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7화 (7/122)

7화. 멸하는 검, 지키는 검 (1)

사실 내 방인 대표실이 가장 허름할 뿐, 희망보육원은 꽤 잘 굴러가는 중이었다.

운동장 한쪽에서는 애들이 일미호 가죽을 방망이로 두들겨 널고 있었다.

운동장 가운데에서는 번쩍거리는 강철검을 쥔 애들이 최지수의 지도에 따라 구슬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원장을 죽이고 보육원을 정상화한 그날 이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떠나라고 했으나 애들은 아무도 보육원을 떠나지 않았다.

갈 곳 없는 고아들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 뒤로 일미호를 잡아 가죽을 가공해 팔면서 운동장 한 켠에 밭을 일궜다.

백 명 애들이 먹고 살기에 차고 넘치지는 않았으나 부족하지도 않았다.

각성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애들은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애들이 각성자의 도움 없이 하급 괴물의 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나는 감독들을 불러 놓고 해독약을 주었다.

사실 그냥 흙덩이였다.

그들에게 먹인 독환부터가 그냥 흙덩이였으므로.

남은 감독은 넷이었다.

내가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한 한 놈의 모가지를 날렸기 때문이다.

목숨이 아까워서인지 남은 네 명의 감독들은 썩 착하게 굴었다.

최지수를 데리고 다니며 버스를 태웠고, 애들 두세 명 분의 일을 해치웠으며, 괴물이 보육원을 습격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그래도 한 놈이 해독약을 받아먹은 뒤에도 남아 있겠다며 내 다리를 붙든 것은 좀 의외였다.

-원장이 열한 살에 저를 데려온 뒤로 줄곧 이곳에 있었습니다. 가봐야 제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대장님, 서림 형님… 진짜 착하게 살겠습니다……. 흐규흐규…….

처음 보육원에 나타났을 때부터 2미터를 훌쩍 넘겼던 덩치가 고작 열한 살이었다는 데에 한 번 놀라고,

놈의 잔류를 두고 진행한 전체 투표에서 90.2%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심지어 나머지 9.8%는 반대가 아니라 무효표였다.

-림이 너는 시간나면 틀어박혀 수련하느라 바빴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강산이가 알게 모르게 애들 많이 챙겨줬다. 애가 기본적으로 착해. 아픈 애들이 있으면 다른 감독들 몰래 당번을 빼주기도 했었지.

그게 김강산이었다.

애가 참…

놀랍도록 뻔뻔하고 수다스러우면서도 사교성이 좋고 개념이 없었다.

애들을 지켜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애를 키우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강산아. 김강산아.”

“눼엡.”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냐고. 할 일 없으면 밖에 나가서 쪼렙이라도 잡으라고. 아니면 애들이랑 같이 수련을 하든지.”

김강산이 볼을 부풀렸다.

“손님 오셔서 사무실로 모셔다 놓고 형 수련 끝나기를 기다리던 거거든.”

“손님? 의뢰?”

“엉.”

“뭔데?”

“농장 방어. 고블린 나온다니깐 지수 형이 가면 딱 좋을 것 같아서.”

***

농장은 성벽에서 서쪽으로 이십 분, 보육원에서는 사십 분 가량 떨어져 있었다.

일반인 열네 가구가 힘을 모아 일군 농장이었는데, 길드 농장이 아니다보니 근처에 괴물이 출몰할 때마다 피해가 크다고 했다.

-며칠 전에 고블린이 떼지어 농장을 습격했대. 일단 열흘, 농장에 상주해서 지켜 달라 더라고.

계약금 10돈에 완료 시 50돈.

애들이 한 달 먹어치우는 밥값이 1000돈이 훌쩍 넘으니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그래도 벌어야지. 땅 판다고 1돈이 나오지는 않으니까.

나는 돈의 노예가 되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

.

.

농장을 한 바퀴 도는 데 20분이 걸렸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2미터 정도 높이의 벽이 농장 주위를 감쌌고, 벽 곳곳에 초소가 세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농장이었다.

“여기에서 편하게 대기해주시다가 습격이 있으면 방어해주시면 됩니다.”

긴 머리를 올려 묶은 근육질의 아주머니가 초소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사장님.”

“아이고. 김희수라고 합니다. 편하게 부르세요.”

“네. 사장님. 인근의 상세 지도를 보고 싶습니다만.”

“아이고야. 그럼요. 곧 가지고 오겠습니다.”

우두커니 선 내 옆에서 최지수와 김희수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지수는 감독들을 따라다니며 매일 버스를 타고,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녔더니 쑥 쑥 성장했다.

덕분에 덩치는 이제 2미터를 넘어섰고, 마력 또한 강해져 어지간한 청응파 애들보다 나았다.

그 덩치 탓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최지수가 보육원의 대표라고 오해하고는 했다.

나는 굳이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귀찮게, 뭐하러 그래.

돌아온 김희수가 불안한 얼굴로 나를 힐끔거리며 지도를 내밀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룡 일대, 충남 일대 지도보다 훨씬 세밀하게 표시된 엄암리 일대 상세 지도였다.

나는 농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적혀 있는 <고블린 소굴>을 손으로 짚었다.

“이렇게 가까이 고블린 소굴이 있는데 왜 여기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처음에는 없었제. 그니깐 이짝에 자리를 잡았제라. 사실 땅은 능소리 쪽이 훨씬 좋은디 말여.”

“언제 생겼는데요?”

“작년부턴가… 그랴도 처음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디 올해는 정말로 습격이 잦네.”

작년이라…….

김희수가 나를 힐끔거리더니 덧붙였다.

“근디 잘생긴 총각도 각성자여?”

“네에.”

적당히 대꾸하자 최지수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그렇군요. 저희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올라가겠습니다.”

“아, 예에. 이따 식사는 위로 올려다 드리면 되것제라?”

“네. 그러시면 감사하죠.”

김희수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곧 일렁이는 초록빛 물결의 너머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대로 걸어 농장을 빠져나왔다. 논에 파묻혀 일하던 사람들 몇몇이 나를 힐끔거렸으나 아무도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수레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도로는 농장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림아. 확실히 요즘 자질구레한 의뢰가 늘었다. 성 안 상황 때문이다.”

“요즘 계룡은 어떤데? 임압파는 이제 완전히 망했나?”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계룡은 십 년 넘게 청응파와 임압파, 곡사파가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 봄 임압파 회장이 성벽 방어 도중에 사망한 후 세력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곡사파는 회장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던 임압파를 급습했다.

임압파의 많은 각성자들이 죽었다.

임압파의 구역이 곡사파로 넘어갔다.

그리고 지난겨울,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직후 청응파의 회장 나문덕이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면서부터 청응파도 곡사파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계룡성벽 안 이곳저곳에서 날마다 크고 작은 다툼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성벽 바깥 주민들이 알음알음 우리 보육원을 찾아들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가끔씩 성벽 안 주민들까지 보육원에 찾아들었다.

저들끼리 치고박고 있으니 성 바깥의 괴물들이 날뛰는 것은 당연지사.

가욋돈을 버는 건 나쁘지 않으나 이러다 괴물의 대규모 습격이라도 발생하면 까딱하다가는 큰일이었다.

쓰러진 나문덕을 대신해서 임시 회장이 된 가기석은 곡사파의 전쟁(그는 이 개싸움을 전쟁이라고 불렀다.)에 손을 빌려달라며 사정사정을 했다.

-여기 보이시죠. 사람 죽이는 일 제외하고,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도 서림아. 그거는 우리 관계가 이리 끈끈해지기 전이고야. 그때랑 지금이랑 같냐?

-뭐가 다른데요.

-형제지야! 우리가 함께 잡은 괴물이 수천이야. 우리가 언제 보육원 지원에 늦은 일 있디?

-늦었다면 저는 계약을 파기하고 곡사파와 계약했겠죠.

-서림아! 서림아아앙…!

나는 잊지 않았다.

그들은 원장이 있던 시절에도 보육원을 지원했었다.

보육원 안이 어떤 지옥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도.

가기석의 말대로 함께 수많은 괴물을 해치우기는 했으나, 그건 그저 계약 관계일 뿐.

“지수 형. 곡사파는 좀 알아봤어? 거기랑 계약하는 게 더 나으려나?”

최지수가 눈을 왈칵 찌푸렸다.

드물게 격한 표정 변화였다.

“거기 알아보니 완전 악질이더라. 인신매매, 매춘알선, 마약 제조 및 판매, 보호세 걷어서 일반인 등쳐먹고, 의뢰비 후려치고. 자세히 설명하자면…….”

“됐어. 대충 알겠네.”

“그래? 이거 자세히 들으면 림이 너도….”

“아니. 거기랑 계약 안 한다고. 나는 기껏해야 청응파랑 비슷한 수준일 줄 알았지.”

“절대 아니다. 림이 네 표현대로 하면 청응이 소악(小惡)이고, 곡사는 거악(巨惡)이다.”

“거악이라…….”

***

녹색으로 뒤덮인 벌판을 오 분 정도 걷다가 네 마리 구울과 마주쳤다. 시체를 뜯던 구울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최지수가 검을 네 번 휘두르자 네 마리 구울이 여덟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비를 맞으며 좁은 굴 앞에 다다른 것은 인간의 시체와 구울의 사체를 넘어 십 분을 더 걸은 후였다.

담장 안에서 우두커니 습격을 기다리기보다 소굴을 털어버리는 편이 현명하다. 시체가 되면 다시는 습격하지 못할 테니까.

기감을 돋우자 쉑쉑거리는 고블린 특유의 쇳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김희수의 말과 달리 백 마리는 훨씬 넘는 듯했다. 백오십? 이백?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빗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멀어졌다.

의지가 움직이면 기운이 뒤따른다.

기운이 천천히 단전의 바닥을 휘돌기 시작했다. 세맥에 흩어져 있던 기운들이 의지의 부름에 따라 단전으로 모였다.

물줄기가 단전을 따라 타원을 그리며 맴을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기운의 흐름이 겹쳐 겹겹의 타원이 된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뒤에 일어난 기운이 앞의 기운을 떠밀고, 먼저 일어난 기운이 뒤따르는 기운을 잡아끈다.

겹겹이 쌓인 기운이 소용돌이가 되어 휘몰아쳤다. 태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거센 바람이 단전을 무서운 속도로 휩쓸었다.

겹겹이 쌓인 타원형의 바람, 그 바람의 중앙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삼반공(三反攻)의 1절, 적(積).

무형(無刑)을 쌓아올린 유형(有形)의 기운.

단전에 뚜렷하게 형체를 갖춘 부드러운 기운을 선명하게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몰아치는 기운을 느꼈는지 고블린들이 쉑쉑거리며 굴을 뛰쳐나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검자루를 양손으로 쥐었다.

단전에 자리하고 있던, 적(積)으로 형성한 유형의 기운이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올라 검날을 통과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기운이 검끝으로 모여들었다.

메추리알만한 동그란 구슬이 검끝에 맺혔다.

-쉬익! 쉬익!

-쉐이크쉑!

거세게 어깨를 젖혔다. 잔뜩 잡아당긴 활시위처럼 몸이 팽팽하게 휘었다.

젖혔던 몸을 단번에 접으며 검을 휘둘렀다. 하얗게 빛나는 강기(剛氣)가 동굴 입구를 향해 총알처럼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수류탄 열 개가 한꺼번에 터진 듯한 폭발.

돌진하던 고블린들이 등 뒤의 폭발에 휩쓸려 허공을 날았다.

그 폭발 속으로, 검을 뽑아 든 최지수가 뛰어들었다.

동굴 속에서 폭음과 괴성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바깥의 놈들을 하나씩 격살했다.

검처럼 뾰족한 놈의 오른손을 검으로 빗겨 막으며 가슴께를 향해 낭수권(螂手拳)을 내질렀다.

권기 두른 손날이 고블린의 질긴 가죽을 단번에 꿰뚫고, 마핵이 있던 자리에 주먹 너비의 구멍이 뚫린 고블린이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쉬익! 캭!”

검 하나에 고블린과,

“쉑이크쉑!”

검 하나에 쉑쉑버거와,

“캬아아… 캬아아…….”

검 하나에 사이다 한 캔, 아니, 고블린 한 마리.

아아.

어머니. 나는 검 하나에 아름다운 소리 한 마디씩을 붙여 봅니다.

콰앙. 퍽. 팍팍. 쿠웅. 쿵. 칙. 딱.

삼십 분이 지날 무렵, 먼저 달려든 고블린 십수 마리와 폭발을 피해 도망친 수십 마리, 그리고 반쯤 무너진 동굴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나머지 백여 마리 고블린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어때, 형. 경험치 좀 먹었냐?”

최지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하급괴물은 아예 소용이 없는 것 같구나.”

“새 발에 피 만큼도?”

“그 정도는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찐득한 진녹색 체액을 온몸에 뒤집어쓴 우리는 다시 풀숲을 걸어 들판을 통과했다. 내리는 비가 고블린의 체액을 얼마간 씻어 주었으나 충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 옷이… 이, 이게 다 뭡니까?”

“고블린 소굴은 이제 없습니다. 가서 확인해 보시지요.”

김희수가 놀라 말을 더듬었다. 내가 덧붙였다.

“고블린 애들이 모아둔 게 많더라고요. 사람 서넛은 데려가세요.”

“아니… 농장을 지켜달랬더니… 서식지를 박살을…….”

김희수는 골칫덩이를 해결해줘서 감사하다며 처음 계약한 잔금 50돈의 다섯 배인 250돈을 지불했다.

물론 그 와중에 약간의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거치기는 했으나, 지금까지 골머리 썩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그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보육원에서 십 분 가량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세 줄의 신호탄이 파란 가을 하늘을 세로로 갈랐다.

보육원에서, 청응파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신호탄.

3단계 위험. 당장 지원 필요.

“림아…! 지금 안에는……!”

최지수의 황급한 목소리가 단번에 멀어졌다.

내 몸이 총알처럼 보육원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