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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화 (10/122)

10화. 그냥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신생 조직이 곡사파를 박살냈다는 소식은 다음날 정오가 되기 전에 계룡성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말이 되는 소리나 하라며 의심하던 사람들도 곧 그 소문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곡사파의 왈패들이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와서, 그 동안 밀린 대금을 치르고 그 동안 죄송했다며 무릎을 꿇고 몇 번이나 바닥에 이마를 찧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그 계룡 어쩌고가 착하게 살라고 했다잖아.

-계룡 어쩌고가 뭐야! 내가 계룡의 검이 되겠소, 몰라? 계룡문이잖아! 내가 각성만 하면 바로 계룡문 입문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슬금슬금 불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인을 모두 성 안으로 이주시킨다는데?

-쯔읏. 계룡의 검이라더니… 야인이 계룡 사람이냐고.

들썩이는 민심을 안정시키느라 최지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존에 심어 놓은 정보원들을 총출동시켰고, 성으로 이사를 완료한 보육원 애들까지 동원했다.

-지낼 곳은 어쩐답니까? 사람들이 그리 많아지면 치안 유지가 어려울 낀데.

-널려 있는 게 빈 집인데 뭐가 문젭니까. 곡사파가 해체된 뒤로 치안도 아주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래도 야인들은 거칠다던데요. 우리 동네로 이주하면, 우리는 애들도 있는데 좀…….

-나는 곡사파 그놈들을 못 믿겠네. 그놈들도 계룡문으로 들어갔다지 않은가. 똥개가 따로 있겠어? 똥 묻으면 똥개 되는 거지.

-지금 계룡문이 곡사파랑 같다는 소리야? 사람이 쉰소리를 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지만 물은 순리대로 흐르는 법.

결국 불만의 소리는 사그라들었다.

-그 동안 바깥사람들이 1차로 총알받이가 되어 습격을 막아 주니껀 좋았는겨? 그게 없어져서 아쉽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려.

-아재. 말씀이 심하십니다.

-뭐시가 심하다는 겨? 허삼례가 내 아들을 죽였을 때는 조용하던 인간들이. 계룡문 대표님께서 이렇게 원수를 갚아주시고, 위로금까지 주시니 이런 분이 또 어디 있다고 그려?

최지수는 면밀하게 민심의 흐름을 살피며 서림과 세워놓은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산더미만큼 쌓인 입문신청서를 하나하나 검토하고 적절한 각성자들의 입문을 허가했다.

정하영을 비롯한 보육원의 원생들이 팔을 내걷고 도왔으나 그것만으로도 일주일이 걸렸다.

전 곡사파와 사라진 줄 알았던 전 입암파 출신들이 모두 계룡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보름이 지났을 때 청응파의 임시 회장 가기석이 청응파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회장 나문덕이 의식을 차릴 때까지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으나, 왜 병석에 누웠는지도 밝히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한 미래의 얘기였다.

최지수는 팀을 구성하고 각 팀에 인원에 배치하는 일로 또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그렇게 계룡문의 조직 구성이 완료될 즈음.

-이봐, 들었어? 계룡문에서 각성 페스티벌을 운영한대!

-각성 페스티벌이라니…? 그런 게 되는겨? 가능혀?

-그러엄! 우리 대표님이 어디 헛말 하실 분인가.

-내가 안내문 받아 왔지. 자, 들어봐. 하급괴물을 잡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3주 속성 훈련 프로그램. 계룡문의 각성자가 안전을 보장하는 하급괴물 사냥. 각성하면 계룡문 입문 자격 부여.

-우리도 이제 각성자 될 수 있는 거야?

-쩐다. 쩔어…!

페스티벌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만 명의 참가자는 가혹한 훈련이 끝날 때쯤에는 팔백 몇 명으로 줄어들었다. 예상대로였다.

그 중 아홉이 각성을 했다.

흙속성 둘. 불속성 넷. 물속성 셋.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신참들이었다.

각성자는 제 마력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유형으로 성장하기 마련.

괴물과 직접 맞붙는 데에 집중하면 마력에 의해 신체능력이 강화된 전사가 되고,

화염구나 화염탄, 얼음창이나 회복, 석벽 따위의 속성활용에 집중하면 술사가 된다.

아홉의 신참은 모두 계룡문 입문을 희망했다. 최지수는 그들을 팀에 배정하고 또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치웠다.

그 동안 서림의 얼굴을 본 횟수는 손에 꼽았다.

‘림아……. 또 어디로 간 거냐.’

서림은 보육원의 이사를 마친 뒤 잠시 바깥에 다녀오겠다며 계룡성을 떠났다.

그리고 보름 뒤에 돌아왔다. 서림은 평소처럼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으나 두 뺨이 창백했다. 실핏줄이 터진 흰자가 붉었다.

-별 일 없지?

별 일은 물론 산더미였다.

그 동안 거의 방치 상태에 있던 계룡성의 방어 상황을 점검하고, 새로운 방어 체계를 만들고, 인력을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이 수월할 리 없었다.

하지만 최지수는 어디에 다녀왔느냐는 질문마저 다음날로 미루고 일단 들어가 좀 쉬라며 서림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또 서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로 보름이 지났다.

사흘이나 나흘, 닷새에 한 번씩 서림은 계룡에 들렀다가 또 훌쩍 떠났다.

-형. 별 일 없지? 주변 괴물들도 별다른 움직임 없고?

-그래. 너야말로 어디를 그렇게 다니냐.

-뭐…, 그냥.

그냥이라니.

최지수가 아는 서림은 절대 ‘그냥’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림의 행동에는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두 가지, 세 가지…

겹겹이 얽힌 목적을 한 번 행동으로 이루는 사람이 서림이었다.

최지수가 캐묻지 않은 이유는,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

서림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았다.

일반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엄청난 무력부터가 최지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훨씬 어렸을 적, 서림이 오래 시간을 들여 설명했던 ‘기운’을 최지수는 아무리 노력해도 느낄 수 없었다. 모두가 그랬다. 보육원의 모든 원생들이 서림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보의 신뢰도가 아주 의심스러운, 구시대의 무협소설을 힘들게 구해 읽은 것도 서림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물론 헛수고였다.

하지만 서림은, 서림 자신이 말하듯 분명 각성자가 아니었다.

그 압도적인 무력을 보통의 일반인이라고 여길 수는 없지만…….

미호 떼가 보육원을 습격했을 때 김강산을 구하며 부러진 서림의 팔이 회복되는 데에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전에도, 그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림의 몸은 일반인의 그것. 각성자와 달리 회복술사의 힐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 팔이 잘려기라도 하면, 아마 온전히 회복하기는 어려울 터.

그러면서도 가장 앞에 서서 뛰어들고, 검을 휘두른다.

서림의 등을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최지수는 버거웠다.

버거웠으나 편안했고, 죽을 듯이 힘들었으나 더없이 즐거웠다.

최지수는 사흘 전 보았던 서림의 창백한 안색을 떠올렸다.

‘언제까지고 등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어. 림이가 혼자 짐을 지도록 둘 수는…….’

스스로에게 뇌까리며 최지수는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계룡문의 본부는 전 곡사파의 건물이었다.

식당은 건물의 1층에 있었다.

시끌벅적하다 못해 걸쭉한 욕설과 가끔 주먹질까지 오가는 평소와는 달리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음이 거의 없었다.

최지수는 걸음을 서둘렀다.

열려 있는 나무문 사이로 식당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식당을 빼곡하게 메운 긴 테이블의 한쪽만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빙 둘러선 계룡문의 문도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쟤가 서림입니까, 팀장님?

-이 새끼가 뒤질라고. 대표님이시다, 대표님.

-아, 대표님. 말은 많이 들었지만 미모가 존나 끝내주네요.

-방금 봤지? 성질머리는 와꾸보다 훨씬 끝내주셔.

눈에 익은 전직 청응파 문도가 옆에 선 이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림이었다.

서림의 옆에 두 명의 덩치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두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었다.

텅 빈 테이블의 한가운데에 앉은 서림이 태연한 얼굴로 식판에 담긴 음식들을 쓸어 넣는 중이었다.

최지수를 발견한 서림이 번쩍 팔을 들어 휘저었다.

“지수 형! 밥 먹으러 왔어?”

***

만들어 놓고 발길도 못하고 있던 내 계룡문의 식당에 처음으로 방문한 나를 맞아 준 것은 철없는 애새끼들의 싸움박질이었다.

-더러운 곡사파 새끼가!

-입암파의 찌그레기 주제에……!

다른 애들이 나를 알아보고 서둘러 길을 비켰으나 서로 주먹다짐에 여념이 없던 두 애새끼는 미처 나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퍼벅. 퍼버벅.

어쩌겠어.

대표로서 신성한 식당에서 주먹질을 하는 두 애새끼의 대가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줄 수밖에.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서로 너 죽고 나 살자 하며 드잡이질을 하던 애새끼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으니 당연히 예견된 결과였다.

“그래. 요즘 다툼이 잦아. 하루에 너덧 번씩은 발생한다. 주로 입암파나 청응파 출신이랑 곡사파 출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로 최지수가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 고생 깨나 한 모양이었다.

최지수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가 벌떡 일어나 대표실의 문을 닫았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멀어졌다.

“림아. 오랜만이다.”

“그런가? 이번에는 빨리 왔는데.”

“아니, 거기 앉아있는 것 말이다.”

계룡문의 대표실.

최지수의 말대로 이곳에 들어오기는 오랜만이었다. 그 동안은 계룡에 들러도 주변 괴물들과 방어 상황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금방 떠나기 바빴으니까.

지난 한 달 남짓,

나는 전생의 인연을 찾아다녔다.

현생의 인연에 밀려 미뤄두었던 일이었다.

자소단의 기운도 다 흡수했고, 계룡의 세력도 통합했고, 비교적 안전한 성벽 안으로 보육원 이사도 마쳤다.

겨울의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까지 몇 달의 여유가 있었다.

먼저 향한 곳은 원주였다.

30년 전 한지혁이 살았던 도시였다. 단 하나뿐인 가족인 엄마와, 형제나 다름없는 남지호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각성을 했을지도 모른다.

안전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계룡으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한지혁의 아들이라고 할까? 그리고 아들이라기에는 조금 어리지. 아니, 아니지. 한지혁 그거 모솔인데 뭔 아들이냐. 그 새끼는 게임이나 쳐하고… 아. 그게 나였지. 아이, 씨. 뭐라고 해?’

뭐라고 말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를 마주하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혹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나는 조금 두려웠고, 조금 들떴다.

그러나.

한지혁의 엄마가 운영하던 작은 쌀국수집은 균열에 삼켜져 흔적조차 없었다.

-어이구… 무슨 일이래. 잘생긴 총각이…….

지나가던 아지매 하나가 나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거렸다.

나는 뒤늦게 뺨이 축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살에 죽은 김은명이 살던 서울에는 가볼 필요도 없었다. 국적 모를 폭격기가 서울의 하늘을 지난 그날, 김은명의 가족도 함께 죽었으니까.

여섯 살 박승주가 살던 마을도 마찬가지.

박승주의 가족은 박승주보다 먼저 죽었다. 마을에 퍼진 전염병인지, 당시의 유언비어대로 KKK단이 퍼뜨린 암독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나는 열 오른 어린 손으로 가족의 시체를 화장하고 빈 집에서 홀로 죽었다.

한 달.

앞선 세 번의 삶이 남긴 흔적을 확인하는데 들인 시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미뤄뒀던 할 일을 마쳤는데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휑하다.

최지수의 시선이 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다.

그렇다고 지난 한 달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슬그머니 화제를 바꿨다.

“애들이 서로 드잡이질을 해대는 거 말야.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말야. 형이….”

“림아.”

그리고 실패했다. 원래 말 끊는 건 내 역할인데.

“나는 그저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 네가 어디에서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에이. 괜찮다니까. 내가 괴물 기가 막하게 알아차리잖아.”

최지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나는 쉽게 이해했다.

오래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던 이가 있었으므로.

-혼자요? 누구 맘대로 혼자요? 나도 갈 거요.

‘그때 설표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사형 때문이 아니라고요. 아, 사매 때문도 아니라니깐? 생각해 보니깐 나쁘지 않아. 나도 중원에 이름 좀 날려 보려고요. 혹시 압니까? 마교놈들을 다 때려잡으면 나한테도 월악검협 같은 그럴싸한 별호가 붙을지.

-월악검협 같은 소리 하네. 흔해빠진 질풍검 주제에. 아주 배때지가 불렀지, 니가.

-어? 지금 내 명성이 사형보다 높아질까봐 그럽니까?

끝까지 설표를 막지 않았던 이유는 그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나를 믿어서였다.

섣부른 자신감이었다.

마교도의 기세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설표는… 결국 설표는…….

내 빰에 닿는 최지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뒤이어, 깊은 한숨을 내쉰 최지수가 오른 눈썹을 실룩이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네가 원했던 명단을 정리해 두었다.”

최지수가 가장 아래 서랍을 열어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표지를 넘기자 최지수의 길쭉한 필치가 눈에 들어왔다.

“1차 블랙데이 직후, 균열을 연구했다고 알려진 연구원들이다.”

“오오. 역시 내 지수 형.”

“근데 이걸로 뭘 하려고 그러냐. 보다시피 그 사람들 대부분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 혹여라도 또 폭력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는 거라면…”

“에이, 형도 참. 누가 들으면 내가 깡패인 줄 알겠네.”

최지수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넘기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인가.’

***

유성길드 산하 유성연구소의 1팀 팀장 여준후는 어두컴컴한 골목을 걷고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 아래에서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볍게 뛰어오른 복면인이 여준후의 등줄기를 가볍게 쓸었다.

이내 딱딱하게 굳은 여준후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이 씨. 더럽게 무겁네.”

투덜거린 말과 달리 복면인은 여준후를 한 팔로 가볍게 들어 올려 옆구리에 끼었다.

복면인이 바닥을 가볍게 걷어찼고, 둘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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