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MM 연구소 (2)
두억시니는 백여 미터 떨어진 야산 아래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여름 햇볕을 받으며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손가락으로 메두사의 꼬리를 쥔 두억시니가 메두사를 들어 올렸다. 혀를 낼름거리며 극독을 뱉어내는 메두사의 수십 개 뱀 머리는 놈의 앞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아가리가 메두사의 상체를 우적우적 씹었다.
식사를 마치면 곧 자리에 누워 낮잠을 잘 것이다.
두억시니가 마지막 남은 한 조각, 메두사의 꼬리를 꿀꺽 삼켰다.
식사를 마친 놈이 바닥에 등을 붙이고 웅크렸다.
오후 낮잠 타임.
두 개의 눈이 감겼다. 하지만 이마에 달린 한 개의 눈은 여전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사흘 동안 지켜본 결과 놈의 세 눈이 모두 감기는 일은 결코 없었다. 사냥을 나가서도 금방 둥지로 되돌아왔다.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
타닷.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놈의 희벅득한 눈깔이 쇄도하는 나를 금세 발견했다.
기다렸다는 듯 놈이 육중한 몸을 번개처럼 일으켰다.
쿠웅. 쿵.
10미터가 넘는 덩치가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놈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한껏 젖혔던 팔을 거세게 휘두르자.
가벼운 파공성을 내며, 강기가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아!
폭발 속으로 단번에 파고들며 연속으로 검을 내질렀다.
다섯 번의 찌르기가 모두 놈의 무릎에 명중했으나.
화르륵!
정수리로 불길이 쏟아졌다.
화염을 피해 왼쪽으로 돌았다. 발이 땅에 닿기 직전 땅이 푹 꺼졌다.
빠르게 팔을 뻗어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솟구치는 순간,
내가 있던 자리에 수십 개의 뾰족한 얼음이 날아들었다. 실로 간발의 차이.
놈은 아주 강한 상대였다.
가능하다면 피하는 게 현명할 만큼.
하지만 내 검은 놈의 팔을 잘라낼 수 있고.
놈의 관자놀이를 파고들 수 있다.
사흘에 걸친 전투 끝에, 여덟 개였던 놈의 팔은 이제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온전한 대가리는 이제 하나뿐.
놈이 네 개의 팔을 휘젓자 또 수십 개의 얼음송곳이 생겨났다.
검에 부딪혀 조각조각 박살난 얼음송곳이 단번에 기화했다.
안개가 낀 듯 시야가 온통 뿌옇게 물들었다.
검막으로 정면의 송곳을 튕겨내고 호신강기로 나머지 부분을 보호하며 취원보를 운용해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수십 번 검에 찔린 놈의 무릎에서 드디어 찐득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나는 단번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하얗게 빛내고, 이윽고 검끝에 맺혔다.
통나무처럼 두터운 무릎을 단번에 박살낼 수 있을 만한 강기.
‘아무리 네놈이 괴물이어도 이걸 맞… 어엌?’
[아따따뚜따]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울렸다.
동시에 내 몸이 파드득, 정지했다.
마치 마혈을 잡힌 듯한-.
‘설마 이게 그, 정신계 공격……?’
놀라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놈의 아래팔이 굳어버린 내 다리를 향해 다가왔으니까.
까마득한 높이에 있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으나 아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겠지.
기회는 단 한 번.
나는 눈을 내리감고 기운의 운용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고로 점혈은 나를 뻗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만이 아니다. 경지에 다다르면 스스로 혈도를 여닫아 타(他)가 아(我)에 끼친 영향을 해소할 수 있을 터. 너 역시 언젠가는…….
백회가 닫혔다.
후정과 아문과 기해가 차례로 닫혔다.
기맥을 휘돌던 진기가 멈춰 서고,
막힌 단전에서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놈의 손가락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덜렁,
몸이 뒤집히는 찰나.
닫힌 혈도를 한껏 열어젖혔다.
수문이 열린 댐처럼 기해를 통과한 진기가 거세게 기맥을 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움직였다.
허공에 덜렁거리던 오른발을 들어 올려 놈의 손을 걷어차며 단번에 솟구쳤다.
허공답보(虛空踏步)로 방향을 바꾸어 내리치는 팔을 회피하고,
왼손으로 항룡권(降龍拳)을 시전해 두 번째 팔을 쳐내고,
연이어 날아드는 세 번째 팔을 무상각(無上脚)으로 걷어찼다.
드디어 놈의 관자놀이가 사정권에 들어왔다.
한껏 젖힌 오른 어깨를 거세게 뻗었다.
콰득!
희게 빛나는 검끝이 놈의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활짝 열어젖힌 기해와 명문을 타고 진기가 폭우처럼 솟구쳤다.
콰드득! 콰득!
솟아오른 검기가 놈의 머리통을 쑤셨다.
‘아직, 부족해.’
나는 기맥에 흩어진 기운을 모두 끌어모아 검에 쑤셔 넣었다.
몸을 보호하던 호신강기가 사라지고,
그 모든 기운이 기맥을 타고 검날을 채웠다.
온 몸의 기혈이 들끓었다.
오른팔이 터져나갈 듯 쿵쿵거렸다.
울컥, 핏물이 솟구쳤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놈의 거대한 손바닥이 보였다.
호신강기가 사라진 지금, 스치기만 해도 대가리가 터져나갈 터.
‘조금만 더……!’
그 손바닥이 막 내 이마에 닿기 직전.
기맥을 타고 오른 검기가 형태를 이루고 검끝에 맺혔다.
콰아아!!!
격렬한 폭음과 함께,
놈의 대가리가 터져나갔다.
질긴 가죽과 두개골이 조각조각 찢겨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운을 잃은 내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던 거 같은데…….’
오래 전.
내 첫 죽음이 바로 이러했……
“형!!!!”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강산이었다.
***
“이야… 이걸 혼자 다 잡았다고? 형 솔직히 사람 아니지? 신종 인간형 괴물… 악!”
김강산이 뒤통수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김강산을 호법을 세워놓고 두어 번 소주천을 돌리자 급한 내상은 가라앉았다.
완전히 치유하려면 한 달 요양은 필요하겠지만…….
지금 살아 있으면 장땡이지.
내가 계룡을 떠나고 하루가 지나지도 않아 최지수는 내가 자신의 염려와 당부를 개똥으로도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없는데 자신마저 계룡을 비울 수는 없어 김강산을 보내려고 했지만.
“완전 난리 났잖아. 성벽 뚫릴 뻔했어. 나 아니었으면 진짜 계룡문 끝장났을 걸?”
김강산이 잔뜩 으스대며 이야기한 바로는, 백여 마리 오크와 또 백여 마리 오미호와 또 백여 마리 히포그리프가 연달아 계룡을 습격했다는 것이었다.
그 공격을 막아낸 것은 화염전사 김강산의 눈부신 활약.
“캬아. 계룡 여자애들 눈알이 이렇게 하트 모양으로 변해가지고. 나 가는 데마다 사인해달라고 난리 났다니까?”
물론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김강산은 그 방어전에서 무릎이 박살나서 회복하느라 출발이 늦었다.
“아마 계룡성 상황이 쫌만 괜찮았으면 지수 형이 다 버리고 나왔을 걸? 잠도 못 자고 얼마나 안달복달했다고. 근데 애들이 개판이라.”
“아직도 그 모양이냐?”
“오크가 성벽을 넘어오고 있는데도 그거 막는 건 뒷전이고 니가 앞에 서라, 싫다 니가 서라 해싸면서 지랄염병을 떠는데 답답해가지고 뒤질 뻔했어.”
“그런데 너까지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냐.”
김강산이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지수 형이 형 시체라도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던데.”
음…….
아무래도 돌아가면 잔소리를 톡톡히 듣겠지만.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일단 들어가자.”
***
오행암행진(五行暗行陳).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무엇인가를 숨기기 위한 진법이다.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았으나…….
-그냥 깨부수면 되는데 왜 이런 것까지 공부하라 하십니까!
-이 아둔한 놈아. 네놈은 그 기질이 문제다.
-사형도 참. 이게 무엇이 어렵다고 그러셔요.
-진법이 그리 좋으면 소화 너나 해라. 사부, 저는 소화 데리고 다니면… 악! 사부! 그렇게 때리시니까 제가 점점 머리가 안 돌아가지요.
-더 나빠질 머리도 없다, 이놈아.
…그러고 보니 대가리 패는 걸 누구한테 배웠나 싶었는데.
사부였고만. 사부였어.
“내가 밟은 대로만 따라와. 엄한 데 밟지 말고.”
수문(水門)의 역할을 대신하는 작은 샘물을 딛고 토문(土門)의 위치에 놓인 바위를 옆으로 밀치고 또 이러저러하고 저러이러한 일련의 동작 끝에 마지막으로 화문(火門)의 자리에 서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켰다.
두 개의 작은 불꽃이 좌와 우로 뻗어나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두 불꽃이 다시 하나로 만났다.
불의 원.
원 안의 공기가 열기에 일렁였다.
그리고
일순간 경계가 사라졌다.
“뭐, 뭐야!”
김강산이 대도를 움켜쥐었다.
“그거 아냐. 아니…….”
나는 불현듯 말을 멈췄다.
사라진 경계 뒤로 골짜기 안의 진짜 풍경이 드러나 있었다.
높은 철제 담장으로 둘러싸인 3층짜리 건물.
담장의 위에 건물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MM 연구소.
그리고…….
건물의 녹슨 난간에 새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온몸이 흰 깃털로 뒤덮인, 거대한 매.
김강산이 나에게 무어라 말했으나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난간에 앉은 매가, 그 매의 모습이…….
갓 내린 함박눈처럼 하이얀 깃털.
푸른빛이 감도는 우아한 부리.
그 매의 모든 것이,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녀석과 완전히 같았으므로.
‘하지만, 그 녀석이 어떻게 지금…….’
결계가 풀린 주변을 관찰하듯 살피던 매가 난간을 딛고 날아올랐다.
길쭉한 날개를 벌리고 날아오르는 모습은 정말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 녀석이 건물 위를 한 바퀴 돌았다. 녀석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발견했다.
‘…설마 정말로, 월매 너냐?’
이내 녀석이 나를 향해 활강하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버벅!
엉겁결에 들어올린 대도를 쥔 채로 김강산이 바닥으로 널브러지고,
내가 팔을 벌려 녀석을 껴안았다.
***
월악의 매, 월매.
월매는 우리가 자리하기 전부터 월악을 주름잡던 영물(靈物)이었다.
매 주제에 호랑이도 잡던 영물 중의 영물.
몇 해를 묵었는지 모르나 분명 보통 매는 아니었다. 영약 냄새에 환장을 해서 녀석 덕에 찾아 낸 영약이 여럿이었으니.
공청석유도 녀석 덕에 찾았고, 장백의 빙정도 녀석 덕에 찾았다.
소화가 영단을 한 번 맛보인 이후로는 영단에까지 맛을 들였다. 애들이 먹으려던 영단을 제 부리로 잡아채 도망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녀석의 뱃속에 들어갈까 염려되어 마지막 중원행에서 거두어 온 영단을 비동에 꽁꽁 숨겨 두었었는데.
‘그걸 내가 먹게 된 것도 월매 네 덕일까.’
내 어깨에 앉은 월매가 그렇다는 듯 내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형, 이렇게 큰 매가 있어? 이거 그리폰 아니야?”
“봐라. 대가리가 새대가리… 악! 아악!”
월매가 내 말을 알아들은 듯 부리로 내 정수리를 쾅 쾅 찍었다. 성질머리도 그대로인 것을 보니 월매가 확실했다.
“허얼. 형 우냐? 그렇게 아파?”
“…우는 거 아니거든.”
“아니기는. 개구라치시네. 내 인생에 림이 형이 우는 걸 다 보네. 앞으로 형! 님! 으로 모시겠습니다!”
김강산이 월매를 향해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접었다.
…나이로 따지면 월매가 큰형님이 맞기야 하지만.
하하.
하하하.
나는 축축한 뺨을 가만히 닦으며 가슴을 가라앉혔다.
‘혹시 소화도, 설표도 이 땅 어딘가에…….’
그럴 리 없다. 없다는 것을 알지만…….
5미터 가량의 연구소 담장에는 간격을 두고 스무 개가 넘는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본 총이었다.
진의 경계를 통과해 연구소를 들어온 괴물을 사격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담장과 주변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두두두두!
먼지 쌓이고 녹이 슨 모습과 달리 기관총은 다행히 정상 작동했다.
우리는 총알이 가득 들어 있는 기관총을 배낭에 쓸어 담았다.
건물 안에는 열 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
괴물에게 공격을 받은 듯 우그러진 철제 책상의 서랍을 뜯어냈다. 누렇게 변색된 보고서들이 서랍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보고서.
균열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연구.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표지를 넘겼다.
[…생성된 균열이 웜홀의 일종이라고 추론하였으나 최종적으로 Exotic Matter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ds2=c2dt2-dx2-dy2… 의 로런츠 변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또한…….]
‘…대체 뭔 소리냐고.’
한글인데 한글이 아니다.
[…이에 물리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물학적, 나아가 비물질적 연구를 지속한 결과…….]
세월이 묻어 누리끼리한 종이가 넘어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이상의 연구 결과 최종적으로 균열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는 여전히 밝혀내지 못했으며…….]
빛바랜 종이가 손바닥 아래에서 우그러졌다.
“형! 림이 형!”
나는 질끈 감은 눈을 뜨고 건너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미친…….”
“시발. 시바알. 형. 이거 어떻게 하냐? 응? 이거 어떻게 해?”
[마핵저장고]
라고 적힌 캐비넷 속에 유리병이 가득했다. 그리고…
유리병 속 투명한 액체 속에 담긴 동그랗고 영롱한 알.
“마핵이야… 마핵… 진짜 마핵이냐… 세상에… 꺄르륵… 끼루룩… 꼬르륵…….”
“형! 림이 형! 정신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