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가만히 보기나 해. (3)
스촤아앗.
사라졌던 목표를 발견한 슬라임이 고무고무한 팔…을 내뻗었다.
왼쪽으로 상체를 뒤틀자 미끄덩한 덩어리가 허공을 움켜쥐었다.
다시 바닥을 걷어차며 진기를 끌어 올리는 나를 향해,
다섯 개의 팔이 동시에 뻗어 나왔다.
검을 휘둘러 잘라내면 간단하지만, 그만큼 놈의 덩치를 부풀리게 된다.
나는 검을 가볍게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검에서 발출된 검풍(劍風)에 슬라임의 팔이 기묘하게 우그러졌다.
그 틈새로 쇄도하며 좌상단으로 검을 들어올리고.
눈앞에 다가든 거대한 몸체를 향해 우하단으로 내리쳤다.
손으로 누른 풍선처럼 우그러졌던 몸은 검풍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슬라임을 중심으로 원형의 궤도를 그리면서 녀석의 크고 미끄덩한 몸체의 이곳저곳에 연속적인 검풍을 날렸다.
잘려나가지는 않을, 하지만 충분히 충격이 전달될 정도의 강도.
내가 취한 보법은 속도 변환과 방향 전환이 강점인 취원보(取猿步).
마교 교주도 파훼하지 못한 기기괴괴한 움직임을 고작 슬라임이 잡아낼 리는 만무했다.
수건돌리기마냥 녀석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지루한 전투가 이어진 끝에.
드디어 녀석이 빡쳤다.
빡친 슬라임이 경화하기 시작했다.
미끄덩한 살이 순식간에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거대한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솟은 돌기가 단단해진 몸체를 감쌌다. 그 중 여섯 개의 돌기가 창처럼 길어져 내 팔과 다리, 단전과 목을 노리며 뻗어왔다.
스파앗.
진기를 잔뜩 머금은 검을 원을 그리듯 휘두르자, 위의 세 개의 창이 잘려나갔다. 동시에 두 발로 당랑각(螳螂脚)을 운용하자, 아래의 세 개 창이 동강났다.
여섯 개의 창이 몸에서 잘려나가 허공을 허우적대며 날았다.
속성 공격으로 태우거나 바스러뜨리지 않으면 다시 제자리로 들러붙어 몸체를 부풀릴 녀석들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마핵을 조져야지.’
동굴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 슬라임 수십 마리를 해치우며 습득한 방법.
창이 잘려나가 평평해진 등짝에 손바닥을 바싹 붙였다.
호신강기를 잔뜩 끌어올려 보호했음에도 손바닥을 타고 조금씩 독이 스며들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진기를 끌어 올려 독을 태워 없애며, 녀석의 몸뚱아리에 내 기운을 주입했다.
녀석은 끊임없이 창을 뻗어내 나를 떨어내려 몸부림쳤다.
검을 휘둘러 그것을 잘라내고.
어깨를 비틀어 회피하고.
다른 창을 검으로 빗겨 막았다.
동시에 기운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드디어.
녀석의 몸속을 탐색하며 돌아다니던 내 기운이 응축된 마기(魔氣)를 발견했다.
마핵(魔核).
괴물의 마력과 생명력의 원천.
녀석의 마핵은 집채만한 몸체의 가장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녀석이 뻗은 뾰족한 창이 내 인중과 명치를 향해 날아왔다.
깊숙이 상체를 숙여 두 자루 창날을 회피하고.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수그렸던 몸이 단번에 솟구쳤다.
의지에 따라, 겹겹의 기운이 단전을 매섭게 휘돌았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채웠다.
높이 솟구친 내 몸을 향해 네 자루의 창이 뻗어 나왔다.
호신강기에 부딪힌 창날의 끝이 부러지고, 다시 여덟 자루의 창날이 뻗어 나왔다.
그 창이 내 몸에 닿기 직전.
파앗!
검끝이 녀석의 강철 같은 피부를 두부처럼 갈랐다.
한층 더 진기를 끌어 올리자 검끝을 타고 검기가 솟았다.
튀어나온 검기가 마핵을 정통으로 찔렀다.
거세게 뻗어 오던 여덟 개의 창날이 힘을 잃고 구부러졌다.
슈욱. 슈우우우.
거대한 슬라임은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나는 뒤돌아섰다.
“끝났습니다만.”
다들 얼빠진 얼굴이었다.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헤 벌린 나문덕의 표정이 가장 볼 만했다.
***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무보수로 의뢰를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사람 죽이는 것 빼고는 다 해드립니다.”
“너무 박하구먼.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하지.”
“보육원에 출동할 일이 얼마나 된다고요. 일 년 가도 다섯 번 될까말까던데.”
“말이 쉬워 출동이지. 거기에 우리 애들이 얼마나 동원되는지 알지 않은가. 3등급 위험이면 열 명이 동원되네. 우리 애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거야. 자네가 대신 수행할 의뢰가 매번 그만한 가치를 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저거 슬라임 사체. 저거 유성길드에 팔겠죠. 그것만으로도 몇 천 돈은 될 텐데요.”
“그건 이번 얘기고.”
거 참. 빡빡하게도 군다.
“경험치.”
“…뭐?”
“나한테 의뢰 줄 때마다 그쪽 애들 몇 명 같이 보내요. 다급한 상황 아니면 내가 묵사발로 만들어서 애들한테 넘겨줄게요. 버스 태워 준다고요.”
“버스를 태워 준다고……?”
나문덕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역시 나이가 지긋하니 옛 시대의 용어를 잘 알아듣는다.
각성자들은 괴물을 죽이면 마력이 강해진다. 물론 혼자서 죽이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막타 치는 것만으로도 꽤 쏠쏠할 터.
물론 게임처럼 상태창이나 경험치바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런 세상이라면 차라리 쉽겠지. 클릭으로 스킬 찍고, 플레이어가 죽으면 부활시키고.
하지만 그런 세상이 아니다.
각성자들의 성장은 마교의 흡성대법처럼 상대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에 가까웠다. 경험치 먹는다는 표현은 그저 구세대의 흔적일 뿐.
그리고 그 경험치는,
‘나한테는 필요가 없거든.’
거래의 기본이다.
나에게 불필요한 것을 내주고, 내가 필요한 것을 받는다.
“…그러세.”
“콜.”
계약서 두 개에 지장을 찍고 나눠 가지는 것으로 보호 의뢰 계약이 종료되었다.
나문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청응파에 들어오라며 나를 설득했으나 나는 귀를 후비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경탄의 시선과 감탄의 신음 사이를 통과하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던 최지수가 입을 연 것은, 성문을 나선 직후였다.
“림아.”
“응?”
“네가 보기에는, 내 검술 실력이 어떠하냐.”
예상한 질문이었다.
보호받는 위치에 놓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실력은.
“형편없지.”
“역시 그렇구나.”
사실은 사실.
최지수의 머리는 내 얼굴 뺨치도록 성능이 훌륭했으나 몸은 덩치만 클 뿐 영 아니올시다였다.
“형 수련은 성실히 한 거지?”
“네가 시킨 대로 각 자세별로 천 번씩 계속 수련하는 중이다.”
“…그래. 진짜 성실하네.”
하루 천 번 해서 그 수준이라니. 정말 악마의 재능…
“나. 각성할거다.”
응?
“표정이 왜 그러냐. 나 각성할 거라고 했다만.”
“하하. 각성. 각성 좋지.”
…라고 대꾸는 했으나.
사실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얼마나 자질이 형편없으면 자신의 기운조차 느끼지를 못하냐고. 내가 몇 년을 가르쳤는데.
최지수만이 아니다.
희망보육원을 떠나기 전 나는 수련하는 틈틈이 애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단전을 만들지 못했다.
자연의 기운, 운기조식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기(氣)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검술 연습이야 시킨 대로 성실히들 했으나, 외공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
그런데…
각성? 가아악서어엉?
이 천하의 무재(武材), 전직 검황인 나도 못한 그거?
하하하.
하하.
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를 뜯고 있는 일곱 마리의 구울을 발견했다.
나는 검을 휘둘러 여섯 마리의 구울을 죽이고 한 마리를 남겼다.
고블린이라면 이럴 때 도망갈테지만 이지가 없는 구울은 오히려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구울의 앞발이 내 무릎을 향해 뻗어오는 순간 취원보(取猿步)를 운용해 놈의 뒤로 돌아들었다.
나는 계속 취원보를 운용해 놈의 주위를 맴돌며 최지수를 불렀다.
“형. 여기 등딱지 있지. 여기 움푹 파인 곳을 정확히 찔러야 해. 그 낡아빠진 검으로는 다른 데는 못 뚫어.”
최지수가 진지한 얼굴을 끄덕였다.
“셋 하면 형 앞쪽으로 데려갈 테니까. 그대로 격우지세 취해. 격우지세. 알아?”
“오른발을 강하게 내딛으며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가 왼발로 땅을 밀치며 검끝을 아래로 돌려 바닥을 찌르는 자세.”
오랜만의 AI 모드로 최지수가 대답했다.
“잘 기억하네. 그럼, 집중해라?”
각성이 문제가 아니라 구울을 잡을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지만. 위험하면 내가 죽이면 되니까.
“하나.”
취원보를 연속으로 운용하며 구울을 몰아세웠다.
구울이 달려드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둘.”
나는 구울에게 더욱 가까이 붙어 구울을 유인했다. 뱃가죽 아래에 달린 벌어진 입으로 침이 줄줄 흘렀다.
“셋!”
신호와 동시에 최지수가 발을 뻗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검세가 구울의 약점을 꿰뚫었다.
마핵이 파괴된 구울이 파들거리다가 늘어졌다.
짝. 짝. 짝.
내가 박수를 쳤다.
“이야. 이걸 잡네. 이 형이 구울도 잡아. 근데 괴물을 잡는다고 다 각성하는 게 아니…,”
최지수 이놈, 표정이 묘하다. 설마……?
“했어? 했냐?”
최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헐. 이게 되네. 이게 이렇게 되네.
하하하.
하하핳.
하하하하핳.
“…당연히 각성 못 할 줄 알고 아무거나 시켰는데.”
“어…, 사실 나도 진짜 할 줄은 몰랐다.”
최지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벅벅 머리를 긁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내 덜떨어진 대가리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멍청한 나놈! 고블린을 잡으라고 했었어야지!”
.
.
.
그리고 다음날 오후.
나는 다시 한 번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애들을 다그쳐 고블린 한 마리씩을 죽이게 만들어 주었으나, 단 한 명도 각성하지 못했으므로.
하하핳.
1%의 확률이 이렇게까지 지켜지다니.
“빌어먹을 확류우우울!!!! 아아아아아악!!!!!”
***
그리고 오 년 후.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단전에 자리한 기운이 내 의지에 반응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운기조식.
자연의 기운을 끌어 모아 제 몸의 기운으로 바꿔 내는 과정.
각성자들의 힘의 근간은 마력이다. 그들은 괴물을 죽이며 성장한다.
비록 나는 끝내 각성하지 못했으나…
아쉬울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다. 그저 지난 생과 마찬가지일 뿐.
후우우.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이내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공기 중에 섞여 있던 자연의 기운이 신주혈을 통과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부드럽게 기운을 인도했다. 신도혈을 거쳐 영대혈로, 영대혈을 거쳐 지양혈로, 근축과 척중을 거쳐…
명문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단전으로부터 흘러나온 웅혼하고 너른 내기(內氣)가 독맥을 타고 내려온 외기(外氣)와 뒤엉켰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기운이 느릿느릿 단전을 휘돌았다.
아직 온전히 합쳐지지 않은 기운을 기해로 인도했다. 댐의 수문이 열린 듯 도도한 강물이 열린 문을 통해 임맥으로 밀려들었다.
느껴지는 기운의 크기가 예전과 다르다.
드디어 나머지 열한 알의 자소단의 기운까지 완전히 흡수한 것.
이 정도 공력이면, 초절정의 초입.
첫 번째 생의 마지막에 닿았던 경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
나는 진기의 흐름을 유도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독맥에서 임맥으로, 충맥과 대맥을 거쳐 양교맥과 음…
으음?
“…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날이 열리기 전에 회개하셔야 합니다. 천신의 발 아래 엎드려 죄를 고하고…”
“됐습니다. 안 사요.”
어렴풋이, 김강산이 누군가와 투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시하고 운공을 이어갔다.
“형제님. 죄업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닙니다. 천신께서도 두 손을 피로 물들이시고…”
“됐다니까요. 왜 멀쩡한 사람 죄인 만들고 지랄이야.”
스릉. 팍. 스릉. 팍.
도를 뽑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넣었다가. 다시 뺐다가.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각성자 형제님. 각성이야말로 천신께서 내려주신 지고한 선물입니다. 그 힘을…”
“시발 신부님 새끼야. 어디 괴수들도 천신께서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지껄여 봐라.”
쯧, 김강산 이 녀석이.
나는 서둘러 기운을 갈무리하고 눈을 떴다.
예상대로 김강산이 왼손에 화염구를 띄우고 오른손으로 도의 손잡이를 쥔 채 현관문 앞에 서서 신부를 겁박하고 있었다.
“야. 김강산.”
“어? 림이 형. 운공 벌써 끝났어?”
김강산이 화들짝 돌아보며 은근슬쩍 도를 집어넣었다. 왼손 위에 올라 있던 주먹만한 화염구가 단번에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애가 철이 없어서 헛소리를 했습니다.”
나는 성큼성큼 신부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멀뚱히 보며 눈알을 굴리는 김강산의 뒤통수를 후려치자 녀석이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신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잠시 멈췄다.
“형제님의 얼굴에 천신의 은혜가 특히 충만하십니다.”
“네에. 그런데 천신님께서 얼굴에만 은혜를 내려주시고 경제적 은혜는 아직이셔서요. 보시다시피 저희가 매.우. 가.난.하여 천신께 공양을 올릴 사정이 못 됩니다. 후에 천신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꼭 공양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매우 가난’에 꽉꽉 힘을 주어 발음하며 김강산에게 눈짓을 했다. 녀석이 현관을 가리고 있던 덩치를 슬그머니 옆으로 치웠다.
신부가 문 안쪽을 훑었다.
헌옷 무더기. 걸레짝 같은 이불. 창틀만 남은 창문. 금이 간 벽.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합장을 했다.
“너무나다타불…….”
“아멘천신보살…….”
신부가 떠나갔다. 김강산이 닫힌 문을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형. 저 새끼 지금 보육원에서 돈 뜯어 낼려고 그 지랄 떤 거야?”
“저 새끼가 뭐냐. 종교인이잖아. 종교인.”
“시부럴. 신새끼가 진짜 있으면 내가 그 모가지를….”
퍽.
김강산이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이놈은 일 절만 하면 될 걸 꼭 사 절까지 지껄여서 매를 번다.
여전히 엄살이 심했다. 내력을 좀 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