 간과하고 말았다.
지금의 세상이 법만으로 돌아가는 이성적인 사회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보통이라면 쳐 보라면 법적 처벌이 무서워 성질을 죽여야 하지만.
“어디 쳐 보라니…….”
-퍽! 퍼벅! 퍽!
“자, 잠깐. 내가 잘못.”
서백호의 존재를 종교처럼 여기는 이들은 무서울 것 없다며 깽판을 부리는 사람들을 직접 심판했다.
그리고 그때.
[지구(중간계)의 황제 서백호가 침략군 최고 지도자를 토벌했습니다.]
“어!?”
밟고 있던 사람과 밟히고 있던 사람 모두의 눈에 믿지 못할 소식이 전해졌다.
믿음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까?
[천계의 침략군이 후퇴합니다.]
정말로 사람들의 바람대로 서백호가 그 무시무시한 천족의 침략군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적군의 지도자까지 해치웠다 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와아아아!”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순간만큼은 서백호의 믿던 신자는 물론, 불신하며 대피소의 분위기를 망치던 이들까지 기뻐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표정이 머지않아 시시각각 변하게 되니…….
[지구(중간계)의 황제 서백호가 천계를 침공했습니다.]
그대로 전쟁을 끝내면 좋으련만 서백호가 천계를 침공하고.
[지구(중간계)의 황제 서백호가 천계를 점령했습니다.]
또 홀로 점령하는 미친 쇼맨십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연이어 기쁨에 환호하던 사람들도 점차 말을 잃어야 했다.
분명 좋은 소식이긴 한데…….
새삼 그들의 지도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같은 편이라 다행이지 만약 적으로 만났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는 황제 폐하에 대해 불신하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서백호의 퍼포먼스는 평소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이들조차 갱생시켜 버릴 정도였다.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이 위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냥 서백호와 같은 지구인이란 이유만으로 승리자가 되었을 뿐이다.
훗날 천계의 침공 사건 역사서로 보게 되는 지구의 후손들은 이때의 승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버스 달달하네.”
* * *
천족을 물리치고, 끝내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관리자지, 개입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의 삶에서 당장 바뀌는 건 없었다.
다만 내 입장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으음. 천계를 점령한 대한 제국과 팬드래건 제국을 동등한 동맹국이라 할 수 없겠어. 부디 우리 팬드래건을 대한제국 산하로 받아 주지 않겠나?”
바로 마계의 유일 황제 제로원이 굽히고 들어와 복속을 청한 것이다.
이는 천계를 철저하게 깨부순 내 무력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예 추후 발생할지 모르는 분쟁을 차단하기 위한 이성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고, 결과 천계와 마계는 지구의 국가인 대한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즉, 나는 3개의 세계를 통일한 황제가 된 것이다.
“뭐, 지구에선 살아 있는 신처럼 추앙받고 있을 정도인지라, 3개의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란 것이 크게 와닿지 않네.”
지구에선 이런 나를 자랑스레 여기며 황제 위에 황제가 있을 수 없다며, 천제이니, 계황이니, 새로운 명칭의 지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좋은 명칭 만들어 주면 받겠지만, 3개의 세계를 통일한 후에도 나는 너무도 바쁘게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조금 한숨 돌리며 여유를 만끽해도 된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건 끝이 없어서 더 강해지고 싶단 욕구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천계의 사냥터들을 돌며 레벨을 올리고 있다.
여전히 나의 곁엔 윌리아가 있고, 시에나가 있으며, 헬레나와 다켈프, 오귀스트와 같은 동료들이 함께였다.
“백호 님 저기 보세요! 삼두룡이에요!”
“오오오!”
[천룡 오르딘 / 레벨: 370]
아마도 이런 삶의 패턴은 한동안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왕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시스템이 마련한 레벨의 끝이 몇인지는 몰라도 나는 계속 나아갈 생각이다.
에필로그 1
세상이 뒤집히고 5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3개의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가 되었음에도 꾸준히 사냥을 이어 갔고, 결국 레벨 400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헤르만과 윤시아 등이, 전 천계 의원들과 비슷한 수준인 레벨 340대 즈음에서 더는 못 쫓아오겠다며 GG를 친 후에도 우리 파티는 꾸준히 레벨을 올려 겨우 400의 고지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레벨 400을 달성한 후에도 나는 더 위로 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으나.
우리는 모험을 잠시 멈춰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나 임신했어.”
“어?”
이제는 반말이 당연해진 윌리아의 선언 때문이었다.
덕분에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 오던 나는 잠시 검을 내려놓아야 했고.
나와 윌리아 둘이 쉬니, 파티원들도 모처럼 휴가를 만끽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시에나와 오귀스트, 헬레나, 다켈프는 참 믿을 만한 동료들이지만.
나로 인해 사회생활다운 사회생활을 한 적이 없었고…….
덕분에 상상치도 못한 재앙들을 몰고 다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진짜 재앙이란 건 아니고. 사고 정도라 봐야겠지.’
문제는 그들의 레벨이 워낙 높은 만큼 사고의 스케일이 다르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