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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5화 (5/122)

5화. 가만히 보기나 해. (2)

원장의 피 묻은 손가락이 부들거리며 내 발을 쥐었다.

“아닙니다! 제가 앞으로는 열심히, 아니, 잘, 아니, 착하게……!”

제 아픔은 이렇게 잘 느끼는 인간이 어찌 남의 아픔에는 그리도 둔감할까.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놈의 얼굴을 세로로 가로지른 칼자국을 잠시 응시했다.

그때는 이 칼자국이, 이 얼굴이 그리도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기운을 일으키자 검이 희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무리가 반원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몸에서 분리된 놈의 목이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 정지했다.

흘러나온 피가 갈빛의 카펫을 붉게 물들였다.

인간의 피였다.

인간을 학대하고, 방치하고, 죽이고, 그 인육을 구워 먹던 인간에게서도 붉은 피가 흘렀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내 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을 듣고 숙소에서 나온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괴물 습격이야?!

-으아아! 피, 피가……!

-괴, 괴물이다!

-감독방 아니야? 시발, 괴물인가봐!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

.

.

웅성거림은 비명이 되고,

비명은 곧 숨죽인 환호로 바뀌었다.

“죽었어. 원장이, 죽었어!”

“시발… 신이시여… 존재하셨군요……! 그 동안 씹새끼라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아멘아미타불!”

애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방문 밖에 몰려서 있었다.

그 중 용기 있는 한 녀석이 드디어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지수였다.

“그런데, 누구신지……?”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마스크를 벗었다.

애들의 눈이, 최지수의 눈이 실시간으로 동그래졌다.

“림아!”

최지수가 나를 덥석 껴안았다.

그걸 신호로,

“죽은 줄 알았잖아, 림 오빠!”

정하영이 비명 같은 환성을 내지르며 달려들고,

“씹새끼야…. 진짜로 각성해서 돌아올 줄은…, 흐규흐규…….”

이일삼이 눈물콧물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고,

“돌아왔어, 림이가 돌아왔어!”

이이사가 돌고래 소리로 울며 달려들고,

달려들고,

달려들고,

달려들던 녀석들의 흥분은 애들과 나 사이에 낀 최지수의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지경이 되어 겨우 진정되었다.

최지수가 얼굴을 묻은 어깨가 온통 축축했다.

그 얼굴도 마찬가지 상태였다.

한밤이었는데도 복도가 환했다.

애들이 원장실과 감독실에 걸려 있던 등불을 앞세우고 기쁨에 겨워 복도를 행진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돌아왔구나, 림아.”

꽉 막힌 목소리로, 최지수가 말했다.

눈물 자국이 여실한 얼굴에는 보기 드문 흥분이 배어 있었다.

“그래, 돌아올 줄 알았다. 림이 너 같은 독종은 쉽게 죽지도 않으니까.”

“이게 욕이냐, 칭찬이냐.”

“당연히 칭찬이지. 어엿한 각성자님께 내가 감히 욕을 하겠니.”

최지수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음.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여겨줘서 고맙기는 한데.

“형, 나 각성 못했어.”

“…아니라고? 감독들을 저렇게 박살냈는데? 키도 이렇게 커졌는데?”

“뭐, 그렇게 됐네.”

설명하자면 끝이 없다.

내가 전직 검황이라 불리던 천하제일 무림고수인데 사실은 원인 모를 환생 중이고 전생에 숨겨둔 영단을 먹고 내공을 끝빨나게 쌓아 어지간한 각성자는 뚜까팰 경지에 올랐다고 설명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좀…….

나는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건 차차 얘기하자고.”

***

이제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수다.

거주지를 둘러싼 성벽과.

성벽을 지킬 각성자와.

인근 괴물들의 서식지를 표시한 괴물 서식 지도.

기세 좋게 원장을 죽인 것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희망보육원은 계룡성벽에서 북쪽으로 3키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북쪽으로 2키로미터 가량 올라가면 계룡산이었고, 그 산골짝 어딘가에 두억시니 소굴이 있었다.

동쪽에는 반계산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리치?’라고 적혀 있었다.

두억시니와 리치 모두 상급 인간형 괴물.

만약 그들이 보육원을 공격하면 애들 한두 명 죽는 걸로 끝나지는 않을 터. 다행히 아직 한 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두억시니나 리치는 자신의 활동 영역을 벗어나 움직이는 놈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보육원에 있었던 8년 동안 경험했던 큰 습격은 위의 두 괴물의 짓은 아니었다.

서쪽의 항적산 산자락에 위치한 칠미호 무리가 떼를 지어 습격한 게 대여섯 번.

기본적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오크 무리의 습격이 또 열댓 번.

하지만 가장 위험했던 날은 폭우가 쏟아진 날 범람한 두계천을 타고 나가 무리가 보육원을 공격했던 때였다.

그날 삼십 명이 넘는 애들이 죽었다.

원장이 매달 보호세를 바치는 청응파의 각성자들이 거들먹거리며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더 많은 애들이 그날 죽었을 것이다.

보육원에 상주하는 감독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소규모 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일 뿐.

원장의 장부에는 매달 청응파에 치른 보호세의 내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한 달에 3000돈.

-생각보다 싸네?

-림아. 잘 봐라. 그건 그냥 계약금이다. 그 밑에 출동 건수당 지불한 액수를 봐야 한다.

-헐? 삼만…팔천……?

-그 밑에도.

-십이만… 꼬… 꼴까닥.

-림아! 정신, 정신 차려라!

백 명 애들의 목숨값으로는 그리 비싼 돈이 아닐 수도 있다.

목숨값이라는데. 어쩌겠어.

원장 이하 감독들이 놀고먹는 데 들어가던 돈을 애들 먹이고 입히는 데 쓸 수 있으니 전보다는 살림이 나아질 테고.

그래도 배알이 꼴리는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내가 세력이 없지, 힘이 없냐.’

나는 독수리가 양각된 나무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형. 지금 우리 간보는 거 맞지?”

“참아라. 림아.”

“아니라고? 아, 그럼 엿먹이는 건가?”

“참으라고. 림아.”

계룡성곽 안 청응파의 로비.

삐까뻔쩍한 3층짜리 건물의 1층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덩치 산만한 각성자 하나가 우리를 막아 세웠다.

그는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최지수와 나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았다.

-희망보육원에서 왔습니다. 청응파 회장님께 보호 의뢰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원장은? 왜 애들이 왔지?

-자세한 사정은 회장님을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나는 원장의 모가지가 들어 있는 상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상자에 돈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사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를 남기고 그가 계단을 올라간 게 삼십 분 전.

“그냥 싹 조지고 생각할까?”

“림아. 박살내는 건 쉽지만 지키는 건 어렵다고 네가 한 시간 전에 스스로 말했다.”

“아까는 그렇게 생각했지. 어디 사람 생각이 항상 같을 수가 있나.”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힘겹게 눌러 참으며 다시 기다리기를 삼십 분.

빠각.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책상을 움켜쥐었다.

철제 책상 상판에 손가락이 파고들고 다섯 개 구멍이 뚫렸다.

이번에는 최지수도 말리지 않았다.

무력시위를 위해 막 계단을 오르려는 찰나였다.

“어? 각성에 환장한 행인?”

잔뜩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

“이야. 그 사이 괴물 겁나게 잡으셨나봐. 더 훤칠해지셨어. 그 때는 소년 같았는데, 아주 이제 청년이 되셨네.”

“명칠 씨야말로 많이 성장하셨네요.”

명칠이.

희망보육원에서 나와서 고블린 때려잡다가 마주친 두 각성자 중 하나…가 맞나?

“반 년 전에 잠깐 마주쳤는데 기억하시네요.”

“사연 있어 보이는 맑은 눈의 소년. 캬아. 잊을 수가 없죠.”

맞네, 맞아.

그때 자기네 조직에 들어오라 어쩌라 하며 명함을 줬었는데 어디다 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명칠이는 한참 동안 그날의 놀람과 그 이후 자신의 생활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다리다가는 끝이 없을 듯했다.

“보호 의뢰 관련하여 회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회장님 계신가요?”

“요즘 비상 터져서 회의 중일 걸요. 나도 그것 때문에 비번인데 불려나왔고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명칠이가 이내 말을 이었다.

“일주일쯤 됐나…? 유동리에 슬라임이 나왔는데 처음에 손을 잘못 대는 바람에 겁나게 커졌어요. 유동리가 우리 구역이거든. 알죠? 슬라임 커지기 시작하면 답 없는 거.”

“그럼요. 알죠.”

“이미 우리 힘으로 잡기는 글렀는데 또 다른 데 손 빌리기는 싫고. 아침부터 그것 때문에 회의하는 것 같더라고요. 뭐…, 결국 입암문이나 곡사파한테 연합 제의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명칠 씨. 제가 회장님을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요.”

***

나문덕은 매우 피로한 상태였다.

처음에 작은 슬라임이라고 해서 대충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내보낸 아이들이 어깨 하나와 팔 하나, 다리 두 개를 잃어버린 채 들것에 실려 돌아왔을 때라도 자신이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믿고 맡긴 1팀조차 부상을 입고 돌아왔고.

자취를 감춘 슬라임이 이틀 후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

‘슬라임은 영 까다롭단 말이야.’

슬라임은 3인 1슬라임이 원칙.

전사 하나에 술사 둘이 팀을 이뤄야 한다.

제멋대로 경도를 바꾸는 살덩이를 잘라내기도 까다롭지만, 서툴게 공격했다가는 순식간에 커진다는 점이 더 문제였다.

몸체가 잘려나가면 재생하고, 자른 조각이 다시 본체에 붙어 덩치를 키운다.

때문에 슬라임의 마력이 끝날 때까지 몸체를 계속 잘라내고, 동시에 잘려나간 조각을 속성 공격으로 소멸시키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

하급 슬라임은 손발만 잘 맞는다면 어지간한 팀으로도 잡을 수 있으나 이미 그럴 시기는 놓쳤다.

‘돈이야 줄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도움을 청했다는 소문이 퍼지겠지. 안 그래도 요즘 입지가 좁아지는데 그런 소문이 퍼지면……?’

나문덕은 두 경쟁 조직에 도움을 요청하는 그림은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우리 애들 데리고 직접 가? 내가 전사니까, 1팀장이랑 3팀장이랑……. 근데 그랬다가 못 잡으면 무슨 개망신이냐.’

하지만 홀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3팀 팀장 박명칠이 슬라임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을 데려온다기에 혹시나 하면서도 일단 회의를 중단했다.

그리고 회장실로 박명칠과 ‘그 사람’을 불렀다.

새파란 애송이였다.

애송이가 내놓은 희망보육원 원장의 모가지는 좀 놀랍기는 했다. 인성은 쓰레기지만 실력은 인성에 반비례한다고 들었는데.

보육원 내에서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소문은 나문덕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사업가일 뿐,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

“제가 슬라임을 잡아 드리죠.”

얼굴 멀끔한 애송이가 지껄였다.

나문덕은 애송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

자신이 직접 나섰다가 실패하면 파장이 크겠지만, 어중이떠중이가 실패하는 광경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봐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회의를 해산하고 애송이를 데리고 현장으로 향했다.

***

“크네요.”

“어…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명칠이가 중얼거렸다. 나문덕이 그 옆에서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현장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슬라임이 다른 곳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교대를 해가며 24시간 전투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문제는.

그 전투가 슬라임의 덩치를 계속 부풀린다는 점에 있었지만.

각성자 하나가 쌍검을 휘둘러 미끄덩한 몸체 한 덩어리를 베어냈다. 쥐가 뜯어나간 빵처럼 잘려나간 자리는 순식간에 다시 메꿔졌다.

떨어져나간 주먹만한 살점이 본체와 합류하려고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저걸 처리하지 못하면 슬라임이 커…

졌다. 한 발 늦게 날아든 화염구가 시멘트 위를 허무하게 태우다가 이내 소멸했다.

덕분에 봉고만하다고 들었던 슬라임은 이제 아담한 단독 주택의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다들 물러나라고 하세요.”

내가 검을 빼들며 말했다.

“정말 혼자 괜찮겠어요? 저만한 슬라임을?”

“네에. 그럼요.”

박명칠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최지수의 얼굴은 훨씬 더했다.

최지수는 현장으로 걸어오는 내내 나를 말렸다.

-림아, 너무 위험하다. 청응파 전체가 매달려도 못 한 일을 서림이 네가 혼자서 어떻게 한다고 그러냐.

-안 위험한 일이 어디 있냐?

-그래도 네가 일부러 위험을 떠안을 필요는 없다. 그냥 돈을 내자. 못 낼 돈도 아니지 않으냐.

-됐어. 그냥 보고 있기나 해.

결국 입을 다물기는 했다. 하지만 진중하던 평소와 달리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치켜 올라간 오른쪽 눈썹이 불만스럽게 실룩거렸다.

어디서 많이 보던 표정이다.

오래 전, 내 사제들도 자주 저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렇게 혼자 훌쩍 떠나지 좀 마십시오, 사형. 소화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십니까?

-누가 나를 해친다고 그래. 내가 니들이랑 같으냐? 질풍검이랑 은영신녀 주제에 무슨 검황을 걱정해. 그럴 시간 있으면 운기나 더 해라.

-압니다. 안다고요. 그래도 남은 사람도 생각해 주시라고요.

‘녀석들도 참……. 사서 걱정이었지.’

나문덕이 신호를 하자 슬라임 주위에 붙어 있던 여섯의 각성자가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레 목표를 잃은 슬라임이 순간적으로 몸체를 부풀렸다.

“림아. 정말 이게 최선이냐.”

창백한 얼굴의 최지수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가만히 보기나 해, 형.”

대꾸하며, 나는 바닥을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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