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MM 연구소 (1)
여준후는 유성길드의 실세 중의 실세, 감찰단 석민혁 단주와의 저녁 식사를 만족스럽게 마친 참이었다.
-이번에 1팀에서 새로 개발한 5세대 마력증폭제의 효과가 탁월하더군요. 각성자용 수면제 개발에도 성공하셨다고요. 역시 여 박사님께서 연구소 최고의 인재십니다.
-어이구. 과찬이십니다. 모두 단장님께서 믿어 주신 결과지요.
-이런 유능한 인재를 고작 팀장에 머무르게 하다니…….
석민혁이 은근한 어조로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여준후가 침을 꼴딱 삼키며 오른손으로 제 술잔을 쥐고 왼손으로 그 아래를 받쳤다.
-저도 각성자지만, 감찰단을 맡고 있다 보니 각성자들의 제어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힘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보니. 그런 의미에서 팀장님께 거는 기대가 큽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단주님.
-길드장님께서는 각성자용 약물 개발에 소극적이시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그러믄입죠. 저도 적극 동의합니다. 제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활성제를 활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고…….
석민혁과는 항상 생각이 잘 맞았다.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는 다른 각성자들과는 달랐다.
각성자들의 존재는 필요했다. 그들이 없다면 언제 괴물의 밥이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딱 그 정도였다.
‘예전 시대였다면 그런 자리는 꿈도 못 꿨을 새끼들이.’
대전에서 가장 컸던 병원이 그의 할아버지의 소유였다. 1차 블랙데이가 일어났던 때, 여준후는 의대 3학년이었다. 그의 미래는 12차선 고속도로였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병원장이었던 할아버지와 의사였던 아버지는 1차 블랙데이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여준후는 연구원이 되어 바뀐 세상에 적응했다.
‘석민혁이가 차기 길드장이 된다면……!’
유성길드의 2대 길드장인 지남천이 곧 은퇴하리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현재로서는 감찰단 단주 석민혁이 가장 유력한 길드장 후보였다.
‘그랬다가 화공자가 길드장이 되면? 아니, 아니지. 화공자는 너무 젊어. 고작 4세대 각성자가 어떻게 길드를 이끄나? 아니… 모르지. 길드장이 숨겨둔 마핵까지 따로 챙겨줬다는데. 화공자가 길드장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여준후는 생각에 잠겨 북적이는 거리를 걷다가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와이프가 기다리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업소에 들러 소미의 엉덩이를 두들기고 시원하게 한 발 뺄 생각이었다.
‘소미 그년이 인물은 떨어지지만 엉덩이가 일품이지.’
그 순간.
여준후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누군가가 그를 짐짝처럼 집어 들었다.
땅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
..
...
한참을 내달린 복면인은 인적 없는 망가진 건물에 여준후를 내려놓았다.
“흐음… 이놈은 거악은 아니지만 소소악쯤은 되니까.”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린 복면인이 여준후의 등줄기 몇 곳을 두들겼다.
벌레가 온 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에 여준후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뒤이어 팔이 뽑히는 듯한 통증과, 다리가 부서진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마흔여덟. 마흔아홉. 쉰.”
쉰을 헤아린 복면인이 다시 여준후의 등줄기 몇 곳을 두들겼다.
“쯧, 그것도 못 참고 똥을 지려? 아무튼 연구원이라는 새끼들은 약해 빠져서 큰일이라니깐.”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부러진 줄 알았던 팔도, 부러진 줄 알았던 다리도 멀쩡했다.
여준후가 바닥을 비비적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알지? 소리 지르면 못 써요.”
여준후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거든. 잘 생각해서 대답해라?”
“…쿨럭! 그… 그러문입죠!”
검은색 스키마스크로 덮인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눈이 여준후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균열을 여는 방법, 균열을 닫는 방법, 균열이 생긴 이유, 균열이 만들어지는 원리. 아는 대로 싹 털어놔.”
“…균열… 이요……?”
여준후가 눈을 끔벅였다.
그는 무엇이든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 낮에 새로 개발한 각성자용 마비독 제작 방법을 물어봐도 순순히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어떤 것도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기밀 유지도 승진도, 누구에도 말하지 않은 마지막 목표인 유성길드의 길드장 자리에 오르는 일도,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
눈이 예쁘고 목소리가 앳된 남자는 아주 쉽게 자신의 그 소중한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여준후는 그의 물음에 답변하지 못했다.
그것은 여준후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몰라? 모른다고? 아이 씨.”
“정말입니다. 절대로 숨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부하실 일이 있으실까요. 제가,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엇이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여준후는 복면인의 발목을 부여잡으며 필사적으로 내뱉었다.
복면인이 벅벅 목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뭐. 빈손으로 가기도 억울하니까. 야. 힐링포션 만드는 방법부터 자세히 말해봐. 혹시 딴 생각하면, 알지?”
어두컴컴한 하늘에 한 줄기 동아줄이 내려왔다.
힐링포션의 제조법은 연구소의 특급 기밀이지만, 목숨에 비하면 싼값이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그러믄입죠, 선생님. 힐링포션의 주재료는 오우거 혈액입니다. 그리고 독성을 제거한 슬라임 조각과 오미호 이상 미호의…….”
***
균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짙은 어둠이 꿈틀거리는 검은 구덩이.
1차 블랙데이를 전후해 전 세계에 생성된 균열이 한반도 남쪽에만 300여 개였다.
그 모든 균열은 4차 블랙데이 이후 십 년 넘게 휴균 상태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다.
균열을 채운 어둠, 마기(魔氣)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균열의 활동을 알리는 신호였다. 끝없이 괴물이 튀어나오는 블랙데이가 시작된다는 신호.
현재 균열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게 전부였다.
균열이 처음 나타난 지 30년.
균열을 소멸시키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이제는 균열과 블랙데이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재앙으로 여겨졌다.
지진과 태풍, 가뭄과 홍수처럼.
하지만…….
검황의 내력과 충돌했던 응축된 마기.
균열이 풍기는 기운은 그 어둠과 비슷했다.
새벽안개처럼 축축하고, 생선 내장처럼 미끌거리는…….
첫 번째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것을 마주쳤고,
세상에 균열이 나타난 순간에 그때의 기억이 돌아왔다.
균열의 등장으로 내가 전생을 기억하게 된 것인지, 환생을 시작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번의 죽음 후에도 삶이 이어질지, 혹은 이번 생이 마지막 삶이 될지도 알 수 없다.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균열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확실하지.’
소화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미 소중해져버린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 환생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단지 균열에 대해 알려고 했을 뿐인데…….
“아오! 이 미친 여우새끼들!”
꼬리 일곱 개 달린 여우새끼 다섯 마리가 나를 향해 미친 개… 아니, 미친 여우 새끼처럼 달려들었다.
놈들이 경쟁하듯 내뱉은 불길에 엉덩이가 뜨끈뜨끈했다.
“한 놈씩 덤비라고! 비겁하게 일반인한테 다굴을 까냐!”
나는 경공을 최대한으로 전개해 놈들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한 놈씩 조졌다.
마지막 한 마리의 배때지에 검을 꽂아 넣는 순간.
머리 위에 짙은 구름이 드리웠다.
“또 어떤 새끼……!”
와이번이었다.
태양을 가리며 와이번 한 마리가 수직으로 하강했다.
나는 재빨리 경공을 펼쳐 나무 사이로 뛰어들었다.
콰아아!
와이번의 날카로운 발톱이 두꺼운 소나무 기둥을 움켜쥐었다. 박살난 나무조각이 후둑거리며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날개를 펄럭인 놈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갔다.
물론 멀리 가지는 않았다.
한 번 찍은 사냥감에 대한 와이번의 집요함은 계룡에 퍼진 내 명성 못지않게 유명했으니까.
나를 죽이거나, 놈이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터.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며 기감을 끌어올렸다.
허공에 떠 있던 기운의 덩어리가 급작스럽게 가까워졌다.
나는 허벅지의 단검을 뽑아내 기운을 실어 나뭇가지 틈새를 향해 내던졌다.
강하하던 와이번의 발톱이 단검을 움켜쥐는 찰나.
거세게 바닥을 내딛으며 웅크렸던 몸을 활처럼 펼쳤다.
파아앗.
초승달 형태의 검기가 와이번의 꼬리를 반으로 갈랐다.
하지만 그뿐.
와이번은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저 높이 떠올랐다.
.
.
.
길고 지루한 사투 끝에 와이번의 두 날개를 자르고 봉고차만한 몸통에 검을 꽂아 넣어 놈의 숨통을 끊었을 때쯤 나는 꽤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까딱 잘못하면 뒈지겠네.’
나는 경공을 전개해 일단 위험 구역에서 벗어났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다.
***
최지수가 정리한 목록에 있는 연구원은 총 322명이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절반은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을 정성껏 모셔 성의를 다해 물어보았으나…….
-정말 모릅니다. 제가 그때 하와이에서 열린 협회에도 참석했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 있었는데 결국 아무도 제대로 된 결과를 내어놓지 못했습니다.
-협회요? 저는 초청받지 못했는데 알기는 알죠. 그 협회 후로 균열 연구를 포기한 연구팀이 많았어요. 우리 팀도 그 직후 각성촉진제 개발로 방향을 돌렸죠.
-처음에는 균열을 연구했는데 모회사에서 경제성이 낮다며 지원을 줄여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아악! 살려주세요… 정말 모릅니다. 정말로…….
모두 같은 대답이었다. 그나마 의미 있는 정보는,
-차탄카. 최초의 균열이 시베리아의 차탄카에서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MM 연구소가 가장 마지막까지 균열을 연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차탄카에도 연구원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MM 연구소.
한지혁이 살던 블랙데이 이전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던 대기업 MM 산하의 연구소였다.
최지수가 정리한 명단에도 그곳에 소속된 연구원이 42명이었다. 단일 연구소로는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연구원들의 소재가 모두 ‘불명’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
지도에서 연구소 주변 지역이 ‘5단계 위험’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괴물에게 몰살당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남은 가능성은 그 연구소 하나뿐이다.
폐허가 된 연구소라 할지라도 남아 있는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실마리라도.
그렇게 연구소가 있었다고 알려진 용인으로 향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기운.’
5단계 위험 구역, 각성자들도 피해 다니는 위험 지역의 안쪽에서 묘한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마기(魔氣)가 아니다.
골짜기 안쪽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그 기운은, 어렴풋하지만 진법(陳法) 특유의 것이었다.
무공이 잊힌 세계였다.
단지 소설의 설정으로만 기억될 뿐, 아무도 무림을 실재한 과거로 여기지 않았다. 진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무공의 흔적을 이제 와서 발견할 줄은 몰랐다.
‘확인해야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는 안전한 나무 위에 앉아 소주천을 마치고 다시 위험 구역에 들어섰…….
와이번 일곱 마리가 떼를 지어 급강하했다.
“제발! 좀! 꺼지라고!”
***
위험구역은 과연 위험구역.
죽은 제 가족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지 죽어라 달려드는 와이번들과 하루 종일 숨바꼭질을 하고,
운기를 해서 바닥난 내력을 충전하고,
흙바닥에서 뛰쳐나온 서리거미의 배때지에 검을 꽂아 넣고,
또 운기를 해서 마비독을 빼내고…….
기감의 그물에 턱 턱 걸리던 괴물의 기운들이 거의 사라지는 데에는 열흘이 걸렸다.
역시 뛰는 괴물 위에 나는 일반인 있는 법.
이제 마지막 한 놈만 잡으면 끝이다.
두억시니.
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나도 두억시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10미터는 훌쩍 넘는 거대한 덩치.
검기로도 쉽게 뚫리지 않는 단단한 가죽.
거대한 몸통 위에 달린 세 개의 머리.
인간뿐 아니라 다른 괴물도 한 끼 식사거리로 삼는 상위포식자.
…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술사까지 겸업한다고는 못 들었다고.’
전사와 술사 투 루트로는 높은 수준에 오르기 어렵다는 생각을 놈 덕분에 버렸다.
여덟 개의 팔을 그렇게 빠르게 휘둘러대면서 입으로 불길을 쏴대고 손으로 얼음폭풍을 일으키고 발길질로 지진을 만들어내니.
어제도 검막으로 불길을 막아내는 순간 놈의 두 팔이 내 몸통을 붙잡았다.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려 도망치기는 했으나 내상을 치유하는 데 또 하루가 필요했다.
‘빨리 계룡에 돌아가야 해.’
이미 예정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돌아가면 최지수에게 하루이틀 잔소리 듣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다 저놈의 두억시니 때문이다.
‘하필이면 저기에 자리를 잡아서는.’
두억시니의 둥지는 골짜기의 입구였다.
나무가 자라고 크고 작은 바위가 여기저기 놓인 평범한 골짜기였다. 그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제외한다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이었다.
진(陳)의 기운은 바로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두억시니도 그 기운을 느끼는 듯했다.
놈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골짜기의 입구를 서성거리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 나왔다.
삼십 년 전의 연구소. 그리고 진법.
무엇인가가 있다.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