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멸하는 검, 지키는 검 (2)
내 실책이다.
보육원을 나서기 전 근처의 마기를 확인하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방심해 버렸다.
김강산의 말대로 최지수만 보내 열흘 동안 농장을 지키게 했어야 했는데.
보육원에 남은 각성자는 김강산 하나.
만약 담장을 돌파당했다면, 한두 명의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을 터.
기운을 한껏 끌어올려 경공을 시전해 내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끌어올린 기감에 괴물의 기운이 잡혔다.
보육원과는 약간 떨어진 장소.
반면 보육원은 고요했다.
함정과 담장, 쇠뇌까지 설치한 보육원이 방어를 하기에는 훨씬 나은 조건이다.
하지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일부러 버렸구나. 이 멍청한 새끼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뺨과 팔을 스치고 뒤로, 뒤로, 물러났다.
아주 오랫동안 달린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드디어, 시야의 끝에 괴물 무리가 들어왔다.
삼미호 일곱 마리, 오미호 세 마리.
열 마리의 미호가 원을 그리며 중앙을 노리고 있었다.
원의 중앙이 원통 형태로 타오르고 있었다.
3미터 높이의 화염벽.
그리고 그 안에 김강산이 있다.
나는 즉시 바닥을 걷어차며 검을 뽑아들었다.
“여기 봐라, 이놈들아!”
외치는 순간.
화염벽이 잦아들었다. 오미호 두 마리가 곧 사라질 화염벽의 안쪽으로 도약하려 몸을 움츠렸다.
삼미호 두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나머지 미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비틀어 앞발 하나를 회피하고.
검을 우하향으로 휘둘러 꼬리 하나를 베어내고.
바닥에 스치듯 상체를 낮춰 한 놈의 배때지에 검을 꽂아 넣었다.
거의 투명해진 화염벽을 향해 오미호 두 마리가 뛰어들려는 찰나.
내 손에서 떠난 검이 허공을 수평으로 갈랐다.
검기로 희게 빛나는 검이 오미호 하나의 목을 꿰뚫고 반대쪽으로 빠져나와 두 번째 오미호의 등줄기에 꽂혔다.
청운보(靑雲步)의 보법을 밟자 공간이 우그러든 듯 단번에 거리가 좁혀졌다.
내 머리를 내리치려는 앞발을 오른쪽으로 피하며 그 다리에 팔을 뻗었다.
콰아아!
폭음이 울리고 갈기갈기 찢긴 살점이 허공을 날았다.
소림의 강권, 아라한선장(阿羅漢仙掌).
나는 호신강기를 일으킨 채 폭발 속으로 쇄도해 소멸하기 직전인 화염벽의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형.”
김강산은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박살났고 두 다리도 온전치 않았다.
목숨이 달려 있는 게 신기할 지경.
나는 김강산을 들춰 업고 전력으로 경공을 시전했다.
***
청응파의 박명칠이 다섯 명의 팀원을 이끌고 보육원에 도착한 것은 신호탄을 올린지 이십 분이 지난 후였다.
즉, 완전한 뒷북이었다.
나는 그 사이 김강산을 보육원 담장 안으로 던져넣고,
내 뒤를 좇아온 미호떼를 보육원에서 떼어놓기 위해 단검으로 팔뚝을 내리그어 피를 뿌려대며 갔던 길을 되짚어 내달리고,
오미호의 몸뚱이에 꽂힌 검을 회수해 검기와 검강을 뿌려대고,
가진 내력이 모두 바닥나도록 검을 휘둘렀다.
한 마리 오미호와 두 마리 삼미호가 남았을 때 최지수가 합류했고.
열 마리 미호들이 다 바닥으로 쓰러지고 오 분이 지난 후에 청응파가 도착했다.
박명칠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지껄였다.
“죄송합니다, 림 씨. 요즘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 죽은 시체더러 죄송하다고 종알대면 살아나보지? 어디 나도 네놈 대가리 한 번 베어내 볼까? 목 잘린 시체에게 죄송하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머리가 펄펄 끓는 것 같았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갔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해했다. 아마 그들도 최선을 다해 달려온 것이리라.
박명칠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보이기는 했다. 했으나…
도무지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희생자는….”
“김강산에게 고마워하라고. 저 새끼 죽었으면 청응파도 끝이었을 거니까.”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힐링포션 스무 개를 모두 쏟아 부어 김강산의 목숨을 겨우 붙여 놓았다.
박명칠이 데려온 회복술사가 반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김강산 옆에서 마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만약 김강산이 죽었더라면 그들 역시 몸 성히 나가지는 못했을 터.
가장 화가 나는 대상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시 내쉬었다.
오래 전 목소리가 마치 어제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약조하십시오. 제가 떠난 뒤에도 지키는 검을 놓지 않겠다고. 사형은 종종 허명에 휘둘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소화야. 대체 내가,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 거냐. 이 세계는 그때와는 너무 달라. 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소화가 옅게 웃었다.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힘 닿는 곳까지 해야지요.
불길처럼 타오르던 분노가 느릿느릿 수그러들었다.
나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내 눈치를 살피는 박명칠을 향해 말했다.
“청응파와의 계약은 오늘로 끝입니다. 돌아가서 부회장인지 회장 대리인지 하는 놈에게 그렇게 전하세요.”
“서림 씨.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다시… 정말로 이번에는 곡사파 때문에…!”
“그래서 계약 종료하겠다는 겁니다. 사파 새끼 하나 때문에 쩔쩔매는 문파 믿고 협업 못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곡사파에게 의뢰를 맡기겠다는 말입니까?”
“내가 대답을 해야 합니까?”
박명칠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림 씨는 분명 강하죠. 하지만, 서림 씨의 몸은 하나입니다.”
알고 있다.
박명칠이, 협박이 아닌 충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
박명칠은 회복술사가 김강산의 치료를 마치기를 기다려 돌아갔다.
“림이 너… 강산이 싫어하지 않았었냐?”
최지수는 놀란 듯 염려하는 듯 기쁜 듯 기묘한 얼굴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아끼는 줄은 몰랐는데? 으응?”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까 분명히 뺨이 축축했는데에?”
“땀이라고, 땀. 내가 얼마나 뛰댕겼는데. 발바닥에도 땀 났다고.”
밖에서 눈치를 살피던 애들이 분위기가 수그러진 것을 느꼈는지 김강산 옆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강산이 형 팔이랑 다리가 진짜 다시 자라? 몸뚱이밖에 없는데?”
“멍청아. 각성자잖아. 힐 받으면 낫는다니까.”
“림 오빠. 산이가 미호 유인했어. 담장을 끼고 싸우는 게 더 유리한데 말이야.”
“우리도 열심히 훈련 했는데… 같이 싸우자고 했는데……. 위험하다면서, 흑……!”
결국 몇몇이 눈물을 흘렸다.
애들은 김강산에게 안정이 필요하다는 회복술사의 말을 들먹이고 나서야 겨우 방 밖으로 나갔다.
***
김강산은 꼬박 하루를 정신을 잃은 채 끙끙 앓았다.
이틀째부터, 잘려나간 단면으로 단풍잎 같은 손바닥과 애기 발처럼 뽀얀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꽤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리미 횽아. 우러쪄요? 사니 주글까바 우러쪄요?”
“진짜 죽어볼래? 한 번도 안 죽어봐서 죽음이 좀 궁금하지?”
“형, 나 환자야, 환자! 손 좀 내려놓고……!”
커다란 몸통에 매달린 신생아의 팔과 다리를 흔들어대며 혀 짧은 소리를 지껄이는 김강산은 얼마 없던 정신조차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나는 덕분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김강산의 새 팔과 새 다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최지수는 그 사이 부지런히 계룡의 세력 판도에 대한 정보를 실어 날랐다.
그 정보 중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도 있었다.
“아침에 정찰했을 때만 해도 근처에 괴물이 없었는데 갑자기 미호 무리가 들이닥친 점이 이상해서 조사를 해봤다.”
나 역시 그점이 수상쩍었다.
짐작가는 바는 있었으나…….
최지수가 썩은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살점이 뭉개져 뼈가 드러났으나 확실히 인간의 일부였다.
“미호 서식지로부터 대략 300미터 간격으로 이걸 놓아두었더구나. 보육원까지 이어지더라. 그날 그 근처에서 목격된 사람은….”
“곡사파겠지.”
“그래. 너와 청응파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는지, 아니면 그저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유 따위는 이제 상관없어.”
최지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강산의 부상 후 보름이 지났다.
“강산아.”
“예압.”
“확실히 멀쩡하지?”
“방금 직접 확인하시고 뭘 또 그러십니까.”
“그래, 가자.”
“어디를? 뭘?”
김강산이 쌍꺼풀이 진 눈을 끔벅끔벅했다.
“거악 때려잡으러.”
***
곡사파는 엄사동에 있었다. 돈 좀 만지는 각성자나 그들의 가족들이 사는 동네였다.
도로도 부서진 곳 없이 깔끔했다. 낮은 건물들 사이 어두운 골목은 시체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므로 그 시체를 뜯어먹는 구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깔끔한 길을 걸어 3층짜리 건물 앞에 섰다.
보육원도 요즘 고친다고 고쳤으나 눈앞의 건물에 비하면 무너지기 직전 가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원래 멀쩡했는지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삐까뻔쩍하다.
“여기가 곡사파냐?”
“그래.”
최지수가 냉큼 대꾸했다.
“형한테 물은 거 아냐.”
“그럼?”
“그냥 해 보고 싶었어.”
아쉽게도 내 질문을 들을 문지기들이 없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들어올리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이내 낡은 강철검의 날이 희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기(劍氣)로 휩싸인 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다시 수평으로. 다시 수직으로. 마지막은 상단 수평베기.
터엉. 텅.
네모지게 잘려나간 철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뻥 뚫린 구멍으로 당황한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어떤 새끼야!”
“침입자다, 위에 보고해!”
“열려 있는 문 망가뜨리는 또라이다!”
열려 있었으나 망가져버린 문을 밟고 발을 내딛었다.
건물 안쪽은 길게 뻗은 좁은 복도 옆으로 방들이 연결된 구조였다.
각양각색의 무기를 쥔 놈, 놈, 놈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복도를 채웠다.
그 중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졸개1이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청응파냐?!”
“아니.”
“그럼, 입암파의 찌끄레기구나!”
“아닌데.”
나는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계룡문이라고, 모르냐?”
최지수와 김강산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림아? 우리가? 계룡문?”
“형, 나도 처음 듣는데?”
지금 만들었으니 처음 들었겠지.
그렇다고 굳이 거기서 되물을 것까지야.
“감히 계룡문 따위가 우리 곡사파를 공격하다니 무사히 살아 나갈 생각은……!”
퍼버버벅.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돌 맞은 개구리처럼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입에 뽀글뽀글 거품을 문 녀석은 사지를 부들거리다가 정지했다.
“뭐야! 지금 뭘 한 거야?”
“상급 각성자다! 회장님께 알려!”
교금보(敎禽步)로 전진해서 두두타권(頭頭打拳)으로 대가리를 네 대 패고 취원보(醉猿步)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아마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싶다.
몇 놈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어기 뒤쪽에서 덩치가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는 놈은 나한테 뒈진다! 그래봐야 셋뿐이다! 한꺼번에 덤벼라!”
네가 이곳의 대가리구나.
최지수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이내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졸개2가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단도를 들어올렸다. 명치와 양쪽 겨드랑이, 복부가 모두 텅 빈 어설픈 공격이다.
보법을 밟을 필요도 권술을 활용할 필요도 없다.
지나치게 수준 차이가 크면 오히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법.
나는 주먹을 뒤로 젖혔다가 빠르게 내질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네 번의 연타가 명치와 복부에 두 방씩 꽂혔다. 녀석이 휘두르려던 단도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뒤이어 졸개3이 철퇴를 횡으로 휘둘렀다. 왼발로 무게중심을 옮겨 가볍게 회피하고 손날로 목과 등줄기를 후려쳤다. 녀석이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최지수가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복도 양쪽의 시멘트 벽이 무너지며 서 있던 놈들을 한 번에 덮쳤다.
김강산이 평온한 목소리로 최지수에게 물었다.
“형. 이러다가 건물 무너지는 거 아냐?”
“철골은 안 건드렸다. 아껴야지. 이제 우리 건데.”
그럼. 우리 것이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