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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5화 (15/122)

15화. 원 팀 (2)

훈련 이틀째부터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구경꾼들은 이제 훈련장 주위를 빡빡하게 채우고 있었다.

성벽 수비 근무 중인 팀을 제외하면 계룡문의 각성자들은 모두 모인 듯했다.

심지어 일반인들로 보이는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저거는 어제도 썼던 진형이잖아. 3분 만에 깨져놓고 또 들고 왔네.”

“아냐. 저 진형 괜찮아. 어제 우리 팀이 12팀이랑 저걸로 붙어 봤거든. 술사 합만 잘 맞으면 화력 최고라고.”

“그래도 저거보다는 역시 2-2-2 진형이….”

“우리 팀이 어제 밤새 훈련한 결과 4-2가 가장 안정적이던데…”

진형을 평가하는 소리와,

“어제 김강산이 노란 화염구 만드는 거 봤어요? 4세대 각성자 중 최초라던데요. 근무 서느라 그 아쉬운 걸 놓쳤네요.”

“최초는 아니랍니다. 유성길드 적사단 부단장도 얼마 전에 성공했다 하더라고요.”

“화공자 정일형이요? 그쪽은 술사 아닙니까. 우리 쪽은 전사라고요, 전사.”

“술사고 전사고 간에 우리 계룡문 사람이 유성길드 최고 유망주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일만으로도 대단하지!”

“그런데 그 대단한 김강산을 어린애 다루듯이 하는 대표님은 대체 어떤 수준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훈련장의 비무대 위에 선 조은조의 귀에 왁자지껄한 소음들이 들렸다.

57전 57전패.

‘쪽팔려 뒤지겠네!’

처음에 조은조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6:1의 싸움인데다가 혹여 문파 대표를 크게 다치게 했다가 눈 밖에 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집에 대가리를 한 대 후려맞고 기절한 뒤로는 있는 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철퇴는 서림에게 스치지도 못했다. 지난 나흘 동안 서림에게 공격을 명중시킨 사람은 김강산과 최지수 둘뿐이었다.

전 입암파 조은조가 은영단에 지원한 이유는 단순히 돈 때문이었다.

계룡문에서 받는 월급과 출동 때마다 지급되는 수당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조은조는 젊었을 때 바싹 벌고 일미호 꼬치구이 가게를 차려 느긋한 노년을 보내고 싶었다.

훈련 첫날은 다들 나가떨어져 한 마디 나눌 힘도 없었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는 꼬박꼬박 주어지는 쉬는 시간 20분마다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단원들과 꽤 가까워졌다.

-명칠 오빠는 왜 신청했어요?

-다들 한 명씩 들어간다는데 청응파만 없으면 쪽팔리잖아요.

-저는요? 누님. 저도 물어봐 주세요.

-그래, 바름 씨는 왜 지원했어요?

이바름은 단장님께 무어라도 배워서 계룡을 지키고자 자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다 믿기는 어려웠으나 곡사파 놈들 중에서는 확실히 괜찮은 사람 같았다. 악질들을 싹 걸러냈다는 말이 단지 홍보용 문구가 아닌지도 모른다.

조은조는 철퇴의 손잡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가, 느슨하게 풀었다.

-손목에 힘 빼. 어깨도. 평소에는 느슨하게, 휘두르는 순간에만 빡. 알겠냐고? 엉? 야, 조은조. 무게중심은 하체에 두라니까. 무릎 굽히고, 팔꿈치 뜬다, 또?

수백 번 얻어터지고 수십 번 기절하는 자신의 귀에 쏟아지던 서림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조은조는 그 목소리에 따라 자세를 잡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김강산이 자신의 앞을 반쯤 가로막고 있었다.

술사들은 조은조의 십여 미터 뒤에 있었고, 세 술사를 보호하듯 최지수가 위치했다.

김강산의 어깨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조은조는 이제 김강산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알았다.

서른 번쯤 죽을 고비를 넘긴 지옥의 합숙 훈련의 성과였다.

“시-작!”

소리가 들리자마자,

김강산이 서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은조가 그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둘은 순식간에 훈련장 중앙에 도달했다.

서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강산이 도를 치켜드는 순간.

조은조가 오른쪽으로 산개했다. 거의 동시에 김강산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순간적으로 노출된 서림의 인중을 향해, 주먹만한 화염탄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제법이네!”

서림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화염탄을 손쉽게 회피했다.

모두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진짜는 지금부터지.’

조은조는 화염탄을 피하느라 허리를 숙인 서림의 상체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카강!

비스듬히 세워진 검집이 철퇴를 가로막았다.

그 사이, 김강산이 서림의 뒤통수를 노리며 대도를 내리그었다.

서림이 어깨를 비틀어 도를 회피하는 순간.

바닥을 스치듯 날아온 얼음창이 서림의 발목을 강타했다.

차차창!

조각난 얼음이 사방으로 비산했으나.

서림은 까딱하지도 않고 연이어 검집을 찔렀다.

조은조는 인중과 명치를 향해 차례로 날아드는 검집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어깨를 뒤틀었다.

하지만 검집은 뱀처럼 방향을 바꿔, 어깻죽지를 향해 날아왔다. 조은조로서는 막을 수 없는 한 수.

전이라면 손이 어지러워졌겠지만.

-팀원을 믿으라고. 믿지 못하면 팀을 나가든가.

‘누군가가 도와주겠지!’

최지수가 세운 석벽이 서림의 동선을 정확히 가로막았다.

그 등 뒤로, 불길 휘감은 김강산의 대도가 내리꽂혔다.

카앙! 캉! 카캉!

아주 짧은 시간. 검집과 도가 맹렬하게 부딪혔다.

조은조가 몸을 회전한 순간.

석벽이 사라졌다.

조은조는 서림의 등줄기, 허리끈에 매달린 깃발을 향해 빠르게 팔을 뻗었다.

서림의 몸이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

최지수의 목소리에 조은조가 철퇴를 들어올렸다.

카아앙!

검집과 철퇴가 부딪혔다. 조은조가 다시 한 번 철퇴를 휘둘렀으나.

서림은 이미 몸을 빼내 술사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최지수가 그 앞을 가로막고,

뒤따라간 김강산이 뒤를 노렸다.

두 술사는 아직 마력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

서림이 다시 한 번 몸을 솟구쳤다.

그가 노리는 곳은, 아마-.

카강!

이바름의 허벅지를 찔러들어간 검집을 조은조의 철퇴가 가로막았다.

조은조와 이바름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바름이 눈을 껌벅였다. 조은조가 바닥을 걷어차며 몸을 피했다.

콰아아!

굉음과 함께 화염탄이 폭발했다.

최지수가 세워준 석벽 뒤로 잠시 몸을 피했던 조은조가 다시 전투에 합류했다.

김강산과 최지수가 호흡을 맞춰 서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순간순간 빈틈이 생길 때마다 날아든 얼음송곳이 서림의 이곳저곳을 두들겼다.

‘괴물은 괴물이야.’

계룡문의 대표,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게 만든다는 잘생긴 청년이 상상도 못하게 강하다는 소문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쩔쩔맸던 곡사파 허심례를 한 번 검을 휘둘러 목을 날렸다는 얘기가 과장이라고 생각했건만.

지난 나흘간 조은조가 겪은 서림은 소문 그 이상이었다. 아니, 서림에 대한 소문은 서림의 절반의 절반도 다 담지 못했다.

‘이런 대표, 이런 단장이라면.’

서림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가 흰 검기를 뿌렸다.

김강산과 최지수가 주춤한 사이.

몸을 빼낸 서림이 다시 술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이바름이 날린 화염구를 간단히 회피한 서림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술사가 뒤에 있을 때는 피하지 말고 막아야지. 피하면 팀원이 죽는다고.

조은조가 철퇴를 비스듬히 세워 날아오는 검집을 가로막았다.

“숙여!”

등 뒤에서 이바름이 외쳤다. 조은조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이바름이 쏘아낸 작은 화염탄 세 개가 조은조의 등 위로 날아갔다.

서림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하얀 막에 부딪힌 화염탄이 퍼엉 퍼엉 소리를 내며 폭발하고.

그 등 뒤로 최지수와 김강산이 쇄도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잡고 있을 테니까.

김강산의 말을 믿고, 조은조는 폭발의 잔해 속으로 돌진해 철퇴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등으로 날아온 최지수의 검을 서림이 상체를 뒤틀어 막는 사이.

김강산이 붉은 불길이 일렁이는 대도를 들어올렸다.

서림이 검을 뒤로 뻗어 대도를 빗겨 막으며,

동시에 발끝으로 철퇴를 걷어찼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재빠르고 정확한 움직임.

‘그래. 이런 대장이라면, 어떤 괴물이라도…!’

조은조가 철퇴를 휘둘렀다.

-동작을 낭비하지 말라고. 계속 몰아붙여야지! 틈을 주지 마!

우상단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다시 좌하단으로.

서림에게 배운 그대로였다.

서림은 세 명의 전사에게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심지어 입꼬리에 가는 미소마저 매달려 있었다.

서림은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아니,

‘기쁜 건가?’

-그렇게 따지면 나도 나쁜 놈이었어. 나, 보육원 감독이었거든. 림이 형이 원래 나 죽이려고 했었는데.

조은조는 김강산의 말을 떠올렸다.

-약점…? 마음이 약한 거 아닐까요?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겉으로는 되게 무서워 보이는데 알고 보면 정 많은 사람. 내가 보기에는 대표님이 딱 그거야.

조은조는 이바름의 말을 떠올렸다.

공기를 가로로 찢으며, 검집이 날아오고 있었다. 검집의 끄트머리가 엄청난 속도로 조은조의 목줄기를 향해 쇄도했다.

조은조는 비스듬히 들고 있던 철퇴를 내던지고 두 팔을 완전히 내려뜨렸다.

그대로 돌진하면 검기 두른 검집이 조은조의 목줄기를 꿰뚫을 것이 분명했다.

회복술사가 회복시킬 수 없는 치명타.

‘단장님이 못 멈출 리 없어.’

쇄도하던 서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날아들던 검집이 일순간 방향을 바꾸었다.

눈동자처럼, 중심이 흔들리고.

일순간 휘청거린 서림을 향해 김강산이 길고 두툼한 팔을 뻗었다.

“으아아!!!!!”

손끝에 들린 흰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였다.

“시바알…! 이겼어, 우리가 저 미친 괴물을 이겼다고!”

조은조가 이바름을 부둥켜안았다.

이바름이 조은조를 부둥켜안았다.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을 김강산과 하하민, 박명칠이 내리누르듯 껴안았다.

“조은조, 목을 내놓다니 진짜 또라이구나!”

“꺄우앍앍! 나 320배 먹었어!!!!”

“은영단 니들 존나 멋있었다!!!”

“대표님, 오늘도 잘생겼어요!”

관객의 환호가 훈련장을 가득 메꿨다.

***

“거 봐. 내가 뭐랬어. 어린 애들은 축구 한 판 뛰면 한 팀이 된다니까?”

내가 어깨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졌는데도 기분이 꽤 좋았…

최지수의 표정이 묘했다.

“왜. 뭐.”

“야자타임. 높임말 써라.”

기분이 순식간에 좆같아졌다.

“얼른.”

“…거 보십… 시오. 제가 뭐랬… 습니까. 어린 애들은 축구 한 판 뛰면 한 팀이 된다…”

“다시.”

짧은 문장을 우물거리는데 돌아가며 헹가래를 치던 애들이 슬금슬금 이쪽을 돌아보았다.

김강산이 번쩍 팔을 들어 올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김강산의 모든 얼굴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어, 우리 귀여운 림아! 이 형이 꼬치구이 사주마, 이리와! 어여 와!”

나는 저절로 올라가는 오른손을 초인적인 의지로 멈춰 세웠다.

“림아! 하민이 누나~ 해봐. 누나는 맥주 사줄게!”

하하민이 왈왈 짖었다.

최지수가 왼쪽 입술 끝을 들어올리며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었다. 참… 나를 닮았다.

“림아? 설마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한입두말을 시전하지는 않겠지? 자, 이 형님 누님들께 대답부터 해야지?”

퇴로마저 막혔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금스흡느드. 긍스느 흥늠.”

“림이야. 강산이 형 잘 안들려효!”

“금그흡느드! 긍스느 쓰쁠 흥늠!”

훈련장을 꽉 메운 관중이 성벽이 떠나가라 웃어제꼈다.

그 중 원탑은 단연 김강산의 웃음소리.

‘한 시간 후에 두고 봐라. 내 이 치욕을…!’

.

.

.

“형! 혀엉! 그거 약속이잖아! 내기했잖아!”

“누가 뭐래? 이건 그냥 훈련이라고. 그. 냥. 훈. 련.”

김강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대도를 들어 올려 검을 막으려 했다.

퍼버버버벅.

물론 실패했지만.

“악! 아악! 대표님! 잘못했어요!”

“아니지. 하하민 네가 뭘 잘못했어. 이건 그. 냥. 훈. 련. 이라니까?”

퍼버버버벅. 퍼버벅.

하하민도 역시 실패했고.

퍼벅. 퍽. 퍼버버버벅.

박명칠과 이바름과 조은조도 나란히 실패했다.

“림아. 잘 생각해봐라. 나는 한 게 없다. 나는 원래 형이잖니. 네가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건….”

퍼버버버벅벅벅벅.

마지막으로 최지수가 실패했다.

여섯 명의 원정대원은 모두 대가리에 커다란 혹을 매단 채 바닥에 널브러져 움찔거렸다.

“…그러게 내가 뒤끝 심하다고 했잖아….”

“저 괴물… 내가 언젠가…!”

“은조야. 이룰 수 없는 꿈은 꾸는 게 아니다.”

김강산이 끙끙거리며 바닥을 기다가 벌렁 돌아누웠다.

“키야. 달 예쁘네.”

“그러게. 오늘이 보름이구나.”

“달도 좋고. 공기도 좋고. 괴물도 이기고.”

“이런 날 일미호 꼬치구이에 맥주 한 잔 딱 때리면 딱인데.”

“…갈까?”

“지금?”

“코오오올!”

나는 녀석들을 따라 시선을 들어올렸다.

빛바랜 달이 어두워진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월매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사형. 보세요. 보름이네요.

-사형! 술 그만 처먹고 달구경 좀 하십시오.

계룡문의 훈련장에서 보는 보름달은 은영정에서 보던 그것과 같았다.

그래, 어쩌면…

‘이곳도 월악이구나.’

뺨에 닿는 깃털이 오래 전 그때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바닥을 구르던 녀석들에게서 명랑한 목소리들이 날아왔다.

“림이 형! 꼬치구이에 맥주 콜?”

“대표님, 같이 가실 꺼죵?”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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