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에필로그 2
대재앙으로부터 5년이란 시간이 흘러 지구는 완전히 평화기에 접어들었다.
세계 곳곳 파괴되었던 주요 도시가 재건되고, 또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기도 했다.
대재앙으로 인해 생긴 신도시 중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철원을 입에 담을 것이다.
철원이 부상하게 된 이유는 그곳에 한반도의 중립 도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중립 도시에는 대한제국의 황성이 있는지라 철원은 세계의 행정 수도라 할 수 있었고, 결과 황도라 불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저, 저런 천인공노할!”
“아가씨!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어서 내려오지 않고!”
확장에 확장을 거듭함으로써 서울 못지않은 규모를 가지게 된 황도 철원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해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사는 조화의 도시가 되었다.
철원의 중심엔 너른 광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 그 광장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개척자이자, 수호자이며, 3대 세계의 지배자이신 성황 서백호 폐하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그 이유는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서백호의 동상 머리를 누군가가 밟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무력으로 천계를 점령하고, 마계까지 굴복시키며 지구의 평화를 가져온 서백호.
그는 전 세계 인간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존재이자 숭배의 대상으로, 최근 세력을 불리고 있는 성황교란 신흥 종교에겐 ‘신’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서백호의 동상을 누군가가 두 발로 밟고 서 있으니,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서 내려와!”
“신성 모독이라고!”
하지만 정작 동상을 밟고 선 소녀는 그런 사람들의 호통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녀가 이런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시에나 / 레벨: 400]
바로 자신이 서백호의 동료였기 때문이다.
“여, 여러분! 잠시만요! 저분은!”
그때 마침 광장 북쪽 방향에서 누군가가 달려와 소리치는 통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마력을 실어 내지른 목소리였던지라, 어수선한 와중에도 사람들의 귀에 강렬히 파고들어 이목을 끌 수 있었다.
“황실 기사 아닌가?”
“심지어 복장이 일반 황실 기사가 아닌 것 같은데?”
“높으신 분이 왜?”
고위 사냥꾼들은 대부분 대한제국 직속 단체에 속해 있다.
그중에서 황실 기사단은 선택받은 강자들이 모인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멀리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인물은 황실 기사 중에서도 특히 높아 보이는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어어? 잠깐! 저분은!?”
그중엔 동상을 밟고 선 무뢰한의 정체를 뒤늦게나마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시에나 님이다!”
“뭐?”
“진짜?”
그렇게 시에나의 정체가 밝혀지고, 동상 밑에서 사람들이 내지르던 윽박 소리는 순식간에 환호성과 비명성으로 바뀌었다.
마치 톱 연예인을 우연히 만났을 때의 반응들처럼.
-타앗!
곧이어 위에서 한참 동안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엘프 소녀 시에나가 동상에서 뛰어 내렸다.
서백호의 동상은 50미터에 달하는 크기로, 고층 건물이 적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시설이었다.
때문에 몇몇 시민들이 깜짝 놀랐으나, 그녀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착지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황실 기사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저기가 좋을 것 같아.”
비록 시에나가 황실 기사보다 키가 훨씬 작아 자세가 어정쩡했지만, 시민들은 그 모습마저 귀엽다며 ‘꺅꺅’ 소란을 떨었다.
그리고 시에나에게 어깨가 걸쳐진 황실 기사 남성은 시선을 돌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황실 기사는 정체는 다름 아닌 김 군.
본명이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김 군’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은, 가의도의 이장 김씨 아저씨의 아들이었다.
“놀이동산 짓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저긴 산인데요?”
5년 동안 레벨 300을 달성한 사람이 단 200명뿐인 지구에서 320레벨인 그는 최고위 강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김 군도 시에나 앞에선 건축 전문가인 김씨 아저씨의 아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가 김 군과 함께 철원에 있는 건 지구에 놀 거리가 부족한 것 같단 이유로 대규모 놀이공원을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에나는 시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놀이동산의 부지를 선정했다.
그런데 어째 그녀가 가리킨 곳이 애매했다.
죄다 산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저쪽이 토교저수지 있는 방향 맞지?”
“네.”
“그럼 저기 보이는 산들만 밀면, 저수지를 끼고 놀이공원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길도 여기랑 직선으로 연결되고.”
호수나 다름없는 큰 저수지를 끼고 놀이공원을 조성하면 멋지긴 할 것이다.
심지어 토교저수지엔 작지 않은 규모의 섬이 있어서 잘만 이용하면 L월드 매직아일랜드의 확장판 느낌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주변에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거대한 산들을 밀어야 한다는 거였다.
시에나의 말을 따른다면 보통 인력으로 해결되지 않을 매우 큰 공사가 될 터.
그래서 생각보다 건설 비용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더니, 시에나가 가볍게 답했다.
“인력? 겨우 산 몇 개 미는데 무슨 인력을 써. 그냥 지금 내가 밀어 줄게.”
시에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김 군은 그런 시에나를 말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 잠ㄲ…….”
하지만 시에나는 김 군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발 먼저 움직였다.
레벨 320과 400의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장비빨을 뺀 순수 능력치 총합만 3배 차이가 날 정도로.
때문에 김 군 입장에선 시에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신속하게 느껴졌다.
“삭제!”
시에나는 자신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고고고고고고!
하늘이 열리면서 거대한 황금빛의 빛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압도적인지,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덕분에 김 군을 포함해 외출 중인 철원 사람들 모두가 멍하니 그 빛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곧 엄청난 소음과 함께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천지개벽을 알리는 듯한 충격음.
“으악!”
-드드드드드드드드!
그리고 빛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니, 마치 핵폭발이 발생한 것처럼 커다란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백호 일행은 공격 한 번에 도시를 없앨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그 말이 허풍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장면이었다.
“아마 깔끔하게 부지가 만들어졌을 거야.”
“그, 그런데 저 정도 위력이면 후폭풍도 엄청난 거 아닙니까!?”
김 군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게 황도가 된 철원 인구만 무려 300만에 달한다.
그런데 저런 무식한 공격의 후폭풍이 날아든다?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
시에나도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는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평온을 되찾았는데…….
“후폭풍이야 찢어 버리면 되지.”
“그게 무슨?”
시에나가 후폭풍을 찢겠다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다시금 김 군이 말릴 틈도 없이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내 빛의 화살을 날렸다.
시에나가 행동파인 건 잘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행동이 쓸데없이 신속해 말릴 틈이 없었다.
덕분에 김 군은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쇄애애애애액!
시위를 떠난 빛의 화살이 공기를 찢듯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빛의 화살은 머지않아 철원을 덮쳐 오던 충격파를 꿰뚫었다.
-파앗!
그러자 잠시 후, 따뜻한 열기를 머금은 미풍이 황도 철원을 훑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먼지구름을 몰고 오던 강렬한 충격파가 작은 빛의 화살 한 방에 상쇄된 것이다.
“맙소사. 진짜로 충격파를 찢다니…….”
“하핫! 어때?”
김 군은 시에나가 공언한 대로 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며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스윽 고개를 돌려 주변 풍경을 눈에 담으니, 온통 깨져 있는 창문들과 여기저기 금이 간 건물 외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후폭풍에 도시가 날아가는 일은 막았지만, 앞선 공격으로 인해 발생한 지진만으로도 도시는 혼비백산인 상황이었다.
“시에나 님. 평소 하시는 대로 행동하시면 도시 날아가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김 군은 결국 시에나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미안. 피해 상황 파악해서 보고해 줘. 보상해 줄게.”
뒤늦게 쑥대밭이 된 철원의 상황을 인지한 시에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고 애써 웃어 보이는 시에나의 모습은 살아 움직이는 재앙치곤 쓸데없이 사랑스러웠다.
“아, 그 눈빛 싫은데.”
“네?”
“미안, 연애 감정 품어도 불편하니까 딴 데 알아봐. 나 조금만 더 크면 서백호를 채 갈 생각이거든.”
“…….”
더불어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무서운 언변은 덤이었다.
에필로그 3
시에나가 철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마룡 오귀스트와 헬레나, 다켈프는 복구된 서울의 홍대 거리를 거닐었다.
그런 그녀들의 양손엔 길거리 음식이 가득했는데, 오귀스트는 닭꼬치를 나무째 씹어 먹고 있었으며, 헬레나는 붕어빵을 문 채 주변의 옷 가게들을 스캔하기 바빴다.
그리고 다켈프는 버블티를 마시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켈프는 완전히 버블티에 빠져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응?”
그렇게 평범한 여성에 빙의해 한참 홍대 거리를 거닐던 세 사람에게 한 무리의 남성들이 다가왔다.
“와, 하나같이 외모 레벨이 높네. 어느 나라에서 왔어?”
그 남성들은 사냥꾼이었다.
[하세남 / 레벨: 152]
심지어 레벨도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하는.
다만 양팔에 이레즈미를 새겨 넣고, 그걸 드러나게 다닌다는 점에서 꽤나 껄렁해 보이는 사냥꾼들이었다.
헬레나는 그런 이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오귀스트가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다켈프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버블티에 빠져 있었고.
“모처럼 얼굴도, 정보도 숨겼는데, 일반인의 삶이란 것도 경험해 보자고.”
그런 세 사람의 머리 위엔 모두 레벨 20~30 정도로 맞춰진 가짜 정보가 새겨져 있었다.
더불어 서백호의 파티가 워낙 유명한 만큼 얼굴도 널리 알려져 겉모습까지 숨긴지라, 일반인 입장에선 이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외형이 그리 선해 보이진 않는데?”
“모름지기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거야. 이때가 아니면 언제 헌팅을 경험해 보겠어?”
헌팅이란 말을 들으면 사냥밖에 떠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들이다.
때문에 오귀스트는 꽝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도 헌팅이란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고 싶어 했다.
결국, 헬레나는 알아서 하라며 어깨를 으쓱였고, 그렇게 교통정리가 끝이 나자 오귀스트가 나섰다.
“루마니아에서 왔어. 무슨 일이야?”
그냥 생각나는 나라 이름을 아무렇게나 댔더니, 남자들은 더욱 좋단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오, 루마니아!? 미인이 많은 나라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네.”
그리고 은근슬쩍 어깨에 팔을 걸쳐 오자, 오귀스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행동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은 그녀가 정해 놓은 저항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벨이 400인 마룡의 저항선 말이다.
“하하, 고마워.”
오귀스트가 순진하게 행동하자 그들의 얼굴에 더욱 짙은 미소가 걸렸다.
남성들은 오귀스트 일행에게 한잔하자며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는데…….
“헉!”
-움찔.
하필 도착한 펍이 사냥꾼 사이에서 꽤나 핫한 곳이어서, 아는 얼굴을 딱 마주치고 말았다.
[윤시아 / 레벨: 342]
[클로에 주 / 레벨: 340]
윤시아와 클로에 주를 말이다.
이 두 사람은 서백호 파티를 제외한 인류 중 가장 높은 레벨을 가진 존재들.
그래서인지 오귀스트 일행의 위장을 단번에 알아챘다.
“자리 옮길까?”
“그, 그러자.”
헌팅남들도 윤시아와 클로에 주를 바로 알아보곤 움찔거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게 두 여인은 서백호의 열렬한 광신도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범죄자를 도륙한 심판자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찔리는 게 있는 이들은 절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헌팅남들은 도망치듯 오귀스트 일행을 이끌고 황급히 펍을 떠나. 주변의 호프집으로 이동했고 비로소 작업다운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오귀스트가 바라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
작업 멘트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었고, 심지어 태도도 시종일관 고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뱀 같은 눈이 수시로 몸을 훑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오귀스트는 점차 상대에게 흥미를 잃어 갔고, 옆에선 헬레나가 거봐라는 표정을 지었으며, 다켈프는 여전히 버블티만 빨고 있었다.
결국, 오귀스트가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헌팅남들의 표정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화장실 가게?”
“아니, 지루해서 그냥 가려고. 그러니까 비켜.”
당연히 헌팅남들이 얌전히 비켜 줄 리 만무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그녀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지나치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헌팅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배려심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사탕발림을 하든 유머로 웃겨 주든 이쪽의 마음을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냐. 근데 무슨 자기 자랑을 성황교의 서백호 찬양 멘트처럼 하니…… 됐다, 됐어. 딱 봐도 꽝인데,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리고 이어진 극딜에 헌팅남들이 발끈했다.
“지금 말 다 했어?”
당연히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헌팅남들은 여차하면 힘을 쓸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어, 다 했는데? 왜 덤비게?”
그런데 그녀들은 무서울 것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결국 화가 솟구친 이레즈미남이 얇은 셔츠 차림인 오귀스트의 멱살을 잡았다.
“와우, 나 멱살 처음 잡혀 보잖아.”
“헌팅에 이어 새로운 경험이네?”
그런데도 오귀스트는 헬레나와 조소 띤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이, 이것들이 미쳤나.”
당연히 이레즈미남과 나머지 헌팅남들에게 그 모습이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웃는 낯을 하고 있던 오귀스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제야 헌팅남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 새끼들 또 작업질이네? 어? 오, 뭐야. 하나같이 미인이잖아? 나도 끼워 줘.”
[김성훈 / 레벨: 230]
하지만 때마침 너무도 든든한 지원군이 등장했다.
말단이긴 해도 무려 황실 기사단 소속인 헌팅남들의 지인이 아는 척을 해 온 것이다.
황실 기사단원은 존재만으로도 더없이 든든한 백.
그에 헌팅남들이 다시금 기세등등해졌다.
“야야, 뭐 하는 거야. 손 풀어.”
그는 매너 좋은 척 다가와 이레즈미남이 잡은 오귀스트의 멱살을 풀어 주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황실 기사는 붙잡은 오귀스트의 손을 당연하다는 듯 놓아 주지 않았다.
“복장 보이지? 나 황실 기사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잔하면서 풀자고.”
이어서 그가 오귀스트를 강제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려 할 때.
“이 미친 새끼야!”
-빠악!
“커억!”
느닷없이 호프집 문을 박차고 등장한 여성의 송곳 같은 드롭킥이 그 황실 기사의 안면에 꽂혔다.
“성훈아!”
“성훈이 형!”
그리고 무려 레벨 230의 사냥꾼이 맥없이 튕겨져 나가 벽에 구멍을 뚫고 처박히고 말았다.
황실 기사는 박살이 난 벽 사이로 엉덩이만 드러낸 채 꿈틀대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헌팅남들은 상황파악을 위해 눈을 돌렸고, 갑작스러운 난입자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윤시아와 클로에 주.
“이게 대체?”
뜬금없는 최상급 중의 최상급 네임드의 등장에 헌팅남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그들의 얼굴을 굳다 못해 하얗게 질리게 했으니.
“안녕하십니까!”
윤시아와 클로에 주가 마치 군대 선임에게 인사하듯 오귀스트 일행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호, 혹시라도 여러분께선 도심 한복판에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홍대는 유동 인구가 많은 만큼, 힘 조절을 잘못하시면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마니까요.”
날아간 황실 기사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긴장감 가득한 표정으로 저자세를 유지하는 윤시아와 클로에 주의 모습에 결국 오귀스트는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변장을 풀었다.
그러자 오귀스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머리 위의 정보도 새로이 갱신되었다.
[마룡 오귀스트 / 레벨: 400]
헌팅남들에게 오귀스트의 레벨은 보이지도 않았다.
레벨이 두 배 이상 차이 나면 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못해도 상대의 이름을 본 순간 레벨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룡 오귀스트가 서백호의 동료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덕분에 오귀스트의 멱살을 잡았던 이레즈미남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선 채로 기절하고 말았다.
“이 새끼들 질이 안 좋아 보여. 한번 털어 봐.”
오귀스트의 지시에 윤시아와 클로에 주가 알겠다며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오귀스트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으니, 이어서 그녀의 시선이 벽에 처박혀 있는 황실 기사에게 향했다.
“그리고 요즘에 황실 기사단이 많이 해이해졌나 보네.”
따로 뭔갈 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그런데 윤시아와 클로에 주는 오귀스트의 그 말에 눈빛이 이글이글거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사람이 황실 기사단을 휘하에 둔 책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윤시아는 황실 근위 총단장이었으며, 클로에 주는 대한제국 중앙군 사령관이었다.
때문에 오귀스트가 지나가는 투로 내뱉은 그 말은 두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헌팅 한번 경험해 보겠다고 나선 마룡이 말단 기사와 잘못 엮이는 바람에 괜히 피바람이 불게 생긴 황실 기사단이었다.
-힐끔.
오귀스트는 마지막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은 헌팅남들을 별 의미 없이 훑어봤고, 그것만으로 오금에 힘이 풀린 이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에필로그 4
임신한 윌리아를 곁에서 보살피며, 월광도에서 오붓하게 10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시에나와 오귀스트, 헬레나, 다켈프 등은 쉬지 않고 사고를 쳐 댔다.
개중엔 조용히 넘어간 것도 있었으나, 도시가 날아갈 뻔한 경험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배상 등으로 빠져나간 코인만 해도 수십억 규모.
새삼 나와 동료들의 힘이 인간의 규격을 완전히 넘어서 신화급에 다다랐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돈 먹는 하마들이네.’
덕분에 나는 동료들을 여러 차례 혼내야 했지만, 굳이 그들의 행동에 제약을 걸진 않았다.
시에나 등의 상식이 부족한 게 그동안 내가 사냥터만 끌고 다닌 영향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윌리아의 임신 기간 동안 충분히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휴가도 10개월이나 보내면 질리는 모양이다.
윌리아의 출산일이 가까워져서인지 최근엔 외출을 하는 것보다 우리 부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온 윌리아의 출산일.
“응애!”
세계 최고의 분만 전문가들의 도움 속에 윌리아는 큰 문제 없이 아이를 출산했다.
당연하다.
그녀의 레벨이 몇인데, 무슨 위기가 있겠는가.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아들과 딸.
즉, 쌍둥이였다.
“와, 못생겼어. 아빠 닮았나 보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뱉는 시에나의 감상에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에게 잘 생기길 바라는 건 오바지!”
“그런가?”
윌리아에게 그런 것처럼 일행 사이에 더는 존댓말은 없었다.
아이들은 태어남과 동시 극상급 회복 물약으로 만들어진 욕조에 씻겨졌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적인 부분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즉시 회복시킬 수 있는 게 지금의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윌리아도 출산과 동시에 즉시 회복 스킬을 사용하여 출산 전과 같은 최상의 몸 상태를 바로 되찾을 수 있었다.
“즉시 회복으로 몸 상태를 되돌려도 모유 수유는 할 수 있구나? 신기하네.”
“그러게. 생각보다 시스템이 융통성 있는걸?”
윌리아는 차례로 아이들에게 수유를 하였고, 나와 일행들은 그 모습을 포위하듯 둘러싸 지켜보며 연신 신기하단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아빠라니.’
순간 많은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재앙부터 시작해 별 볼 일 없던 청년이 성황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죽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항상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쉴 틈 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끝은 이러하니, 내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야 우냐?”
그리고 귀신같이 내 감정을 파악한 일행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시에나가 놀리듯이 킥킥 웃었다.
“내가?”
울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기쁜데.
나는 허튼소리 말라며 시에나에게 꿀밤을 날리고는 윌리아의 곁에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고마움과 미안함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생각이 통하는 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윌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행복하자.”
끝내 입 밖으로 내뱉은 한마디.
이는 나와 내 가족, 동료들이 함께 추구해 나갈 앞으로의 목표였다.
“서백호가 오글거리는 대사 친다!”
하지만 시에나는 그 마지막 한마디마저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