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유성길드의 초대장 (1)
눈을 내리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크게 부풀었던 가슴이 이내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활짝 열어젖힌 명문과 기해를 통해 밀려나온 단전의 기운이, 임맥과 독맥을 통과해 12경맥을 따라 줄기줄기 흘렀다.
흘러들어온 기운과 흘러나온 기운이 기맥의 곳곳에서 부딪혀 뒤엉켰다.
삼재혼원공의 내기(內氣)와 대환단의 외기(外氣).
과연 무림의 북두, 소림의 영단.
한 알 영단에 서린 기운이 사뭇 무거웠다.
이 영단의 기운을 다 나의 내력으로 만들…
“림아! 우리가…!”
이일삼의 목소리에서 귀를 닫으며 나는 운공을 이어나갔다.
뒤엉킨 두 기운은 이제 하나로 엉켜 백회를 향해 치받고 있었다.
“수련 중이구나. 아, 이거 진짜 대박 소식인데. 개대박. 미친 대박.”
옅은 의식 속으로, 벌컥,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일삼이 너. 대표님 방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 처먹냐.”
“내가, 내가 뭘 어쨌다고! 성공했잖아. 성공했으니까 림이한테도 알려줄라 했지! 림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언제까지 림이야. 이제 보육원에서 너랑 놀 때랑 달라. 대표님이라고, 대표님. 서 대표님 수련 끝나면 보고하고, 나와서 네 일이나 해.”
“이사 너 말이 심하다? 내가 림이 방해하려고 들어왔냐?”
“그게 방해라고. 언제까지 철없이 굴래? 림이랑 지수 형이랑 강산이한테 업혀서 사니까 좋아? 드디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으니까 이제 철없이 굴지 말고…”
이이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이일삼의 생각은 더욱.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일삼과 이이사의 목소리를 듣기는 오래간만이었다.
그들을 위해 마련한 성 안 보육원은 계룡문 본부에서 멀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가다 마주칠 만큼의 거리도 아니었다.
백회에 닿은 기운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단전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단전에 기운을 갈무리하며 눈을 떴다.
이이사에게 멱살을 잡힌 채 해맑게 웃는 이일삼의 얼굴이 보였다.
이일삼이 손에 쥔 유리병을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림아! 우리 힐링포션 제작 성공했어!”
MM 연구소에서 발견한 것은 마핵만이 아니었다.
마력증폭제 연구.
오우거 혈액을 활용한 힐링포션 제조법 연구.
각성의 원리와 기술 개발에 대한 연구.
내가 그곳을 찾은 이유, 균열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모든 정보가 그 연구소에 있었다. 그동안 길드에서 독점하고 공개하지 않던 모든 정보.
‘월악의 유산… 이라고 해야겠지.’
계룡문 정도의 중소문파에서 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월악의 유산 덕택이었다
최지수는 연구소의 소장으로 정하영을 추천했다. 이일삼과 이이사를 비롯한 보육원 애들도 연구소 소속이 되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
무쇠 솥 속에서 무엇인가가 보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본 익숙한 얼굴들이 좁은 연구실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빼야 해. 오우거 혈액을 2g 추가하고, 미소야! 창고에 오미호 힘줄 얼마나 남았다고?”
정하영은 진지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지시하고는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으며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내밀었다.
“강산이 데리고 확인도 끝냈어. 손가락 잘랐는데 1분 만에 재생 완료.”
“부작용은 없고? 지난번에 것은 손가락 하나 더 났잖아.”
“전혀. 네버.”
나는 정하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오우거 한 마리로 열 병?”
“열한 병. 완전 쩔지. 그동안 유성길드에서 가격 후려쳤던 거 생각하면 진짜 속이 시원한데 배가 존나 아파.”
네말 곧 내말이다.
전라의 무등길드.
경상의 서문길드.
강원의 강원길드.
경기의 화성길드.
인천의 제물포길드.
서울의 대한길드.
그리고 충청의 유성길드.
지금의 한반도 남쪽은 일곱 길드가 각각의 왕국을 이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곱 길드는 힐링포션 생산법부터 마력증폭제 제조 방법, 각성자용 기술 수련 방법 따위 온갖 것들을 독점하며 20년이 넘게 세를 유지했다.
검황 시절의 구파일방과 비슷하다.
무력으로 괴물로부터 성민을 보호하고, 성민에 기대어 먹고 산다는 점이.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여념이 없다는 점도.
중원의 구파일방은 검황에게 ‘해동(海東)’이라는 딱지를 붙이려 안간힘을 썼다. 결국 나는 스스로의 검으로 그 딱지를 떼어냈다.
그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자신들의 세력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견제하면서 마교와의 전쟁에 앞장서지 않으려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발을 빼지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상황이 다급해지지는 않았겠지.’
“하영아! 힐포 완성했다며? 고생했다! 잘했… 림이도 여기 있었구나? 수련한다더니. 연구소에는 어쩐 일이냐.”
들어오던 최지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왼손에 들고 있던 무엇인가를 슬그머니 등 뒤로 숨기면서.
“형. 뭐냐, 그거.”
물론 내가 놓칠 리 없지.
나는 재빨리 그것을 잡아챘다.
두 마리 독수리가 부리를 맞댄 모양의 붉은 밀랍 인장이 종이봉투의 입구를 봉하고 있었다.
유성길드에서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이걸 왜 나 안 주고 형이 갖고 있어?”
“너 수련하느라 바쁘지 않으냐. 내가 대신 다녀오마.”
“이름 높은 계룡검룡을 꼭 뵙고 싶다고 적혀 있는데?”
계룡검룡(鷄龍劍龍).
계룡문을 세운 뒤로 새로 붙은 별호였다.
‘솔직히 청불은 좀 아니지. 내가 19금도 아니고.’
역시 세력이 커지니 평가가 달라졌다. 이 맛에 문파 세우는 거… 는 아니지만. 기왕 세운 문파, 이름도 얻으면 좋고말고.
***
알고 보니 유성길드에서 방문을 독촉하는 편지가 날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새로 성주가 되었으니 왕을 알현하러 오라는 거겠지.
그동안 내가 계속 성을 비웠고, 내가 돌아온 뒤로도 두어 번 도착한 편지를 최지수가 숨겼다.
“림아. 뭘 거기까지 간다고 그러냐. 귀찮고 짜증날 텐데.”
“아닌데? 전혀 안 귀찮은데? 짜증 1도 안 나는데?”
“자기네들이 왕도 아니고 우리가 신하도 아닌데 왜 오라 가라야. 부른다고 가는 사람은 아니지, 네가.”
최지수는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유성길드에 가면 사고를 치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역시 최지수가 나를 잘 안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이렇게까지 나를 보고 싶어 하는데. 어디 먼 데도 아니고. 반나절이면 다녀올 데를.”
“…예의? 림이 너한테 없는 유일한 게 그것인데.”
“월매야! 와서 형 좀 물어라!”
“월매 아까 성 밖으로 사냥 나가더라. 걔는 어떻게 매가 그리폰을 잡냐. 꼭 지 주인 닮아서 아주….”
“아주, 뭐?”
“…용맹하지.”
어째 요즘 최지수의 말하는 뽄새가 점점 김강산을 닮아 갔다. 그래도 형인데 대가리를 후려 팰 수도 없…
퍼버버벅.
없을 이유는 없지. 내가 첫 번째로 뒈졌을 때 일흔셋이었는데, 뭐.
잠시 후 최지수가 뒤통수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대신 다녀오마. 림이 너는 수련에 집중해라. 이번에 찾은 대환단 소화시켜야 한다면서.”
기필코 내 방문을 막으려는 뽄새가 좀 수상쩍었다. 이거, 아무래도,
“형. 유성길드 가서 유인 작전 같이 하자고 설득하려고 그러냐?”
사흘 전, 우리는 세종시 인근에 매설된 대량의 지뢰를 발견했다.
최지수는 마핵 한 알의 마력을 몽땅 대지술사의 응용 능력 중 하나인 탐색능력에 쏟아 부었다. 그동안에는 전투능력을 높이는 데 급급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영역이었다.
그 결과, 영약탐지조 못지않은 금속탐지인이 되어 버려진 총기를 찾겠다며 근처를 싸그리 뒤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와 쌓인 흙더미 아래 몇 자루 총기를 찾기는 찾았으나 녹슬어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 지뢰지대를 발견한 것은, 우리로서도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가 빼곡하게 박힌 100여 미터 폭의 지뢰지대는 옛 세종성벽을 따라 10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졌다.
최지수는 그곳을 발견한 날부터 그 지뢰지대를 이용해 근방의 괴물들을 싹쓸이하자고 주장했다.
과연 그다운 생각이었다.
-근방의 괴물들을 모두 섬멸할 수 있는 기회다.
-거기까지 유인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무슨 수로? 계룡성 방어도 해야 하고, 형도 알다시피 외부로 뺄 수 있는 숫자는 끽해야 오십 안짝이라고.
-림아.
-왜 그렇게 은근하게 부르지요, 형님?
-유성 길드에 협조를 요청하자.
-길드 놈들이랑 같이 작전을 하자고? 그 거만한 새끼들이랑?
-유성 길드의 길드원은 천 명이 넘는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근처의 괴물들을 모두 섬멸할 수 있다.
침을 토하며 열변을 튀기는 얼굴이 아주 진지했다.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진 괴물들이 대규모로 결집하여 인간의 거주지를 공격하는 몬스터 웨이브.
그 말인즉슨, 그놈들을 싹쓸이하면 한동안 성 밖이 꽤나 안전해진다는 의미다. 두억시니처럼 몬스터 웨이브에도 움직이지 않는 대형 괴물들은 어차피 제 서식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모인 괴물들을 일망타진하면 일반인들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아주 넓어지겠지.
아주 좋은 생각이다. 분명 아주 좋은 생각이지만.
-형. 그 지뢰밭을 그 새끼들이 몰랐을까?
-…알고 있었다고?
-거기 탐색술사가 한둘이야? 지뢰밭이 없다가 갑자기 생겼대? 전쟁 때 만들었을 테니 적어도 이십오 년 묵은 지뢰밭인데 그 새끼들이 그걸 몰랐겠냐고.
최지수는 모든 가능성을 열거하며 그 새끼들을 옹호했다.
-지뢰는 이십오 년 전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탐색 능력이 알려진 건 십 년 전이지 않니.
-형 그거 찾아내는 데 고작 한 달 걸렸거든?
-그동안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수도 있겠지.
-상황? 사아앙호아앙? 형. 정신 차려. 그건 능력 문제가 아냐. 의지 문제라고요.
그 뒤로 얘기를 꺼내지 않기에 납득한 줄 알았는데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최지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득해보려고 한다.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할 수는 없다.”
“나 떼어 놓고 혼자 몰래 가서? 협조해주면 대가로 마핵이라도 준다고 약속하게?”
“…그런 생각은 절대 안 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니. 아니면 정말로 그 지뢰밭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문득, 오래전 대화가 귀를 파고들었다.
-소화야.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을 거둘 거냐?
-힘닿는 곳까지 해야지요.
힘닿는 곳까지라….
가벼운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샜다.
한 가닥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최지수의 시선은 소화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쯧, 어쩌다 이번에도 이런 인간에게 정을 줘서는.’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그래. 뭐, 가서 얘기라도 해보지.”
“정말? 정말이냐, 림아?”
“대신 안 되면 깔끔하게 손 털 거야. 그 새끼들한테 아쉬운 소리하기 싫다고.”
“그럼, 당연하지. 당연하고말고. 우리 림이가 계룡검룡 되더니 철들었구나, 철들었어.”
최지수가 싱글벙글하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의 기대대로 일이 풀리면 참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텐데.’
***
몇 달 동안이나 방문을 미루어 오던 계룡검룡이 드디어 유성길드에 방문하겠다는 답신을 전해온 그날 밤, 여준후는 감찰단 단주 석민혁의 은밀한 방문을 받았다.
“이번에 계룡검룡이 내방하면, 화공자와 비무를 시킨다고 합니다.”
“화공자와 계룡검룡이요?”
“요즘 계룡검룡의 명성이 워낙 드높으니 콧대를 꺾어 놓을 심산이겠지요.”
“글쎄요, 그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닐 텐데요. 아무리 소문이 과장되었다고는 해도…….”
허심례는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져 쫓겨나기 전까지 유성길드 소속이었다.
눈앞의 석민혁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강자였다.
계룡검룡은 그런 허심례의 목을 한 칼에 날렸다고 했다. 그 뒤로 들려오는 소문들도 심상치 않았다.
십 년 넘게 아웅다웅하던 곡사파와 입암파, 청응파를 일통했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을 때 모두들 그게 잘 굴러가겠느냐고 비웃었었다.
하지만 계룡성은 그 뒤 몇 번 있었던 대규모 괴물의 공세를 모두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예전과 달리 유성길드에 구원 요청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룡문에서 힐링포션과 마력증폭제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직도 유출 경로를 파악하지 못했다니요. 이대로라면 나도 더 이상 소장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어요.
지난주 같은 자리에서 석민혁에게 질책을 받으며 여준후는 몇 달 전 자신을 납치했던 복면인을 떠올렸다.
그날 그자에게 힐링포션과 마력증폭제 제조법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자가 계룡문의 문도였나. 하지만 제조법의 핵심은 잘 숨겼는데. 대체 어떻게 완성했지.’
여준후는 2팀 팀장을 살해하고, 그가 제조법을 유출한 죄책감으로 자살했다고 위장하여 석민혁의 질책으로부터 벗어났다.
일신의 무력과 조직 장악력까지.
신생 문파라고 만만히 볼 자가 아니었다. 이제 대전에도 계룡검룡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석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길드장도 이제 판단력이 흐려졌어요.”
“어쨌거나 화공자가 비무에서 패배해서 체면을 구기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요. 그 멀끔한 얼굴이 구겨지는 꼴을 구경하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습니다.”
석민혁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의 침묵 뒤 들려온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은밀했다.
“소장님. 그 약 말입니다. 얼마 전에 완성되었다 하셨지요?”
“네. 단주님께서 실험체를 조달해주신 덕에 3차 검증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 약이, 화공자에게도 통할까요?”
면독수(眠毒水)는 여준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극독이었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으나 실험체를 구하기 위해 감찰단주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재료를 구하기 힘든 탓에 단 세 병 밖에 만들 수 없었으나 충분한 면독수를 생산한 후에는 길드를 손에 넣는 것도 꿈이 아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는 석민혁도 그때가 되면….
여준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특히 비무 중이라면, 마력을 소모한 만큼 약효가 잘 돌지요.”
“역시 소장님과는 말이 잘 통해서 좋아요.”
“하지만 계룡검룡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을 텐데요. 그자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면 어쩝니까.”
석민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소장님. 어떤 사람의 입이 가장 무거운지 아십니까.”
“…아하. 그렇지요. 죽은 자는 말이 없지요.”
“이렇게 마음이 통하니 제가 언제나 든든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여준후와 석민혁이 탁자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